도서상세정보
Detail Information
세종의 원칙 : 시대를 초월한 가르침, 세종에게 묻다
저자
출판사
출판일
20210518
가격
₩ 14,000
ISBN
9791191464177
페이지
255 p.
판형
145 X 210 mm
커버
Book
책 소개
이럴 때 세종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역사를 거울로 삼아 위대한 시대를 연 세종은, 스스로도 시대를 넘어 면면한 거울이 되어왔다. 살아가면서 길을 잃었다면 그 거울에 물어보자. 흔히 세종과 그의 시대를 위대하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위대한지, 그 위대함은 어떤 힘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잘 모른다. 한 개인이 이루었다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을 만큼 엄청난 업적의 배경에는 세종만의 분명한 원칙이 있었다. 이에 저자는 『세종실록』을 토대로 7개 분야로 나누어 세종의 원칙을 정리함으로써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다. 이 책은 세종에게 배우는 지혜서이지만 그 자체로 손색없는 세종학이기도 하다. 시대를 초월한 가르침을 따라가다 보면 ‘세종’이라는 이름 너머 아들이자, 남편이자, 아비이자, 군주였던 한 인간의 완전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거울로 삼아 위대한 시대를 연 세종은, 스스로도 시대를 넘어 면면한 거울이 되어왔다. 살아가면서 길을 잃었다면 그 거울에 물어보자. 흔히 세종과 그의 시대를 위대하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위대한지, 그 위대함은 어떤 힘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잘 모른다. 한 개인이 이루었다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을 만큼 엄청난 업적의 배경에는 세종만의 분명한 원칙이 있었다. 이에 저자는 『세종실록』을 토대로 7개 분야로 나누어 세종의 원칙을 정리함으로써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다. 이 책은 세종에게 배우는 지혜서이지만 그 자체로 손색없는 세종학이기도 하다. 시대를 초월한 가르침을 따라가다 보면 ‘세종’이라는 이름 너머 아들이자, 남편이자, 아비이자, 군주였던 한 인간의 완전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들어가는 말 위대한 시대를 낳은 열린 리더십
1장 태종의 유산
01 왕권 강화의 기틀을 마련하다┃02 왕권 위협의 싹을 미리 자르다┃03 태종의 유산, 마침내 성군을 낳다
2장 공부의 원칙
04 세상 그 어떤 조건에도 공부 의지를 꺾지 않다┃05 야간 독서 금지령에도 독서를 멈추지 않다┃06 같은 책을 천 번이 넘도록 읽다┃07 근본부터 충실하게 다지다┃08 궁금한 것을 그냥 넘기지 않다┃09 구체적으로 질문해서 대안을 끌어내다┃10 독서의 힘으로 운명을 바꾸다┃11 솔선수범하는 리더십을 보이다
3장 소통의 원칙
12 먼저 조신들의 의견부터 구하다┃13 쓴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기탄없이 말하라”┃14 소수의견도 존중하여 “그대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15 자기 잘못을 바로 시정하여 “그대의 말이 옳다”┃16 끝까지 믿고 맡겨서 “황희의 의견대로 하라”┃17 최초의 전국여론조사, 백성의 소리를 직접 듣다┃18 충분한 논의를 거쳐 국가 대사를 결정하다┃19 반대파는 권위가 아니라 논리로 설득하다
4장 인재 등용의 원칙
20 사람이 가진 단점보다 장점을 더 크게 보다┃21 의심나면 맡기지 않되 맡겼으면 의심하지 않다┃22 포용의 리더십으로 정적까지도 껴안다┃23 출신 성분에 구애됨 없이 중용하다┃24 도덕적 허물보다는 능력을 더 크게 사다┃25 문무를 겸비한 신하를 우대하다┃ 26 과학과 예술 분야의 전문가를 중용하다
