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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성차화된 개인과 여성적 글쓰기
총서명
한국 여성문학 선집 7
저자
출판사
출판일
20240705
가격
₩ 24,000
ISBN
9788937456879
페이지
711 p.
판형
145 X 215 mm
커버
Book
책 소개
[한국 여성문학 선집](전 7권)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을 엮은 ‘여성문학사연구모임’은 여성주의와 여성문학을 연구해 온 학자들이 한국 근현대 여성문학사 서술을 목표로 2012년 결성한 모임으로,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그 첫 번째 프로젝트이자 성과물이다. 이 프로젝트는 “왜 우리에게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 같은 전복적인 여성문학사, [노튼 여성문학 앤솔러지] 같은 여성문학 선집이 없는가?”라는 한 가지 명확한 의문과 강렬한 열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여성문학사 서술은 여성주의 운동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진 문학사 탈구축 작업의 일환이기도 하다. 문학사 탈구축 작업은 세계대전 이후 파시즘적 잔재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문학사에 깃든 국민·국가, 남성·엘리트, 문학중심주의 등을 걷어내고 여성과 소수자 문학을 문학사에 반영하자는 움직임이었다. 민주화가 이루어진 1990년대 이후 한국에도 문학사 탈구축 작업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지만 여성문학사 서술은 시도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유는 명확하다. 남성 중심의 문학사 서술이 굳건하게 형성되어 오는 동안, 여성문학사는 서술을 시작할 텍스트 선별조차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그동안 문학사에 없던 여성의 기준과 관점으로 근현대 한국 여성문학의 계보를 집대성하고, 제도 문학 중심의 구분에서 벗어나 장르 제한 없이 여성 지식 생산과 글쓰기 실천을 아카이빙한 최초의 작업이다.
목차
책머리에 4
시대 개관
성적 주체로서 개인의 발견과 여성적 글쓰기의 실험 16
천양희 38
바람 부는 날 40
최승자 42
하안발 5 44
김언희 45
얼음여자 47
김정란 49
내가 아무렇게나 죽인 여자 51
이연주 53
매음녀 1 55
최윤 57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59
하나코는 없다 145
김혜순 178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180
여자들 183
엄인희 186
그 여자의 소설 188
생과부 위자료 청구 소송 240
최정례 255
햇빛 속에 호랑이 257
노혜경 259
레이스마을 이야기 — 할머니의 앞치마 261
이남희 263
플라스틱 섹스 265
은희경 308
새의 선물 310
그녀의 세 번째 남자 334
박서원 402
엄마, 애비없는 아이를 낳고 싶어 404
마리아가 목수의 아들 예수에게 주는 메시지 407
최영미 410
서른, 잔치는 끝났다 412
전경린 414
염소를 모는 여자 416
공선옥 480
목마른 계절 482
공지영 515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517
무엇을 할 것인가 527
김인숙 552
칼날과 사랑 554
신경숙 556
배드민턴 치는 여자 558
외딴방 587
허수경 597
혼자 가는 먼 집 599
불우한 악기 600
배수아 602
여점원 아니디아의 짧고 고독한 생애 604
이수명 649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 651
나희덕 653
어린것 655
하성란 657
치약 659
한강 683
내 여자의 열매 685
송경아 686
바리—길 위에서 688
엮은이 소개 708
집필에 참여한 연구자들 710
시대 개관
성적 주체로서 개인의 발견과 여성적 글쓰기의 실험 16
천양희 38
바람 부는 날 40
최승자 42
하안발 5 44
김언희 45
얼음여자 47
김정란 49
내가 아무렇게나 죽인 여자 51
이연주 53
매음녀 1 55
최윤 57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59
하나코는 없다 145
김혜순 178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180
여자들 183
엄인희 186
그 여자의 소설 188
생과부 위자료 청구 소송 240
최정례 255
햇빛 속에 호랑이 257
노혜경 259
레이스마을 이야기 — 할머니의 앞치마 261
이남희 263
플라스틱 섹스 265
은희경 308
새의 선물 310
그녀의 세 번째 남자 334
박서원 402
엄마, 애비없는 아이를 낳고 싶어 404
마리아가 목수의 아들 예수에게 주는 메시지 407
최영미 410
서른, 잔치는 끝났다 412
전경린 414
염소를 모는 여자 416
공선옥 480
목마른 계절 482
공지영 515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517
무엇을 할 것인가 527
김인숙 552
칼날과 사랑 554
신경숙 556
배드민턴 치는 여자 558
외딴방 587
허수경 597
혼자 가는 먼 집 599
불우한 악기 600
배수아 602
여점원 아니디아의 짧고 고독한 생애 604
이수명 649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 651
나희덕 653
어린것 655
하성란 657
치약 659
한강 683
내 여자의 열매 685
송경아 686
바리—길 위에서 688
엮은이 소개 708
집필에 참여한 연구자들 710
본문발췌
P.17
시대 개관
민중 해방을 위해 투쟁했던 1980년대 변혁 운동의 열기 속에서도 여성들은 외딴 방에 고립되어 사라졌거나, 여성이 남성과 함께 변혁의 주체로 광장에 참여했으면서도 여성운동은 전체 변혁 운동의 한 ‘부분‘으로 축소되어 독자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1990년대여성문학은 여성을 고립과 침묵에 이르게 한 것이 무엇인지 드러내고 여성의 말해지지 않은 욕망과 가치를 복원함으로써 광장과 방의부당한 분리에 맞서는 것을 주요 과제로 삼았다. 이 작업은 한편에서는 1980년대 운동권 문학을 여성주의적 개입과 성찰을 통해 바라보며 성 평등이 병행되지 않은 민주화는 여성을 주변화시키는 가부장적 기획의 연장이라는 점을 밝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금기와 제도적 억압에 가로막힌 여성들의 욕망과 열정을 드러내어여성의 자유를 실험하는 것이었다. 특히 성차화된 개인으로서 여성의 자유에 대한 실험은 협소한 계급적 · 민족적 이데올로기 층위에머물러 있던 정치성의 범위를 심리적·육체적 층위로까지 확대하도록 요구했고, 재현의 틀을 넘어 무의식적 충동과 신체적 정동을 드러내는 ‘체현된(embodied) 글쓰기‘의 가능성을 탐색하도록 했다.
