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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는 말이 없다 : 독살설에서 영웅 신화까지
총서명 금요일엔 역사책 10
저자 이명제
출판사 푸른역사
출판일 20240630
가격 ₩ 15,000
ISBN 9791156122784
페이지 200 p.
판형 140 X 207 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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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소현세자, 조선의 차기 왕위 계승권자였지만 인질이 되어 타국에 머물러야 했던 태자. 인질에서 벗어나 그리던 고국으로 귀국했지만 병환으로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 했던 동궁. 최근 이 비운의 인물 소현세자가 새로운 서사를 통해 ‘영웅’으로 각광받고 있다. 첨단의 서양 문물을 수용하고자 했던 선구자이자 정체된 조선을 깨울 현실주의자, 전쟁 포로들을 구출한 노예 해방가, 농장 경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경영인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에 가정만큼 무의미한 것이 없다지만 문득 궁금해진다. 소현세자가 살아서 왕위를 이어받았다면 진정 조선의 역사를 완전히 바꿔버린 ‘영종’이 될 수 있었을까. 그러한 가정의 토대로 기능한 인질 시절 소현세자의 모습이 진정 선구자, 현실주의자, 노예 해방가, 탁월한 경영인으로 평가받을 정도였을까. 한국역사연구회에서 새롭게 기획한 ‘금요일엔 역사책’(한국역사연구회 역사선)의 열 번째 책인 [소현세자는 말이 없다―독살설에서 영웅 신화까지]에는 이 같은 의문에 대한 답이 제시되어 있다. ‘영웅’ 소현세자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인간’ 소현세자의 실제 모습은 어떠했는지 등에 대한 저자의 고찰이 생생하게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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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책머리에
프롤로그_죽음으로 뿌려진 씨앗

01 세자가 되다
격변에 휩싸인 동아시아
외면받는 광해군의 외교
뒤바뀐 운명

02 인질이 되다
꺾여버린 배금의 꿈
마찰의 시작
위기 속에 치러진 데뷔전
끝나지 않는 갈등
운명의 순간
남한산성의 비극
패전의 대가

03 심양에서의 삶과 한양에서의 죽음
심양으로 향하는 길
심양에서의 생활
두 번의 귀국
관계 악화와 일탈의 시작
중국 정복과 영구 귀국
고생 끝에 찾아온 죽음

04 영웅이 되다
잊힌 존재
서양 문물 수용의 상징으로 거듭나다
죽음에 관하여
소현세자 서사의 완성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05 역사 속의 소현세자와 대면하기
소현세자의 삶은 어떻게 재구성되는가
소현세자는 외교관이었는가
포로 해방과 농장 경영은 누구의 아이디어였는가
인식의 전환은 일어났는가
아담 샬의 기록은 믿을 수 있는가
독살인가 병사인가

에필로그_‘조선의 미래’는 오래 지속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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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발췌
P.10
미약한 소현세자와 강인한 소현세자, 왜 같은 존재를 바라보면서 서로 다른 소현세자의 모습을 발견한 것일까? 여기서부터 소현세자를 향한 저의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책은 당대의 소현세자와 마주하기 위한 저의 몇 가지 연구 성과를 집약한 결과물입니다.

P.12
이 책을 통해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소현세자가 아니라 소현세자가 관심을 받게 되는 과정에 개입되었던 다양한 욕망에 관한 것입니다. 소현세자가 주목되기 시작한 것은 1920~30년대부터입니다. 100년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소현세자를 재조명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소현세자라는 인물 자체의 삶이 아니라 소현세자를 통해 구현될 욕망이었습니다. 100년 전 일본인 학자들은 조선의 실패를 설명할 존재로서, 100년 후 대한민국 국민은 병자호란이라는 치욕적인 경험을 극복하고 부국강병의 조선을 건국하여 근대화를 이룰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서 소현세자를 주목했던 것입니다. 욕망이 앞서면 눈은 가려지게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강인한 소현세자를 원했고, 역사 속 소현세자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강인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정작 중요한 소현세자의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책의 제목을 ‘소현세자는 말이 없다’라고 붙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P.17
1645년 4월 26일, 조선의 세자 이왕李이 창경궁 환경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왕의 죽음 역시 병자호란이 초래한 비극의 연장선이었다. 조선의 차기 왕위 계승권자마저 잔혹한 운명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세상을 떠난 세자에게 ‘소현昭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가 바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소현세자다.