5장 국가 경영의 원칙
27 무엇보다 우선하여 민생을 돌보다┃28 오로지 백성을 위해 실용을 앞세우다┃29 억울한 백성이 없게 하다┃ 30 파격적인 제도로 사회적 약자를 돌보다┃31 사대를 하는 대신 철저하게 실리를 취하다┃32 재난에 대비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다┃33 신중하게 결정하되 원칙은 끝까지 지키다
6장 훈민정음 창제의 원칙
34 지극한 애민정신으로 새로운 문자 창제에 나서다┃35 그 어려운 창제 작업을 혼자서 감당하다┃36 반대론은 논박으로 응대하되 다만 무례를 처벌하다┃37 초수리에서 정인지와 합류하도록 안배하다
7장 인간으로서의 원칙
38 골육상쟁을 끝내고 화목한 가족을 이루다┃39 극진한 효도로 부모를 섬기다┃40 격구와 강무로 신체 건강을 돌보다┃41 정치에 희생된 가족의 비극을 부부 사랑으로 이겨내다
1장 태종의 유산
01 왕권 강화의 기틀을 마련하다┃02 왕권 위협의 싹을 미리 자르다┃03 태종의 유산, 마침내 성군을 낳다
2장 공부의 원칙
04 세상 그 어떤 조건에도 공부 의지를 꺾지 않다┃05 야간 독서 금지령에도 독서를 멈추지 않다┃06 같은 책을 천 번이 넘도록 읽다┃07 근본부터 충실하게 다지다┃08 궁금한 것을 그냥 넘기지 않다┃09 구체적으로 질문해서 대안을 끌어내다┃10 독서의 힘으로 운명을 바꾸다┃11 솔선수범하는 리더십을 보이다
3장 소통의 원칙
12 먼저 조신들의 의견부터 구하다┃13 쓴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기탄없이 말하라”┃14 소수의견도 존중하여 “그대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15 자기 잘못을 바로 시정하여 “그대의 말이 옳다”┃16 끝까지 믿고 맡겨서 “황희의 의견대로 하라”┃17 최초의 전국여론조사, 백성의 소리를 직접 듣다┃18 충분한 논의를 거쳐 국가 대사를 결정하다┃19 반대파는 권위가 아니라 논리로 설득하다
4장 인재 등용의 원칙
20 사람이 가진 단점보다 장점을 더 크게 보다┃21 의심나면 맡기지 않되 맡겼으면 의심하지 않다┃22 포용의 리더십으로 정적까지도 껴안다┃23 출신 성분에 구애됨 없이 중용하다┃24 도덕적 허물보다는 능력을 더 크게 사다┃25 문무를 겸비한 신하를 우대하다┃ 26 과학과 예술 분야의 전문가를 중용하다
5장 국가 경영의 원칙
27 무엇보다 우선하여 민생을 돌보다┃28 오로지 백성을 위해 실용을 앞세우다┃29 억울한 백성이 없게 하다┃ 30 파격적인 제도로 사회적 약자를 돌보다┃31 사대를 하는 대신 철저하게 실리를 취하다┃32 재난에 대비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다┃33 신중하게 결정하되 원칙은 끝까지 지키다
6장 훈민정음 창제의 원칙
34 지극한 애민정신으로 새로운 문자 창제에 나서다┃35 그 어려운 창제 작업을 혼자서 감당하다┃36 반대론은 논박으로 응대하되 다만 무례를 처벌하다┃37 초수리에서 정인지와 합류하도록 안배하다
7장 인간으로서의 원칙
38 골육상쟁을 끝내고 화목한 가족을 이루다┃39 극진한 효도로 부모를 섬기다┃40 격구와 강무로 신체 건강을 돌보다┃41 정치에 희생된 가족의 비극을 부부 사랑으로 이겨내다
본문발췌
세종 개인이 이루었다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을 만큼 엄청난 업적의 배경에는 세종만의 분명한 원칙이 있다. 국가 대사를 결정할 때는 충분한 토론을 통해 조정의 중론을 모으는 ‘숙의민주주의’를 원칙으로 삼았으며, 인재를 등용할 때는 출신 성분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에 따라 선발하는 ‘능력우선주의’를 인사 원칙으로 삼았다. 국가의 영토가 걸린 문제에서는 촌척도 양보하지 않았으며, 외교에서는 강대국에게 예를 갖춰 머리를 숙이되 철저하게 그에 상응하는 실리를 챙겼다. / 6쪽