P.20
1990년대 여성문학이 수행한 이 전투는 크게 여섯 개의 전략으로 전개되었다. 1) 1980년대 민중운동에 대한 젠더화된 기억과 애도의 글쓰기, 2) 가부장적 가족제도에 대한 도전, 3) 모성적 경험에 대한 여성주의적 재해석, 4) 사랑의 탈낭만화와 여성적 욕망의추구, 5) 아버지 질서의 위반과 자기 파괴적 욕망의 추구, 6) 탈젠더화된 포스트개인의 흔적과 마이너리티 상상력의 선취. 아래에서는이 여섯 개 전략들의 중층적 결합으로 1990년대 여성문학의 지형도를 그려 보고자 한다.
P.139
최윤_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죽음은 죽은 자에게는 사건이 아니다. 그 죽음은 남아 있는 사람에게만 혹독하게 생생한 사건이 된다. 죽음은 대답이 없기 때문에, 모든 죽음은 완성되어야 할 것의 미완성이기 때문에.
P.164
최윤_하나코는 없다
그 자신을 포함해 무리들 중의 누구도 하나코에게 자신들의 결혼 날짜를 알리지 않았다. 딴 친구들은 어떤 이유에서 그랬는지 알수 없지만 그로서는 그저 단순한 부주의였다. 물론 그는 청첩장을준비하던 때만 해도 그녀에게 보낼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분주한 일정에 밀려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무의식적으로 계획된 건망증. 늦게 결혼을 한 친구들이야 이미 하나코와의 연락이 끊어져서 그랬다고 하지만 적어도 P와 J는, 그들이 하나코와 만나고 있을 즈음에 결혼했음에도 하나코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게 분명했다. J의 결혼식 후에 그가 하나코를 만나 J 대신 사과를 했을 때, 그녀는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설마 결혼식 같은 것을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P.318
은희경_새의 선물
진짜 나가 아닌 다른 나를 만들어 보인다는 점에서 그것이 위선이나 가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다. 꾸며 보이고 거짓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나를 두 개로 분리시키는 일은 나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작위‘라는 말을 알게된 뒤부터 그런 의혹은 사라졌다. 나의 분리법은 위선이 아니라 작위였으며 작위는 위선보다 훨씬 복잡한 감정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부도덕한 일은 아니었다. 수였다. 나를 뚫어져라 쳐다그러므로 이제 내가 아는 어른들의 비밀을 털어놓는 데에 나는
P.319
아무런 거리낌도, 빚진 마음도 갖고 있지 않다.
P.320
막상 편지를 쓰려고 하니 생각처럼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모는 포켓판 영어 회화 책과 사전, 고등학교 때의 영어 참고서까지쌓아 놓고 밤늦도록 끙끙대는가 싶더니 간신히 두 장의 편지지를채웠는데 노력은 쓰고 열매는 달다고, 자기가 쓴 그 편지를 눈앞에溫馨높이 쳐들고 읽어 내리는 이모의 목소리는 사뭇 떨렸다.
그날 당장 이모는 자신의 영어 과외 교실로 그 편지를 들고 갔다. 학생들에게 ‘독일어는 울며 들어갔다가 웃고 나오고 영어는 웃으며 들어갔다가 울고 나온다‘는, 어디선가 주워들은 말을 외국어학습에 관한 최고의 금언이라도 되는 것처럼 인용하면서 이모는 이번 경험을 통해 영어가 어렵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음을 강조하는한편 그럼에도 편지를 훌륭하게 완성한 자기의 영어 실력에 대한감탄을 굳이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그 편지를 학생들 앞에서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읽어 주었음은 물론이요, 영어 발음이 좀 되는 학생들의 리딩 연습에 교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P.338
은희경_그녀의 세 번째 남자
˝사랑하는 사람과는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구?˝
˝그래. 만약 결혼해서 그 사람이 불행해지면 그걸 어떻게 견딜 수 있겠니?˝
그녀의 오른쪽 엄지와 중지가 왼손가락의 반지를 잡고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결혼한 사람은 모두 불행을 견디고 있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견디기에 가장 어려운 것은 불행이 아니라 권태야. 하지만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기 때문에 현상을 바꿀 의지 없이 그럭저럭 견딜 수 있게 되는 것이 권태의 장점이지. 거치 대그녀는 그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반지에서 손을 떼고 찻잔을 들어 식은 커피를 마셨다.