P.19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곧잘 이야기되지만, 막상 소현세자의 ‘삶’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책에서는 비극으로 점철된 소현세자의 죽음보다는 비극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삶을 다루어보고자 한다. 나아가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그의 존재가 부각되는 과정과 그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온당한 것인지 검토해보고자 한다.

P.21~23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소현세자의 삶에도 극적인 변화가 찾아온다. 소현세자의 아버지였던 능양군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국왕 인조로 등극한 것이다. 반정 직후 반포된 교서에는 반정의 명분으로 다섯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교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가장 마지막 명분은, 광해군이 명나라를 배신하고 오랑캐와 내통했다는 취지였다. 다시 말해 광해군의 외교
정책에 심각한 하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P.24~27
조선과 명이 일본의 도전에 직면한 사이 요동 지역에서는 한 명의 여진인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누르하치努爾哈赤로, 압록강 북쪽 지역을 거점으로 하는 건주여진 출신이었다. 1583년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누르하치는 불과 5년 만에 건주여진 세계를 통일했다. 명은 여진 부족 간의 경쟁을 부추기며 분열시키는 정책으로 여진 사회를 통제해왔었다. 하지만 누르하치의 등장으로 인해 명의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게 되었다.

P.28
후금에 대한 출병 여부를 두고 광해군과 신료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광해군은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명의 요구를 거절하자는 입장이었던 반면, 신료들은 명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며 출병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관점을 고수했다.

P.30
신료들은 조선이 파병을 거부하여 명과 관계가 틀어질 시, 후금의 목표가 명에서 조선으로 바뀔 수 있음을 지적했다. 후금이 조선을 건드리지 않는 근본적 이유가 명이 조선을 도와 후금의 후방을 공격할 것을 우려해서라는 주장이다.

P.36
광해군의 ‘줄타기’ 외교는 안팎에서 도전에 직면했다. 우선 명 측에서 조선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명 내부에서는 사르후 전투 패배 이후 여허가 정복된 데 이어 조선까지 후금에 넘어갈 것이라는 불안감이 팽배했다. 조선과 후금의 관계가 심상치 않자 우려의 목소리까지 등장했다.

P.37
조선을 의심하는 명의 분위기를 감지하자 조선 내부에서도 광해군에게 외교 노선을 명확히 하라는 요구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후금과의 확실한 단절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광해군은 물론이고 외교를 담당하는 신료들 역시 무턱대고 후금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 해답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후금보다 군사력이 열세인 상황에서 굳이 심기를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P.39
광해군은 모문룡을 가도椵島라는 섬으로 들어가도록 설득했다. 후금군이 조선 경내로 침입하는 사태를 막고자 함이었다. 사태는 일단락되었지만 광해군의 대응을 놓고 조선 내부에서 불만이 커져갔다. 광해군의 결정은 명에 대한 의리도 내팽개치고, 후금의 위협에 대한 자위마저 포기한 것으로 비쳐졌다. 조선 조정 내에서 광해군의 외교 전략을 옹호하는 사람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P.40
1623년 3월 13일 서인 세력이 능양군을 앞세워 무력을 동반한 정변을 시도했다. 그 결과 광해군이 폐위되고 능양군이 새로운 국왕 인조로 즉위하게 되니, 이 사건을 인조반정이라 부른다. 광해군은 폐모살제廢母殺弟라는 패륜과 더불어 무리한 궁궐공사로 인해 민심을 완전히 잃은 상황이었다. 더구나 광해군의 ‘줄타기’ 외교는 1621년 이후 설득력을 완전히 상실해버렸다. 결국 광해군은 고립된 상태로 자신의 시대가 저무는 것을 바라봐야 했다.

P.45
인조반정이 성공한 요인 중 하나는 광해군의 ‘줄타기’ 외교가 공감대를 잃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 대부분은 명과의 관계를 강화해 후금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항해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상황에서 명분으로 보나 실리로 보나 합리적인 판단에 가까웠다. 이런 상황에서 인조 정권이 친명배금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P.53~54
이괄의 난은 빠르게 진압되었지만 반란이 남긴 영향은 결코 적지 않았다. 우선 조선의 군사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 민심의 분열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 조선의 대후금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 ‘친명배금’을 외치던 인조 정권의 자신만만한 행보에 제동이 걸려버렸다.