세종은 조신들의 답변이 과장되거나 아부하는 면이 지나치면 반드시 지적하고 넘어갔다. 지방관들의 보고서 내용이 일의 본질과 무관하게 임금의 덕을 칭송하는 미사여구로 가득할 경우에도 주의를 주었다. 1437년 5월, 경기도 관찰사가 도내에서 보리가 한 줄기에 이삭이 네 개나 열린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관찰사는 사실 보고에 덧붙여 “신령스러운 일이 발생한 것은 바로 육부와 삼사가 잘 다스려졌기 때문이니 상서로운 일을 경축하는 행사를 열자”고 제안했다. 세종은 기쁜 일이니 보리 종자를 개량하여 널리 보급하되 과장된 아부는 삼가라며 경고했다. / 46쪽
임금은 학문적 깊이에 더해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키우려면 문학 공부에 소홀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4차 산업혁명시대의 시대정신은 융·복합이다. 사물인터넷(IoT), 인공지능, 빅데이터, 양자컴퓨터 등 4차 산업혁명시대를 대표하는 기술들이 산업간 경계를 무너뜨리고, 가상과 현실을 하나로 통합하고 있다. 지금으로 치면 세종은 대표적인 융·복합형 지식인이자 리더다. 600년 전의 인물을 현재로 소환하여 살피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 52쪽
세종은 주자에 관한 일이라도 조신들에게 당당하게 소신을 밝혔다. 조신들도 임금의 혁명적인 발언에 더 이상 놀라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이렇게 되고 보니 놀라운 것은 임금이 아니라 조신들이다. 승지 권채는 “주자의 제자 요씨도 가끔 주자의 이론을 반박하기도 했다”며 임금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세종 19년이면 임금의 국정 철학이 농익을 때였고, 조신들도 임금의 별난 언행에 익숙해질 무렵이어서 이런 반응이 놀랍지만은 않다. 이처럼 세종은 기존의 질서와 학문체계를 끊임없이 의심했고, 이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의심이 가거나 궁금한 것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 55쪽
쓴 소리라고 하면 고약해 못지않은 신하가 또 있는데, ‘소수의견의 대명사’라고 할 허조(許稠)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다 찬성하는 안건을 두고도 “혹시 이런 문제점이 있을지 모른다”며 반대하고 나서기 일쑤였다. 실록에는 “허조가 홀로 반대했다”는 대목이 자주 눈에 띈다. 다른 임금 같았으면 좌천시켜 한직이나 변방으로 돌렸거나 아예 파직시켜 내쳤을 테지만 세종은 오히려 그를 중용하여 중요한 일을 맡겼다. 나중에는 정승으로 올려 그를 최고로 예우했다. / 83쪽
세종은 최윤덕에게 4군 개척의 임무를 준 후 축성을 독려했다. 임금의 명을 받은 최윤덕은 농사일로 한창 바쁜 봄철에 백성들을 동원하여 무리하게 축성 작업을 실시했다. 백성들의 민원이 그치지 않자 이조판서 권진이 세종에게 봄철의 역사를 중단해야 한다고 건의한다. 권진은 농사가 끝나는 가을에 축성을 해도 늦지 않으므로 굳이 봄철에 서둘러서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에 세종은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했다며 곧바로 잘못을 인정한다. 그리고 승정원에 명해 최윤덕으로 하여금 봄철에는 성을 쌓지 못하게 하라는 조치를 내린다. 실록에는 세종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부분의 표기를 ‘류(謬)’로 적고 있다. 세종이 자신의 잘못을 변명 차원에서 어물쩍 넘긴 것이 아니라 오류임을 깨끗이 인정했다는 의미다. / 93쪽