P.412
최영미_서른, 잔치는 끝났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지만
P.413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창작과비평사, 1994)
P.432
전경린_염소를 모는 여자
재경이는 문주의 차에 실려 함께 왔고 미화는 따로 왔다. 재경이는 연애 대장 남편 때문에, 문주는 아직도 혼수 불만을 일삼는 시어머니와 사고뭉치 시동생과 낳아야 할 아들 때문에, 미화는 결벽증 환자인 남편 때문에, 웃음 끝에는 대사가 없을 때 게이지가 올라가는 배경음악처럼 궂은 표정이 완강하게 드러났다가 황급히 감추어지곤 했다. 불행의 얼굴은 가지각색이고 우리가 이루려는 행복은너무 똑같은 얼굴이어서 친구들이 모이면 삶은 더 뻔뻔스러워지는것 같다. 우리는 자주 시계를 보며 조금씩 긴장한 얼굴로 현수를 생각했다.
˝혼수. 남녀 차별. ‘시‘ 자 붙은 사람들.“
모두들 문주 얼굴을 쳐다보았다.
˝없어져야 할 것들, 잊었니?˝
˝심하다!˝
모두들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P.449
˝웬 염소야?˝
아래층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치뜨고 물었다. 나는 그냥 해죽 웃었다. 돗자리 위엔 사각형으로 접힌 작은 담요가 놓여 있고 그 곁엔 화투가 비스듬히 쓰러져 있다. 옆구리에 아이들 끼고 하루해 보내기에는 딱 좋다고, 아줌마들은 설거지하고 나면 모여서 화투를 두드렸다. 어서 하루가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가고, 아이들은 자라고 병든 어머니들은 돌아가시고, 시누이들은 시집을 가고 남편은 승진하라고, 어서어서 날들이 지나 월부금들이 끝나고 대출 적금이 만기되어 큰 아파트로 이사 가자고, 바람 든 남편이 늙어 버리고 이유없이 발바닥이 갈라지는 이 건조하고 무료한 시간이 흘러가 버리라고 푼돈들을 가지고 나와 짤랑짤랑 하루를 녹인다. 어제 한 말을 오늘 또 하고, 한 달 전에 한 말을 또 하고, 일년 전에 한 말을 또 하면서・・・・・・ 그들은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무시무시하게 긴 장기 공연의 엑스트라 무리 같다. 남의 연기를 보면서 늙어 가고, 한구석에서 어두운 게임을 하면서 늙어 가는 보류 처분된 삶. 나는 게임이 싫다. 게임의 유일한 진실은 시간을 삼킨다는 것이다.
시대 개관
민중 해방을 위해 투쟁했던 1980년대 변혁 운동의 열기 속에서도 여성들은 외딴 방에 고립되어 사라졌거나, 여성이 남성과 함께 변혁의 주체로 광장에 참여했으면서도 여성운동은 전체 변혁 운동의 한 ‘부분‘으로 축소되어 독자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1990년대여성문학은 여성을 고립과 침묵에 이르게 한 것이 무엇인지 드러내고 여성의 말해지지 않은 욕망과 가치를 복원함으로써 광장과 방의부당한 분리에 맞서는 것을 주요 과제로 삼았다. 이 작업은 한편에서는 1980년대 운동권 문학을 여성주의적 개입과 성찰을 통해 바라보며 성 평등이 병행되지 않은 민주화는 여성을 주변화시키는 가부장적 기획의 연장이라는 점을 밝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금기와 제도적 억압에 가로막힌 여성들의 욕망과 열정을 드러내어여성의 자유를 실험하는 것이었다. 특히 성차화된 개인으로서 여성의 자유에 대한 실험은 협소한 계급적 · 민족적 이데올로기 층위에머물러 있던 정치성의 범위를 심리적·육체적 층위로까지 확대하도록 요구했고, 재현의 틀을 넘어 무의식적 충동과 신체적 정동을 드러내는 ‘체현된(embodied) 글쓰기‘의 가능성을 탐색하도록 했다.
P.20
1990년대 여성문학이 수행한 이 전투는 크게 여섯 개의 전략으로 전개되었다. 1) 1980년대 민중운동에 대한 젠더화된 기억과 애도의 글쓰기, 2) 가부장적 가족제도에 대한 도전, 3) 모성적 경험에 대한 여성주의적 재해석, 4) 사랑의 탈낭만화와 여성적 욕망의추구, 5) 아버지 질서의 위반과 자기 파괴적 욕망의 추구, 6) 탈젠더화된 포스트개인의 흔적과 마이너리티 상상력의 선취. 아래에서는이 여섯 개 전략들의 중층적 결합으로 1990년대 여성문학의 지형도를 그려 보고자 한다.
P.139
최윤_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죽음은 죽은 자에게는 사건이 아니다. 그 죽음은 남아 있는 사람에게만 혹독하게 생생한 사건이 된다. 죽음은 대답이 없기 때문에, 모든 죽음은 완성되어야 할 것의 미완성이기 때문에.