P.58
홍타이지가 온전한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다. 그 상황에서 홍타이지가 찾은 돌파구가 바로 조선이었다. 홍타이지는 처음부터 조선에 대한 강경파 중 한 명이었다. 사르후 전투 이후에도 조선이 후금의 화친 요구에 응하지 않자 후금 내부에서는 조선을 선제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그 제안자 중 한 사람이 바로 홍타이지였다. 당시 홍타이지의 제안은 누르하치에 의해 거부되었지만, 이제 홍타이지의 의지를 정면에서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결과 1627년 1월 정묘호란이 발생했다.

P.59
흥미롭게도 정묘호란은 애초에 후금이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 아니었다. 홍타이지가 조선 침공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바로 모문룡이었다. …… 후금군의 출병 목적은 일차적으로 모문룡을 사로잡기 위함이었다.

P.61
강화 협상이 타결된 것은 2월 15일이었다. 후금군이 임진강 방어선을 뚫지 못하면서 후금군 지도부 역시 부담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양국은 일정한 양보를 통해 합의점을 도출했다. 후금은 조선과 명의 관계를 인정했고, 조선은 후금에 인질과 세폐를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3월 3일, 조선과 후금은 정식으로 맹약을 체결했고, 9월 후금군이 조선 영내에서 완전히 철병함으로써 정묘호란이 종결되었다.

P.63
1월 24일 소현세자가 이끄는 분조가 한양을 떠나 2월 6일 최종 목적지인 전주에 도착했다. 조선 왕조의 발상지였던 전주를 수호하는 동시에 곡창지대였던 전라도 일대의 미곡을 대조大朝에 공급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전주에서의 분조 활동은 36일간 지속되었다. 다행히 전쟁이 비교적 빨리 종결되면서 소현세자는 3월 13일 전주를 떠날 수 있었다. 소현세자의 분조는 대조가 위치한 강화도에 도착한 3월 23일에 해체되었다.

P.64
소현세자가 존재감을 과시하는 장면도 있었다. 전주에 도착한 이후 무군사撫軍司에서 “국가가 위기에 처한 시기이므로 인심을 고무시키고 군사를 충원해야 한다”며 인조에게 보고하고 과거를 실시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자 소현세자는 자신의 직권으로 과거시험 개최를 결정하고 곧장 문무과를 실시했다.

P.64
과거와 관련한 일화는 소현세자의 아량을 보여주는 동시에 정치적 미숙함도 노출시켰다. 특히 “인조에게 먼저 보고한 후에 과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무군사의 건의에도 불구하고 직권을 남용한 사실은 주목할 대목이다. 과거는 국왕을 위해 복무할 인재를 등용하기 위한 시험이다. 그런데 국왕을 거치지 않고 소현세자가 시험을 주관했다는 사실은 인조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소현세자가 주관하는 시험에서 합격한 인원들은 인조보다 소현세자에게 고마움을 느낄 것이고, 이는 자신만의 세력을 키우고자 하는 모습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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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전남대학교 역사문화연구센터 학술연구교수
「외교문서를 통해 본 도르곤 섭정기 조·청 외교」([동양사학연구] 164, 2023)
「소현세자의 2차 귀국을 통해 본 도르곤의 對조선 전략」([동양사학연구] 160, 2022)
「소현세자 서사의 탄생과 역사 속의 소현세자」([역사와 현실] 125, 2022)
「강희 연간 淸使의 사행 기록과 조선 인식의 양상」([한국문화] 8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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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당신들의 소현세자는 틀렸다
우리가 몰랐던 소현세자를 만나다