세종은 임금이 시시콜콜 국정 현안에 손수 개입해야 한다는 김정의 주장보다 인재를 뽑았으면 믿고 맡겨야 한다는 허조의 주장이 옳다고 봤다. 허조의 주장에는 바람직한 군왕의 인재관과 리더십 유형이 잘 제시되어 있다. 실제로 세종은 인재를 그렇게 뽑아 썼으며, 그런 원칙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세종 치세를 대표하는 명신(名臣)으로 평가되는 황희, 장영실, 김종서, 박연 등은 세종의 이런 인사 원칙과 리더십이 배출한 인재다. “의심이 나면 쓰지 않고, 썼으면 의심하지 않는다”는 세종의 리더십은 오늘날 글로벌 기업의 CEO들에게도 널리 영향을 미쳤다. / 130쪽
황희도 서얼 출신이라 출신 배경에 대한 편견이 없었으며, 맹사성은 양반 출신이었지만 사고가 유연해 여느 신하들과 달랐다. 두 사람이 세종 치세에서 중용된 것은 인재관이 임금의 코드와 잘 맞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인으로 세종 때 벼슬이 2품까지 오른 윤득홍, 송희미 같은 장군도 천인 출신이다. 사헌부에서 특히 윤득홍의 출신을 문제 삼았지만 이때도 임금은 흔들리지 않고 그를 신뢰했다. 윤득홍이 일흔이 넘어 사직을 청했을 때도 허락하지 않았다. 군사전문가로서 그의 능력을 아꼈기 때문이었다. / 141쪽
세종의 귀는 늘 백성을 향해 열려 있었다. 그 귀로 그는 백성의 고충을 들었고 의심스러운 것이 있으면 물었다. 해답을 찾지 못할 때는 책 속으로 들어가 선인들의 지혜를 빌렸다. 재위 31년 6개월간 세종은 단 하루도 이 원칙을 저버리지 않았다. 세종의 듣는 법, 질문하는 법, 공부하는 법은 오직 백성을 위한 것이었으며, 이 원칙들이 그를 최고의 성군으로 만들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로 하여금 그를 주목하게 만들었다. / 169쪽
세종은 백성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다소 문제가 있다 해도 반드시 추진하는 실용적 관점을 취했다. 바쁜 가운데서도 단출한 변복 차림으로 최소한의 수행원만 데리고 자주 민생 탐방에 나서곤 했던 임금은 아무리 땀 흘려 일해도 가난을 벗지 못하는 고단한 백성의 삶을 몸소 살폈다. 그런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이것이 오직 백성을 위해 쓸모 있는 것이냐?”는 실용주의적 질문을 국정철학의 제1원칙으로 삼았다. / 173쪽
살인죄는 최종으로 임금의 재가를 거쳐야 관련자 처벌이 결정되었는데, 조서를 본 세종은 그 허술함에 조작을 의심했다. 임금이 의금부에 재조사를 명하여 마침내 진상이 밝혀졌다. 당시 좌의정 황희, 우의정 맹사성, 형조판서 서선은 이 일로 파면되었으며, 형조참판 신개와 대사헌 조계생을 비롯한 고위직 십여 명이 유배에 처해졌다. 세종은 법을 어긴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중하게 처벌했다. 자신의 오른팔이고 왼팔인 황희와 맹사성도 원칙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 179쪽
중요한 사실은 임금의 대책이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화재를 계기로 도성과 궁궐의 화재 예방 매뉴얼을 만들도록 했고, 화재 발생 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도로를 넓히고 소방 방재시스템을 갖추도록 했다. 한양의 행랑에 방화벽을 쌓고 일정한 간격으로 우물을 파도록 했고, 종묘와 궁궐, 종루에 불을 끄는 기계를 설치하도록 했다. 특히 궁궐은 화재가 나면 무방비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는 구조여서 이에 대한 구체적인 조치를 지시했다. / 193쪽
세종은 자신에게 세자 자리를 양보한 효령대군에게 군왕이 아니라 동생으로서 예를 갖춰 성심을 다해 모셨다. 술자리에서도 효령이 술을 따를 때 앉아서 받지 않고 반드시 서서 술을 받았다. 중국 사신이 예법에 어긋난다고 지적할 정도로 임금은 효령을 형으로 깍듯이 예우했다. 중국 사신의 지적에 대해 황희는 임금이 국가의 질서보다 천륜을 더 중시한다고 답했는데, 황희의 이 답변에 형제를 대하는 임금의 진심이 잘 녹아 있다. / 238쪽