P.164
최윤_하나코는 없다
그 자신을 포함해 무리들 중의 누구도 하나코에게 자신들의 결혼 날짜를 알리지 않았다. 딴 친구들은 어떤 이유에서 그랬는지 알수 없지만 그로서는 그저 단순한 부주의였다. 물론 그는 청첩장을준비하던 때만 해도 그녀에게 보낼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분주한 일정에 밀려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무의식적으로 계획된 건망증. 늦게 결혼을 한 친구들이야 이미 하나코와의 연락이 끊어져서 그랬다고 하지만 적어도 P와 J는, 그들이 하나코와 만나고 있을 즈음에 결혼했음에도 하나코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게 분명했다. J의 결혼식 후에 그가 하나코를 만나 J 대신 사과를 했을 때, 그녀는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설마 결혼식 같은 것을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P.318
은희경_새의 선물
진짜 나가 아닌 다른 나를 만들어 보인다는 점에서 그것이 위선이나 가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다. 꾸며 보이고 거짓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나를 두 개로 분리시키는 일은 나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작위‘라는 말을 알게된 뒤부터 그런 의혹은 사라졌다. 나의 분리법은 위선이 아니라 작위였으며 작위는 위선보다 훨씬 복잡한 감정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부도덕한 일은 아니었다. 수였다. 나를 뚫어져라 쳐다그러므로 이제 내가 아는 어른들의 비밀을 털어놓는 데에 나는
P.319
아무런 거리낌도, 빚진 마음도 갖고 있지 않다.
P.320
막상 편지를 쓰려고 하니 생각처럼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모는 포켓판 영어 회화 책과 사전, 고등학교 때의 영어 참고서까지쌓아 놓고 밤늦도록 끙끙대는가 싶더니 간신히 두 장의 편지지를채웠는데 노력은 쓰고 열매는 달다고, 자기가 쓴 그 편지를 눈앞에溫馨높이 쳐들고 읽어 내리는 이모의 목소리는 사뭇 떨렸다.
그날 당장 이모는 자신의 영어 과외 교실로 그 편지를 들고 갔다. 학생들에게 ‘독일어는 울며 들어갔다가 웃고 나오고 영어는 웃으며 들어갔다가 울고 나온다‘는, 어디선가 주워들은 말을 외국어학습에 관한 최고의 금언이라도 되는 것처럼 인용하면서 이모는 이번 경험을 통해 영어가 어렵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음을 강조하는한편 그럼에도 편지를 훌륭하게 완성한 자기의 영어 실력에 대한감탄을 굳이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그 편지를 학생들 앞에서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읽어 주었음은 물론이요, 영어 발음이 좀 되는 학생들의 리딩 연습에 교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P.338
은희경_그녀의 세 번째 남자
˝사랑하는 사람과는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구?˝
˝그래. 만약 결혼해서 그 사람이 불행해지면 그걸 어떻게 견딜 수 있겠니?˝
그녀의 오른쪽 엄지와 중지가 왼손가락의 반지를 잡고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결혼한 사람은 모두 불행을 견디고 있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견디기에 가장 어려운 것은 불행이 아니라 권태야. 하지만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기 때문에 현상을 바꿀 의지 없이 그럭저럭 견딜 수 있게 되는 것이 권태의 장점이지. 거치 대그녀는 그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반지에서 손을 떼고 찻잔을 들어 식은 커피를 마셨다.
P.412
최영미_서른, 잔치는 끝났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지만
P.413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창작과비평사, 1994)
P.432
전경린_염소를 모는 여자
재경이는 문주의 차에 실려 함께 왔고 미화는 따로 왔다. 재경이는 연애 대장 남편 때문에, 문주는 아직도 혼수 불만을 일삼는 시어머니와 사고뭉치 시동생과 낳아야 할 아들 때문에, 미화는 결벽증 환자인 남편 때문에, 웃음 끝에는 대사가 없을 때 게이지가 올라가는 배경음악처럼 궂은 표정이 완강하게 드러났다가 황급히 감추어지곤 했다. 불행의 얼굴은 가지각색이고 우리가 이루려는 행복은너무 똑같은 얼굴이어서 친구들이 모이면 삶은 더 뻔뻔스러워지는것 같다. 우리는 자주 시계를 보며 조금씩 긴장한 얼굴로 현수를 생각했다.
˝혼수. 남녀 차별. ‘시‘ 자 붙은 사람들.“
모두들 문주 얼굴을 쳐다보았다.
˝없어져야 할 것들, 잊었니?˝
˝심하다!˝
모두들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P.449
˝웬 염소야?˝
아래층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치뜨고 물었다. 나는 그냥 해죽 웃었다. 돗자리 위엔 사각형으로 접힌 작은 담요가 놓여 있고 그 곁엔 화투가 비스듬히 쓰러져 있다. 옆구리에 아이들 끼고 하루해 보내기에는 딱 좋다고, 아줌마들은 설거지하고 나면 모여서 화투를 두드렸다. 어서 하루가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가고, 아이들은 자라고 병든 어머니들은 돌아가시고, 시누이들은 시집을 가고 남편은 승진하라고, 어서어서 날들이 지나 월부금들이 끝나고 대출 적금이 만기되어 큰 아파트로 이사 가자고, 바람 든 남편이 늙어 버리고 이유없이 발바닥이 갈라지는 이 건조하고 무료한 시간이 흘러가 버리라고 푼돈들을 가지고 나와 짤랑짤랑 하루를 녹인다. 어제 한 말을 오늘 또 하고, 한 달 전에 한 말을 또 하고, 일년 전에 한 말을 또 하면서・・・・・・ 그들은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무시무시하게 긴 장기 공연의 엑스트라 무리 같다. 남의 연기를 보면서 늙어 가고, 한구석에서 어두운 게임을 하면서 늙어 가는 보류 처분된 삶. 나는 게임이 싫다. 게임의 유일한 진실은 시간을 삼킨다는 것이다.