참신하고 다채로운 최신 연구 성과를 독자들과 널리 공유하기 위해 한국역사연구회가 새롭게 기획한 ‘금요일엔 역사책’이 열 번째 책 [소현세자는 말이 없다―독살설에서 영웅 신화까지] 출간을 통해 한 고개를 넘게 되었다. 많은 독자들이 ‘금요일엔 역사책’을 마주하며 역사를 통해 보다 여유롭고 정의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소현세자가 살았다면 정말 조선이 달라졌을까
“두 대한의 역사는 소현세자부터 달라졌더군. 자네의 세계에서는 일찍이 돌아가셨고, 내 세계에서는 영종으로 역사에 남으셨어. 호란을 막아냈거든. 그 이후부터 두 세계의 역사는 조금씩 다르게 흘러서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2020년 SBS에서 방영된 드라마 〈더 킹: 영원의 군주〉의 주인공 이곤은 현대 한국의 평행세계에 살고 있는 인물이다. 이곤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조선은 근대화에 성공했다. 우연히 현대 한국의 세계로 넘어온 이곤은 어디서부터 조선의 역사가 달라지게 되었는지 의문을 가졌다. 그 결과 소현세자로부터 양국의 역사가 차이가 발생했음을 알게 되었다.
소현세자, 조선의 차기 왕위 계승권자였지만 인질이 되어 타국에 머물러야 했던 태자. 인질에서 벗어나 그리던 고국으로 귀국했지만 병환으로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 했던 동궁. 최근 이 비운의 인물 소현세자가 새로운 서사를 통해 ‘영웅’으로 각광받고 있다. 첨단의 서양 문물을 수용하고자 했던 선구자이자 정체된 조선을 깨울 현실주의자, 전쟁 포로들을 구출한 노예 해방가, 농장 경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경영인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에 가정만큼 무의미한 것이 없다지만 문득 궁금해진다. 소현세자가 살아서 왕위를 이어받았다면 진정 조선의 역사를 완전히 바꿔버린 ‘영종’이 될 수 있었을까. 그러한 가정의 토대로 기능한 인질 시절 소현세자의 모습이 진정 선구자, 현실주의자, 노예 해방가, 탁월한 경영인으로 평가받을 정도였을까.

‘영웅’이 아닌 ‘인간’ 소현세자를 찾아
한국역사연구회에서 새롭게 기획한 ‘금요일엔 역사책’(한국역사연구회 역사선)의 열 번째 책인 [소현세자는 말이 없다―독살설에서 영웅 신화까지]에는 이 같은 의문에 대한 답이 제시되어 있다. ‘영웅’ 소현세자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인간’ 소현세자의 실제 모습은 어떠했는지 등에 대한 저자의 고찰이 생생하게 녹아 있다.
저자 이명제(전남대학교 역사문화연구센터 학술연구교수)는 이 책에서 “병자호란 패배의 모든 책임을 짊어져야 했던 인조와 그동안 근대화의 열망에 대한 기대를 감당해야만 했던 소현세자라는 구도 속에서 소모되고 있는 ‘영웅’ 소현세자를 구출하고, 역사적 격변기를 살아왔던 당대의 ‘인간’ 소현세자”를 마주보고자 한다.
저자의 눈에 비친 소현세자는 여러 콘텐츠를 통해 조선을 바꿀 수 있었던 인물로 격상된 ‘영웅’이 아니었다. 병자호란이라는 치욕적인 경험을 극복하고 부국강병의 조선을 건국하여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던, 우리 안의 작은 ‘영웅’이 아니었다. 전쟁 패배의 희생양이 되어 26세에 불과했던 1637년부터 8년 동안 인질 신분으로 청의 수도였던 심양에 머물러야 했던 ‘인간’이었다. 힘의 우위를 확인받으려는 청의 의지와 자율성 및 독립성을 확보하려는 조선의 시도가 사사건건 충돌하던 시공간의 중심에서 그러한 충돌의 직격탄을 매순간 온몸으로 받아내야만 했던 ‘인간’이었다. 원대한 미래를 꿈꾸기에는 너무도 무거운 짐에 허덕이다가 결국 이겨내지 못하고 병을 얻어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인간’이었다.