세종은 조신들의 답변이 과장되거나 아부하는 면이 지나치면 반드시 지적하고 넘어갔다. 지방관들의 보고서 내용이 일의 본질과 무관하게 임금의 덕을 칭송하는 미사여구로 가득할 경우에도 주의를 주었다. 1437년 5월, 경기도 관찰사가 도내에서 보리가 한 줄기에 이삭이 네 개나 열린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관찰사는 사실 보고에 덧붙여 “신령스러운 일이 발생한 것은 바로 육부와 삼사가 잘 다스려졌기 때문이니 상서로운 일을 경축하는 행사를 열자”고 제안했다. 세종은 기쁜 일이니 보리 종자를 개량하여 널리 보급하되 과장된 아부는 삼가라며 경고했다. / 46쪽
임금은 학문적 깊이에 더해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키우려면 문학 공부에 소홀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4차 산업혁명시대의 시대정신은 융·복합이다. 사물인터넷(IoT), 인공지능, 빅데이터, 양자컴퓨터 등 4차 산업혁명시대를 대표하는 기술들이 산업간 경계를 무너뜨리고, 가상과 현실을 하나로 통합하고 있다. 지금으로 치면 세종은 대표적인 융·복합형 지식인이자 리더다. 600년 전의 인물을 현재로 소환하여 살피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 52쪽
세종은 주자에 관한 일이라도 조신들에게 당당하게 소신을 밝혔다. 조신들도 임금의 혁명적인 발언에 더 이상 놀라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이렇게 되고 보니 놀라운 것은 임금이 아니라 조신들이다. 승지 권채는 “주자의 제자 요씨도 가끔 주자의 이론을 반박하기도 했다”며 임금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세종 19년이면 임금의 국정 철학이 농익을 때였고, 조신들도 임금의 별난 언행에 익숙해질 무렵이어서 이런 반응이 놀랍지만은 않다. 이처럼 세종은 기존의 질서와 학문체계를 끊임없이 의심했고, 이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의심이 가거나 궁금한 것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 55쪽
쓴 소리라고 하면 고약해 못지않은 신하가 또 있는데, ‘소수의견의 대명사’라고 할 허조(許稠)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다 찬성하는 안건을 두고도 “혹시 이런 문제점이 있을지 모른다”며 반대하고 나서기 일쑤였다. 실록에는 “허조가 홀로 반대했다”는 대목이 자주 눈에 띈다. 다른 임금 같았으면 좌천시켜 한직이나 변방으로 돌렸거나 아예 파직시켜 내쳤을 테지만 세종은 오히려 그를 중용하여 중요한 일을 맡겼다. 나중에는 정승으로 올려 그를 최고로 예우했다. / 83쪽
세종은 최윤덕에게 4군 개척의 임무를 준 후 축성을 독려했다. 임금의 명을 받은 최윤덕은 농사일로 한창 바쁜 봄철에 백성들을 동원하여 무리하게 축성 작업을 실시했다. 백성들의 민원이 그치지 않자 이조판서 권진이 세종에게 봄철의 역사를 중단해야 한다고 건의한다. 권진은 농사가 끝나는 가을에 축성을 해도 늦지 않으므로 굳이 봄철에 서둘러서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에 세종은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했다며 곧바로 잘못을 인정한다. 그리고 승정원에 명해 최윤덕으로 하여금 봄철에는 성을 쌓지 못하게 하라는 조치를 내린다. 실록에는 세종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부분의 표기를 ‘류(謬)’로 적고 있다. 세종이 자신의 잘못을 변명 차원에서 어물쩍 넘긴 것이 아니라 오류임을 깨끗이 인정했다는 의미다. / 93쪽