저자소개
여성문학사연구모임
남성 중심의 문학사 서술에 의문을 품고 한국 근현대 여성문학의 유산을 여성의 시각으로 정리하기 위해 2012년 결성된 모임이다. 국문학 연구자 김양선, 김은하, 이선옥, 영문학 연구자 이명호, 이희원으로 구성되었고, 시 연구자 이경수가 객원 에디터로 참여했다.
김양선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림대학교 일송자유교양대학 교수이며, 한국여성문학학회 회장과 [여성문학연구] 편집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한국 근·현대 여성문학 장의 형성], [1930년대 소설과 근대성의 지형학], [근대문학의 탈식민성과 젠더정치학], [경계에 선 여성문학] 등이 있다.
김은하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한국여성문학학회 회장이며, [여성문학연구] 편집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개발의 문화사와 남성 주체의 행로] 등이 있다.
이선옥
숙명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이며, [실천문학] 편집위원, 한국여성문학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태권V와 명랑소녀 국민 만들기], [한국 소설과 페미니즘] 등이 있다.
이명호
경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문화 전공 교수이며, 경희대학교 글로벌인문학술원 원장, 한국비평이론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누가 안티고네를 두려워하는가], [트라우마와 문학] 등이 있다.
이희원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아이오와대학교에서 석사, 텍사스 A&M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이며, 한국영미문학페미니즘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영미 드라마 속 보통 여자들] 등이 있다.
이경수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이며, 한국시학회, 한국여성문학학회 편집위원장을 역임했다. 대표 저서로 [한국 현대시와 반복의 미학], [불온한 상상의 축제], [춤추는 그림자], [이후의 시], [백석 시를 읽는 시간] 등이 있다.
남성 중심의 문학사 서술에 의문을 품고 한국 근현대 여성문학의 유산을 여성의 시각으로 정리하기 위해 2012년 결성된 모임이다. 국문학 연구자 김양선, 김은하, 이선옥, 영문학 연구자 이명호, 이희원으로 구성되었고, 시 연구자 이경수가 객원 에디터로 참여했다.
김양선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림대학교 일송자유교양대학 교수이며, 한국여성문학학회 회장과 [여성문학연구] 편집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한국 근·현대 여성문학 장의 형성], [1930년대 소설과 근대성의 지형학], [근대문학의 탈식민성과 젠더정치학], [경계에 선 여성문학] 등이 있다.
김은하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한국여성문학학회 회장이며, [여성문학연구] 편집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개발의 문화사와 남성 주체의 행로] 등이 있다.
이선옥
숙명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이며, [실천문학] 편집위원, 한국여성문학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태권V와 명랑소녀 국민 만들기], [한국 소설과 페미니즘] 등이 있다.
이명호
경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문화 전공 교수이며, 경희대학교 글로벌인문학술원 원장, 한국비평이론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누가 안티고네를 두려워하는가], [트라우마와 문학] 등이 있다.
이희원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아이오와대학교에서 석사, 텍사스 A&M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이며, 한국영미문학페미니즘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영미 드라마 속 보통 여자들] 등이 있다.
이경수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이며, 한국시학회, 한국여성문학학회 편집위원장을 역임했다. 대표 저서로 [한국 현대시와 반복의 미학], [불온한 상상의 축제], [춤추는 그림자], [이후의 시], [백석 시를 읽는 시간] 등이 있다.
서평
한국 근현대 여성문학의 계보를 이해하는 최초의 기준!
민음사 한국 여성문학 선집
[한국 여성문학 선집](전 7권)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을 엮은 ‘여성문학사연구모임’은 여성주의와 여성문학을 연구해 온 학자들이 한국 근현대 여성문학사 서술을 목표로 2012년 결성한 모임으로,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그 첫 번째 프로젝트이자 성과물이다.
이 프로젝트는 “왜 우리에게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 같은 전복적인 여성문학사, [노튼 여성문학 앤솔러지] 같은 여성문학 선집이 없는가?”라는 한 가지 명확한 의문과 강렬한 열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여성문학사 서술은 여성주의 운동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진 문학사 탈구축 작업의 일환이기도 하다. 문학사 탈구축 작업은 세계대전 이후 파시즘적 잔재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문학사에 깃든 국민·국가, 남성·엘리트, 문학중심주의 등을 걷어내고 여성과 소수자 문학을 문학사에 반영하자는 움직임이었다. 민주화가 이루어진 1990년대 이후 한국에도 문학사 탈구축 작업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지만 여성문학사 서술은 시도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유는 명확하다. 남성 중심의 문학사 서술이 굳건하게 형성되어 오는 동안, 여성문학사는 서술을 시작할 텍스트 선별조차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성문학은 그 전통을 이어 왔음에도 역사적 계보와 문화적 가치를 온전히 인정받지 못했다. 오랜 역사 동안 여성 작가의 ‘저자성’과 여성문학의 ‘문학성’은 의심받았으며, 주류 문학사에서 배제되거나 주변화되어 왔다. 오늘 등장한 [한국 여성문학 선집]이 한국 최초의 ‘여성문학사’이자 ‘새로운 문학사’ 서술의 출발점이 되는 이유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그동안 문학사에 없던 여성의 기준과 관점으로 근현대 한국 여성문학의 계보를 집대성하고, 제도 문학 중심의 구분에서 벗어나 장르 제한 없이 여성 지식 생산과 글쓰기 실천을 아카이빙한 최초의 작업이다.