[소현세자는 말이 없다]가 마주한 소현세자
저자는 ‘인간’ 소현세자를 찾기 위해 향후 소현세자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인조반정부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각 난에서 세자 신분으로 소현세자가 수행한 역할과 8년 동안의 인질 생활, 귀국 후 두 달 만에 사망하게 된 상황, 소현세자 서사가 등장하게 된 배경과 구체적인 내용, 그러한 소현세자 서사의 재검토를 통해 당대 소현세자의 삶을 새롭게 구성한다.
첫 번째 〈세자가 되다〉에서는 소현세자를 비롯해 많은 사람의 운명을 뒤바꿔놓았던 인조반정을 다룬다. 특히 반정 이후 소현세자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광해군의 대 후금(훗날의 청) 외교를 중점적으로 살펴본다.
두 번째 〈인질이 되다〉에서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거쳐 조선이 청의 제후국으로 편입되고 소현세자가 인질로 끌려가는 과정을 살핀다. 또한 두 차례 전쟁에서 소현세자가 수행했던 역할도 조망한다. 특히 정묘호란 당시 소현세자가 이끈 분조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본다. 당시 소현세자의 분조 활동은 인조로부터 그다지 호평을 이끌어내지도 못했으며 훗날 인조와 소현세자의 사이를 벌려놓는 한 가지 사건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세 번째 〈심양에서의 삶과 한양에서의 죽음〉에서는 8년 동안의 인질 생활과 귀국 후 두 달 만에 일어난 사망 사건을 다룬다. 특히 소현세자를 향한 조선과 청의 기대가 충돌하는 지점을 확인하고, 소현세자와 인조의 관계가 극단으로 치닫는 과정을 조명한다.
네 번째 〈영웅이 되다〉에서는 소현세자의 삶이 재조명되는 계기와 현재 통용되는 소현세자 서사의 탄생 과정을 살펴본다. 이를 통해 당대 조선에서는 비운의 인물로만 비춰졌던 소현세자가 현대에 이르러 조선의 미래를 바꿀 수 있던 영웅으로 변모하는 흐름을 정리한다.
다섯 번째 〈역사 속의 소현세자와 대면하기〉에서는 소현세자 서사를 재검토하며 당대 소현세자의 삶을 재구성한다. 특히 소현세자 서사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외교관, 노예 해방가, 농장 경영인, 현실주의자, 서양 문물 수용자로서의 소현세자 모습이 역사적 실제와 다름을 입증한다. 또한 소현세자 ‘독살설’을 꼼꼼하게 살피며 인조를 변호한다.

‘소현세자 서사’는 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저자가 이 책에서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소현세자가 아니라 소현세자가 관심을 받게 되는 과정에 개입되었던 다양한 욕망”이다. 저자는 소현세자가 주목되기 시작한 것이 1920~30년대부터라고 말한다. 소현세자를 재조명한 이들은 왜 수많은 역사적 인물 중 소현세자에 주목했을까.
저자는 이를 ‘조선이 근대화에 실패한 이유’ 관련 담론에서 찾는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후 많은 일본인과 조선인 학자들은 조선의 근대화 실패 원인을 찾아 나섰다. 일본인 학자들은 조선이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근거를 찾기 위해서, 조선인 학자들은 지난 역사를 반성하고 원대한 미래를 꿈꾸기 위해서 말이다. 그 과정에서 광해군이나 소현세자 등이 조선을 근대화로 이끌 수 있던 인물들로 호출되었다. 이 담론은 새롭게 발굴된 소현세자 등이 자신의 가능성을 펼쳐 보기도 전에 사라지면서 조선이 암울한 미래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결론으로 끝맺는다.
저자는 ‘소현세자’를 ‘근대화의 영웅’으로 치환했던 100년 전 일본인과 조선인 학자들의 욕망이 오늘날 ‘소현세자 서사’의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소현세자라는 인물 자체의 삶이 아니라 소현세자를 통해 구현될 욕망”이라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영웅’ 소현세자를 원하는 분위기에서 역사 속 ‘인간’ 소현세자가 설 자리는 없었다. 정작 중요한 소현세자의 목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저자가 책의 제목을 ‘소현세자는 말이 없다’라고 붙인 이유이다.

저자는 말한다. “과거의 인물에게 현재의 열망을 투사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하지만 그 열망이 자칫 과도할 경우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와 과거는 끊임없는 긴장 상태에 놓여야만 한다. 현재의 과도한 열망으로 시계추가 기울어졌다면 돌려놓아야 한다.” “21세기의 ‘영웅’ 소현세자가 아니라 17세기 격변기의 ‘인간’ 소현세자에 주목해야” 한다는 저자의 역설이 유의미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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