세종은 임금이 시시콜콜 국정 현안에 손수 개입해야 한다는 김정의 주장보다 인재를 뽑았으면 믿고 맡겨야 한다는 허조의 주장이 옳다고 봤다. 허조의 주장에는 바람직한 군왕의 인재관과 리더십 유형이 잘 제시되어 있다. 실제로 세종은 인재를 그렇게 뽑아 썼으며, 그런 원칙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세종 치세를 대표하는 명신(名臣)으로 평가되는 황희, 장영실, 김종서, 박연 등은 세종의 이런 인사 원칙과 리더십이 배출한 인재다. “의심이 나면 쓰지 않고, 썼으면 의심하지 않는다”는 세종의 리더십은 오늘날 글로벌 기업의 CEO들에게도 널리 영향을 미쳤다. / 130쪽
황희도 서얼 출신이라 출신 배경에 대한 편견이 없었으며, 맹사성은 양반 출신이었지만 사고가 유연해 여느 신하들과 달랐다. 두 사람이 세종 치세에서 중용된 것은 인재관이 임금의 코드와 잘 맞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인으로 세종 때 벼슬이 2품까지 오른 윤득홍, 송희미 같은 장군도 천인 출신이다. 사헌부에서 특히 윤득홍의 출신을 문제 삼았지만 이때도 임금은 흔들리지 않고 그를 신뢰했다. 윤득홍이 일흔이 넘어 사직을 청했을 때도 허락하지 않았다. 군사전문가로서 그의 능력을 아꼈기 때문이었다. / 141쪽
세종의 귀는 늘 백성을 향해 열려 있었다. 그 귀로 그는 백성의 고충을 들었고 의심스러운 것이 있으면 물었다. 해답을 찾지 못할 때는 책 속으로 들어가 선인들의 지혜를 빌렸다. 재위 31년 6개월간 세종은 단 하루도 이 원칙을 저버리지 않았다. 세종의 듣는 법, 질문하는 법, 공부하는 법은 오직 백성을 위한 것이었으며, 이 원칙들이 그를 최고의 성군으로 만들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로 하여금 그를 주목하게 만들었다. / 169쪽
세종은 백성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다소 문제가 있다 해도 반드시 추진하는 실용적 관점을 취했다. 바쁜 가운데서도 단출한 변복 차림으로 최소한의 수행원만 데리고 자주 민생 탐방에 나서곤 했던 임금은 아무리 땀 흘려 일해도 가난을 벗지 못하는 고단한 백성의 삶을 몸소 살폈다. 그런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이것이 오직 백성을 위해 쓸모 있는 것이냐?”는 실용주의적 질문을 국정철학의 제1원칙으로 삼았다. / 173쪽
살인죄는 최종으로 임금의 재가를 거쳐야 관련자 처벌이 결정되었는데, 조서를 본 세종은 그 허술함에 조작을 의심했다. 임금이 의금부에 재조사를 명하여 마침내 진상이 밝혀졌다. 당시 좌의정 황희, 우의정 맹사성, 형조판서 서선은 이 일로 파면되었으며, 형조참판 신개와 대사헌 조계생을 비롯한 고위직 십여 명이 유배에 처해졌다. 세종은 법을 어긴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중하게 처벌했다. 자신의 오른팔이고 왼팔인 황희와 맹사성도 원칙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 179쪽
중요한 사실은 임금의 대책이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화재를 계기로 도성과 궁궐의 화재 예방 매뉴얼을 만들도록 했고, 화재 발생 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도로를 넓히고 소방 방재시스템을 갖추도록 했다. 한양의 행랑에 방화벽을 쌓고 일정한 간격으로 우물을 파도록 했고, 종묘와 궁궐, 종루에 불을 끄는 기계를 설치하도록 했다. 특히 궁궐은 화재가 나면 무방비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는 구조여서 이에 대한 구체적인 조치를 지시했다. / 193쪽
세종은 자신에게 세자 자리를 양보한 효령대군에게 군왕이 아니라 동생으로서 예를 갖춰 성심을 다해 모셨다. 술자리에서도 효령이 술을 따를 때 앉아서 받지 않고 반드시 서서 술을 받았다. 중국 사신이 예법에 어긋난다고 지적할 정도로 임금은 효령을 형으로 깍듯이 예우했다. 중국 사신의 지적에 대해 황희는 임금이 국가의 질서보다 천륜을 더 중시한다고 답했는데, 황희의 이 답변에 형제를 대하는 임금의 진심이 잘 녹아 있다. / 238쪽
저자소개