‘최초’는 ‘다음’을 약속한다. 여성문학사연구모임은 [한국 여성문학 선집] 이후 본격문학과 국민문학을 넘어 대중문학과 퀴어문학, 디아스포라문학을 포괄하고 해외 학회와 협업한 다양한 선집을 후속 과제로 남겨 두었음을 밝히며, 시대마다 문학 공동체마다 다시, 그리고 새롭게 쓰일 새로운 문학사의 탄생을 예고한다.
최초의 ‘여성문학사’이자 ‘새로운 문학사’
문학사는 가장 실용적이고 정치적인 문학의 영역이다. 사회와 역사를 이해하고 개인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문학 교육의 주요한 방법론으로 ‘문학사 교육’이 위치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바로 그 이유로 과거 국가 권력은 문학사를 ‘민족’과 ‘시민’을 양성하는 첫 번째 도구로 삼았으며, 또한 같은 이유로 문학사는 민주화 이후 가장 먼저 심판대에 오르게 되었다. 1980년대 서구로부터 시작해 2000년대 한국 사회에도 민족과 이념 중심의 ‘남성 중심의 문학사’를 해체하고 새로 쓰는 ‘문학사 탈구축’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그 성과는 미약했다. 새로운 문학사 서술 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문학사는 문학 연구와 교육 모두에서 ‘죽은 지식’으로 외면당해 왔다. 그 역사 끝에 [한국 여성문학 선집]이 등장했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그동안 문학사를 떠받친 문학, 역사, 학문을 둘러싼 오랜 기준들을 오늘날의 관점으로 의심하고 새로이 들여다보며 완성한 ‘최초의 여성문학사’이자 ‘새로운 문학사’ 서술의 시작이다.
시대가 만들고, 시대를 만든 작품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최초’라는 단어가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실질적인 ‘원칙’으로 작용한 책이다. ‘여성문학의 진일보를 이룬 작품을 집대성한다.’는 목적과 학술적·역사적 근거와 의미를 가진 작품을 장르 구분 없이 발굴하고 소개한다는 대원칙 아래, 책에 대한 다른 원칙들이 세워졌다. 작품뿐 아니라 ‘학술’과 ‘역사’까지도 여성적 관점으로 다시 보고, 작품과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의 공기까지도 충실히 담을 것이라는 규칙들이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근대 개화기 조선부터 1990년대 민주화 이후 한국까지의 시대를 역사적 전환점으로 구분하고, 시대마다 독자적인 개성과 전환을 이룬 여성문학 작가와 작품을 선별해 담았다. 시, 소설, 산문, 희곡뿐 아니라 잡지 창간사, 선언문, 편지, 일기, 노동 수기 등 제도화된 문학 형식 밖에 있다는 이유로 문학사에서 다뤄지지 못했던 다양하고 자유로운 ‘여성 글쓰기’를 총망라했다.
한국 여성해방 100년의 기록
기존 문학사에서는 나혜석의 「경희」가 [여자계]에 발표된 1918년을 여성문학의 원류로 보았다면,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그보다 20년 앞선 1898년 「여학교설시통문」을 ‘여성 글쓰기’의 원류로 본다. 이 글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받고 일할 권리가 있고 이를 위한 학교를 설립하자고 주장하는 내용으로, 이름을 밝히지 않은 두 여성이 신문에 투고해 발표한 글이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이 글을 “근대 매체인 신문을 통해 공적 담론인 ‘선언문’의 형식으로 페미니스트 집합 의식을 발표한 최초의 글”(1권, 시대 개관)이라 평가하며 ‘여성 글쓰기’의 원류로 짚는다. 「여학교설시통문」을 발표한 이듬해 이 글의 저자들이 한국 최초의 여학교를 설립하고, 그로부터 20년 후 한국 여성문학의 원류인 나혜석, 김일엽, 김명순이 동시에 등장했다는 사실은 한국 여성문학이 만들어 온 여성해방의 방향성과 방식을 명확하게 보여 준다.
여성의 글쓰기와 삶은 앞선 여성의 글을 읽고 다음 여성의 삶을 상상하는 가운데서 적극적으로 공명하고 움직이며 이루어졌다. 시대마다 형태를 달리하며 여성에게 가해진 억압과 그에 따라 순응하고 저항하며 만들어간 여성의 삶, 그리고 그 속에서 시대를 뛰어넘어 고민하고 열망한 ‘자유’, 여성해방의 과정을 [한국 여성문학 선집]을 통해 고스란히 만날 수 있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문학사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문학사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 없이도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백과사전식 구성과 글로 만들어졌다. ‘시대 개관’은 각 권을 여는 글로, 다루는 작품과 시대 전반을 설명하며 사회·정치·문화적 맥락에서 작품과 작가를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끄는 글이다. ‘작가 소개’ 글은 작가의 생애와 작품, 문학사적 성취와 의미를 보여 주는 글로, 해당 작가를 연구해 온 연구자를 통해 방대한 자료와 엄정한 사실 검증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모든 작품은 초간본 원문을 우선해 수록했다. 이 선집이 지닌 ‘최초’의 의미와 자료적·교육적 가치를 고려해 세운 기준이다. 장편소설은 작품 소개와 주요 장면을 발췌해 수록했다. 현재까지도 널리 읽히는 1990년대 소설과 시를 포함해, 쉽게 구할 수 없었던 1950~1970년대 작품까지 여성문학사의 주요 작품들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7권 성차화된 개인과 여성적 글쓰기 1990년대
문학사의 주변에서 중심부로 진입한 여성문학
1990년대 여성문학은 한국문학사에서 처음으로 주변적 위치를 넘어 문학장의 중심부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여성 글쓰기의 실험은 시, 소설, 희곡을 망라하는 다양한 장르에서 전면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1980년대 운동권 문학에 나타났던 광장의 민주주의를 방의 민주주의와 접속시키고 젠더화된 개인으로서 여성의 자유를 실험한 것은 이 시기 여성문학의 지향점이자 성취였다. 그러나 젠더화된 개인으로서 자유와 평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가로막는 사회적 힘들과의 투쟁 없이는 불가능하다. 1990년대 한국 여성문학은 협소한 계급적·민족적 이데올로기에 갇혔던 정치성 범주를 젠더적 시각에서 확장했으며, 이를 통해 여성적 글쓰기를 실험하고 일정 정도 소수자적 문제의식을 포용해 들였다. 어느 때보다 다채롭고 풍성한 여성문학의 결실은 이런 시각의 확장에서 비롯되었다.
민음사 한국 여성문학 선집
[한국 여성문학 선집](전 7권)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을 엮은 ‘여성문학사연구모임’은 여성주의와 여성문학을 연구해 온 학자들이 한국 근현대 여성문학사 서술을 목표로 2012년 결성한 모임으로,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그 첫 번째 프로젝트이자 성과물이다.
이 프로젝트는 “왜 우리에게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 같은 전복적인 여성문학사, [노튼 여성문학 앤솔러지] 같은 여성문학 선집이 없는가?”라는 한 가지 명확한 의문과 강렬한 열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여성문학사 서술은 여성주의 운동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진 문학사 탈구축 작업의 일환이기도 하다. 문학사 탈구축 작업은 세계대전 이후 파시즘적 잔재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문학사에 깃든 국민·국가, 남성·엘리트, 문학중심주의 등을 걷어내고 여성과 소수자 문학을 문학사에 반영하자는 움직임이었다. 민주화가 이루어진 1990년대 이후 한국에도 문학사 탈구축 작업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지만 여성문학사 서술은 시도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유는 명확하다. 남성 중심의 문학사 서술이 굳건하게 형성되어 오는 동안, 여성문학사는 서술을 시작할 텍스트 선별조차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성문학은 그 전통을 이어 왔음에도 역사적 계보와 문화적 가치를 온전히 인정받지 못했다. 오랜 역사 동안 여성 작가의 ‘저자성’과 여성문학의 ‘문학성’은 의심받았으며, 주류 문학사에서 배제되거나 주변화되어 왔다. 오늘 등장한 [한국 여성문학 선집]이 한국 최초의 ‘여성문학사’이자 ‘새로운 문학사’ 서술의 출발점이 되는 이유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그동안 문학사에 없던 여성의 기준과 관점으로 근현대 한국 여성문학의 계보를 집대성하고, 제도 문학 중심의 구분에서 벗어나 장르 제한 없이 여성 지식 생산과 글쓰기 실천을 아카이빙한 최초의 작업이다.
‘최초’는 ‘다음’을 약속한다. 여성문학사연구모임은 [한국 여성문학 선집] 이후 본격문학과 국민문학을 넘어 대중문학과 퀴어문학, 디아스포라문학을 포괄하고 해외 학회와 협업한 다양한 선집을 후속 과제로 남겨 두었음을 밝히며, 시대마다 문학 공동체마다 다시, 그리고 새롭게 쓰일 새로운 문학사의 탄생을 예고한다.
최초의 ‘여성문학사’이자 ‘새로운 문학사’
문학사는 가장 실용적이고 정치적인 문학의 영역이다. 사회와 역사를 이해하고 개인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문학 교육의 주요한 방법론으로 ‘문학사 교육’이 위치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바로 그 이유로 과거 국가 권력은 문학사를 ‘민족’과 ‘시민’을 양성하는 첫 번째 도구로 삼았으며, 또한 같은 이유로 문학사는 민주화 이후 가장 먼저 심판대에 오르게 되었다. 1980년대 서구로부터 시작해 2000년대 한국 사회에도 민족과 이념 중심의 ‘남성 중심의 문학사’를 해체하고 새로 쓰는 ‘문학사 탈구축’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그 성과는 미약했다. 새로운 문학사 서술 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문학사는 문학 연구와 교육 모두에서 ‘죽은 지식’으로 외면당해 왔다. 그 역사 끝에 [한국 여성문학 선집]이 등장했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그동안 문학사를 떠받친 문학, 역사, 학문을 둘러싼 오랜 기준들을 오늘날의 관점으로 의심하고 새로이 들여다보며 완성한 ‘최초의 여성문학사’이자 ‘새로운 문학사’ 서술의 시작이다.