노자와 장자, 주역 그리고 고양이를 사랑하는 인문학자다. 서울대학교 사회교육학과와 동대학원 정치학과를나왔으며, 중앙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승강기대학교 총장, 한서대 대우교수, 중부대 초빙교수 등을 지냈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에 〈주역으로 읽는 4차 산업혁명시대의 리더십과 인간관계〉로 칼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서울시 교육청과 백상경제연구원(서울경제신문 산하)이 공동으로 주관하는 고인돌(고전 인문학이 돌아오다) 프로그램에 강사로 참여하고 있다. 저서로는《인문학을 부탁해》, 《그리스, 인문학의 옴파로스》, 《다시논어》, 《욕심이 차오를 때 노자를 만나다》, 《아주 기묘한 장자 이야기로 시작하는 자존감 공부》,《존재의 제자리 찾기》, 《관계의 비결》, 《퇴근길 인문학 수업》(공저), 《주역으로 조선왕조실록을 읽다》, 《나의 리틀 포레스트》, 《실리콘밸리로 간 노자》(2020 우수 출판 콘텐츠 당선작) 등이 있다.
서평
“이럴 때 세종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살다보면 길이 막혀 막다른 골목에 처하거나 길을 잃고 헤맬 때가 있다. 개개인의 소소한 일상에서야 잦은 일이지만 대개는 무심결에 지나쳐 잘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생의 중대한 갈림길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라면 문제의 차원이 다르다. 더구나 늘 문제를 안고 살아야 하는 조직의 리더이거나 회사의 경영자이거나 정치 지도자라면 매순간 답을 구해야 하고 선택해야 하고 결단해야 하는 일이 일상이다. 그런 가운데 길이 막혀 좌절하거나 길을 잃고 헤맬 때는 누구에게 답을 구하고 길을 물어야 할까?
우리보다 앞서 살다간 역사의 인물에게 의탁하는 것도 좋은 방편이겠다. 정치학자이자 인문학자인 저자는 누구보다도 ‘(리더로서) 전인적 존재에 가까운’ 세종에게 길을 묻고 싶다고 한다. “이럴 때 세종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은 무엇보다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한글 창제야 인류사적 업적이니 말할 것도 없고 눈부시게 발전시킨 과학기술, 4군6진 개척으로 상징되는 영토 확장, 민생 안정을 위한 조세 개혁, 음악의 정비 등 이루 다 헤아릴 수조차 없다. 저자는 이런 업적들을 넘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세종의 유산에 주목해왔다.
바로 세종의 원칙이다. 그중에서도 세종의 일관된 국가 경영 원칙이 이런 모든 업적의 바탕이 되었다. 세종은 인재를 등용할 때는 출신 성분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에 따라 선발하는 ‘능력우선주의’를 인사 원칙으로 삼았다. 그래서 세종의 시대에는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한껏 빛을 발함으로써 기라성을 이루었다. 그 덕분에 세종은 과감한 위임의 리더십을 펼칠 수 있었다.
황희, 맹사성, 김종서, 최윤덕, 조말생, 허조, 장영실, 박연 같은 명신들, 수많은 집현전 학사들이 세종 치세를 떠받친 인재들이다. 세종은 치열한 토론으로 국정의 큰 가닥을 잡고 나면 일체의 실무는 “그대들이 알아서 전장하라”라며 주무 팀장에게 내맡겼다. 그러고는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 작은 허물은 덮어주었다. 팀장들이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선까지 면책의 범위를 확대한 것이다. 그 결과 황희는 아흔이 다 되도록 국정에 헌신했고, 김종서는 예순이 넘도록 변방을 꿋꿋하게 지켰다. 요직을 두루 거치고 정승까지 지낸 허조가 죽으면서 남긴 말은 리더로서 세종의 그런 면모를 잘 보여준다.