시대가 만들고, 시대를 만든 작품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최초’라는 단어가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실질적인 ‘원칙’으로 작용한 책이다. ‘여성문학의 진일보를 이룬 작품을 집대성한다.’는 목적과 학술적·역사적 근거와 의미를 가진 작품을 장르 구분 없이 발굴하고 소개한다는 대원칙 아래, 책에 대한 다른 원칙들이 세워졌다. 작품뿐 아니라 ‘학술’과 ‘역사’까지도 여성적 관점으로 다시 보고, 작품과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의 공기까지도 충실히 담을 것이라는 규칙들이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근대 개화기 조선부터 1990년대 민주화 이후 한국까지의 시대를 역사적 전환점으로 구분하고, 시대마다 독자적인 개성과 전환을 이룬 여성문학 작가와 작품을 선별해 담았다. 시, 소설, 산문, 희곡뿐 아니라 잡지 창간사, 선언문, 편지, 일기, 노동 수기 등 제도화된 문학 형식 밖에 있다는 이유로 문학사에서 다뤄지지 못했던 다양하고 자유로운 ‘여성 글쓰기’를 총망라했다.
한국 여성해방 100년의 기록
기존 문학사에서는 나혜석의 「경희」가 [여자계]에 발표된 1918년을 여성문학의 원류로 보았다면,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그보다 20년 앞선 1898년 「여학교설시통문」을 ‘여성 글쓰기’의 원류로 본다. 이 글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받고 일할 권리가 있고 이를 위한 학교를 설립하자고 주장하는 내용으로, 이름을 밝히지 않은 두 여성이 신문에 투고해 발표한 글이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이 글을 “근대 매체인 신문을 통해 공적 담론인 ‘선언문’의 형식으로 페미니스트 집합 의식을 발표한 최초의 글”(1권, 시대 개관)이라 평가하며 ‘여성 글쓰기’의 원류로 짚는다. 「여학교설시통문」을 발표한 이듬해 이 글의 저자들이 한국 최초의 여학교를 설립하고, 그로부터 20년 후 한국 여성문학의 원류인 나혜석, 김일엽, 김명순이 동시에 등장했다는 사실은 한국 여성문학이 만들어 온 여성해방의 방향성과 방식을 명확하게 보여 준다.
여성의 글쓰기와 삶은 앞선 여성의 글을 읽고 다음 여성의 삶을 상상하는 가운데서 적극적으로 공명하고 움직이며 이루어졌다. 시대마다 형태를 달리하며 여성에게 가해진 억압과 그에 따라 순응하고 저항하며 만들어간 여성의 삶, 그리고 그 속에서 시대를 뛰어넘어 고민하고 열망한 ‘자유’, 여성해방의 과정을 [한국 여성문학 선집]을 통해 고스란히 만날 수 있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문학사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문학사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 없이도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백과사전식 구성과 글로 만들어졌다. ‘시대 개관’은 각 권을 여는 글로, 다루는 작품과 시대 전반을 설명하며 사회·정치·문화적 맥락에서 작품과 작가를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끄는 글이다. ‘작가 소개’ 글은 작가의 생애와 작품, 문학사적 성취와 의미를 보여 주는 글로, 해당 작가를 연구해 온 연구자를 통해 방대한 자료와 엄정한 사실 검증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모든 작품은 초간본 원문을 우선해 수록했다. 이 선집이 지닌 ‘최초’의 의미와 자료적·교육적 가치를 고려해 세운 기준이다. 장편소설은 작품 소개와 주요 장면을 발췌해 수록했다. 현재까지도 널리 읽히는 1990년대 소설과 시를 포함해, 쉽게 구할 수 없었던 1950~1970년대 작품까지 여성문학사의 주요 작품들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7권 성차화된 개인과 여성적 글쓰기 1990년대
문학사의 주변에서 중심부로 진입한 여성문학
1990년대 여성문학은 한국문학사에서 처음으로 주변적 위치를 넘어 문학장의 중심부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여성 글쓰기의 실험은 시, 소설, 희곡을 망라하는 다양한 장르에서 전면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1980년대 운동권 문학에 나타났던 광장의 민주주의를 방의 민주주의와 접속시키고 젠더화된 개인으로서 여성의 자유를 실험한 것은 이 시기 여성문학의 지향점이자 성취였다. 그러나 젠더화된 개인으로서 자유와 평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가로막는 사회적 힘들과의 투쟁 없이는 불가능하다. 1990년대 한국 여성문학은 협소한 계급적·민족적 이데올로기에 갇혔던 정치성 범주를 젠더적 시각에서 확장했으며, 이를 통해 여성적 글쓰기를 실험하고 일정 정도 소수자적 문제의식을 포용해 들였다. 어느 때보다 다채롭고 풍성한 여성문학의 결실은 이런 시각의 확장에서 비롯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