“임금은 내가 간하면 들어주셨다. 나는 국가의 일을 내 책임으로 여기며 살았다. 나는 행복하게 눈을 감는다.” 세종 치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나 율곡 이이가 평가한 세종의 용인(用人)에 국정 철학과 원칙이 고스란히 집약되었다.
“세종대왕은 사람을 쓰되 자기 몸과 같이 하였다. 현인과 재능 있는 이를 쓰되 그 부류를 따지지 않았다. 임용하고 말을 채택함에 오롯이 하여 참소와 이간질이 들어갈 수 없었다. 또 지위가 그 재능에 합당하면 종신토록 바꾸지 않았다.” 세종이 남긴 불가사의한 업적의 비밀이 풀리는 순간이다.
살다보면 길이 막혀 막다른 골목에 처하거나 길을 잃고 헤맬 때가 있다. 개개인의 소소한 일상에서야 잦은 일이지만 대개는 무심결에 지나쳐 잘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생의 중대한 갈림길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라면 문제의 차원이 다르다. 더구나 늘 문제를 안고 살아야 하는 조직의 리더이거나 회사의 경영자이거나 정치 지도자라면 매순간 답을 구해야 하고 선택해야 하고 결단해야 하는 일이 일상이다. 그런 가운데 길이 막혀 좌절하거나 길을 잃고 헤맬 때는 누구에게 답을 구하고 길을 물어야 할까?
우리보다 앞서 살다간 역사의 인물에게 의탁하는 것도 좋은 방편이겠다. 정치학자이자 인문학자인 저자는 누구보다도 ‘(리더로서) 전인적 존재에 가까운’ 세종에게 길을 묻고 싶다고 한다. “이럴 때 세종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은 무엇보다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한글 창제야 인류사적 업적이니 말할 것도 없고 눈부시게 발전시킨 과학기술, 4군6진 개척으로 상징되는 영토 확장, 민생 안정을 위한 조세 개혁, 음악의 정비 등 이루 다 헤아릴 수조차 없다. 저자는 이런 업적들을 넘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세종의 유산에 주목해왔다.
바로 세종의 원칙이다. 그중에서도 세종의 일관된 국가 경영 원칙이 이런 모든 업적의 바탕이 되었다. 세종은 인재를 등용할 때는 출신 성분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에 따라 선발하는 ‘능력우선주의’를 인사 원칙으로 삼았다. 그래서 세종의 시대에는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한껏 빛을 발함으로써 기라성을 이루었다. 그 덕분에 세종은 과감한 위임의 리더십을 펼칠 수 있었다.
황희, 맹사성, 김종서, 최윤덕, 조말생, 허조, 장영실, 박연 같은 명신들, 수많은 집현전 학사들이 세종 치세를 떠받친 인재들이다. 세종은 치열한 토론으로 국정의 큰 가닥을 잡고 나면 일체의 실무는 “그대들이 알아서 전장하라”라며 주무 팀장에게 내맡겼다. 그러고는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 작은 허물은 덮어주었다. 팀장들이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선까지 면책의 범위를 확대한 것이다. 그 결과 황희는 아흔이 다 되도록 국정에 헌신했고, 김종서는 예순이 넘도록 변방을 꿋꿋하게 지켰다. 요직을 두루 거치고 정승까지 지낸 허조가 죽으면서 남긴 말은 리더로서 세종의 그런 면모를 잘 보여준다.
“임금은 내가 간하면 들어주셨다. 나는 국가의 일을 내 책임으로 여기며 살았다. 나는 행복하게 눈을 감는다.” 세종 치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나 율곡 이이가 평가한 세종의 용인(用人)에 국정 철학과 원칙이 고스란히 집약되었다.
“세종대왕은 사람을 쓰되 자기 몸과 같이 하였다. 현인과 재능 있는 이를 쓰되 그 부류를 따지지 않았다. 임용하고 말을 채택함에 오롯이 하여 참소와 이간질이 들어갈 수 없었다. 또 지위가 그 재능에 합당하면 종신토록 바꾸지 않았다.” 세종이 남긴 불가사의한 업적의 비밀이 풀리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