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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 구병모 장편소설
저자 지은이: 구병모
출판사 위즈덤하우스
출판일 20180416
가격 ₩ 17,800
ISBN 9791162203620
페이지 342 p.
판형 128 X 188 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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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한국 소설에 가장 강렬하게 새겨질 새로운 여성 서사를 탄생시킨 구병모 작가의 [파과]가 새 옷을 갈아입었다. 40여 년간 날카롭고 냉혹하게 청부 살인을 업으로 삼아온 60대 여성 킬러 ‘조각(爪角)’. 몸도 기억도 예전 같지 않게 삐걱거리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퇴물 취급을 받는다. 노화와 쇠잔의 과정을 겪으며 조각은 새삼스레 ‘타인’의 눈 속에 둥지를 튼 공허를 발견하게 된다. 소멸의 한 지점을 향해 부지런히 허물어지고 있는 모든 것, 깨지고 상하고 뒤틀린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연민을 느끼며, 조각의 마음속에 어느새 지키고 싶은 것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한다. [파과]는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뜨거운 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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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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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발췌
P.34
매력적인 일이라고 생각 안 해. 누군가는 꼭 해야 하기 때문에 차라리 내가 한다는 핑계도 대지 않아. 개개인의 정의 실현이라면 그거야말로 웃다 숨넘어갈 소리지. 하지만 말이다. 쥐나 벌레를 잡아주는 대가로 모은 돈을, 나중에 내가 쥐나 벌레만도 못하게 되었을 때 그런대로 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닌 것 같구나.
그렇게 말했던 사람과, 함께 밥상을 나누고 머리카락에 싸락눈이 내려앉는 평범한 일을, 그녀는 잠시나마 그려본 적이 있었다. 상대방이 코웃음 칠까 입 밖으로 내보지 못한 소박한 풍경을, 바라선 안 되는 나날을.

P.138~140
그녀는 자신이 무용을 데려와 이름을 지어줬던 때가 언제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누구나 선뜻 내켜 데려가고 싶어 할 만큼 작거나 귀엽지 않았다는 기억만은 남아 있다. 아니, 기억보다는 지금의 외모로 보아 그때라고 썩 다르지 않았으리라는 소급에서 비롯된 사고로, 어쩌면 아무도 데려갈 것처럼 생기지 않았으므로 자신이 집어왔을 것인데, 당시 정황의 세부를 되살리지는 못하나 자신이 살아 있는 걸 주워왔다는 데 대한 당혹감, 살아 있는 것에 마음이 움직여 충동만으로 예정에 없던 행동을 한 데 대한 낭패감만은 선명하다.
집 안에 자신 말고도 살아 있는 누군가가 존재해서 그것에게 인사를 하게 될 줄은, 집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재촉하거나 또는 집으로 영영 돌아가지 못할까 봐 초조해질 줄은, 자기 인생에서 그런 날이 다시 올 줄은, 무용을 데려오기 전에는 몰랐다.

P.168~169
무언가를 하기로 생각하고 있다면, 설령 그것이 가벼운 인사일지라도, 언제나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요즘 같아서는 더욱 그렇다. 돌아서면 곧바로 자기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 잊고 마는 일상이니까. 그녀는 무용의 머리를 서너 번 쓸어내리며 한 음절씩 확고하게 말한다.
“다녀, 온다.”
숨이 붙어 있는 한은 다녀-올 것이다. 손발이 움직이는 한은, 언젠가 이 녀석이 기억에서 지워지거나 그 존재를 인식조차 할 수 없게 되기 전까지는. 그녀는 현관문을 닫는다.

P.225
거기 뭉크러져 죽이 되기 직전인 갈색의, 원래는 복숭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물건이 세 덩어리 보인다. 집에 와서 그녀는 꼭 한 개를 먹었을 뿐이고, 그 뒤로 잊어버린 모양이다.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물 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집어 올리자마자 그것은 그녀의 손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린다. 채소 칸 벽에 붙어 있던 걸 떼어내느라 살짝 악력을 높였더니 그렇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부서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건져 봉지에 담고, 그러고도 벽에 단단히 들러붙은 살점들을 떼어내기 위해 손톱으로 긁는다. 그것들은 냉장고 안에 핀 성에꽃에 미련이라도 남은 듯 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문득 콧속을 파고드는 시지근한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흘린다. 얼마쯤 지나 그녀 어깨가 흔들리고 신음이 새어 나오자 무용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짖기 시작한다.

P.264~265
방역업을 시작한 뒤로 삶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 아닌 현재멈춤형이었다. 그녀는 앞날에 대해 어떤 기대도 소망도 없었으며 그저 살아 있기 때문에, 오늘도 눈을 떴기 때문에 연장을 잡았다. 그것으로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확인하지 않았고, 자신의 행동에 논거를 깔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살아남으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일찍 죽기 위해 몸을 아무렇게나 던지지도 않았다. 오로지 맥박이 멈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움직이는 것은 훌륭하게 부속이 조합된 기계의 속성이었다. 류를 가끔 떠올렸고 그가 생전에 주의를 준 사항들에 자주 이끌렸지만, 제 몸처럼 부리던 연장으로 인해 손바닥에 잡힌 굳은살과도 같은 감각 외에는, 류를 생각하면서 온몸이 뻐근하게 달뜨고 아파오는 일이 더 이상 없었다. 그녀는, 나이 들어가고 있었다.

P.342
이 순간 그녀는 깨지고 상하고 뒤틀린 자신의 손톱 위에 얹어놓은 이 작품이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며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그래서 아직은 류, 당신에게 갈 시간이 오지 않은 모양이야.

P.96
바다를 동경하는 사람이 바닷가에 살지 않는 사람뿐인 것처럼. 손 닿지 않는 존재에 대한 경이감과 숭고한 대상화.

P.283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하나의 존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혼이라는 게 빠져나갔는데도 육신이 더 무거워진다는 것은.

P.332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P.168
무언가를 하기로 생각하고 있다면, 설령 그것이 가벼운 인사일지라도, 언제나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P.7
그러니까 금요일 밤 시간대의 전철이란 으레 그렇다. 밀착을 넘어 연체동물의 빨판처럼 서로에게 흡착되다시피 한 생면부지의 몸사이에 종잇장만 한 틈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운, 누군가 입을 열거나 숨을 쉴 때마다 머리 위로 끼얹어지는 고기 누린내와 마늘 냄새 문뱃내에 들숨을 참더라도, 그 냄새가 닷새간의 노동이 끝났음을 알려주기에 안도하는 시간. 과연 내년에도 혹은 다음 달에도, 심지어 당장 다음주에도 이 시간에 전차를 탈 수 있을지에 대한 실존의 불안을 잠깐이나마 접어두는 시간. 다음 역 문이 열리고 쏟아지는 한 무더기의 노동자들-그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피로와 고뇌와 얼른 귀가하여 젖은 휴지 같은 몸을 매트리스에 부려놓고 싶다는 갈망 사이로 그녀가 들어선다.

P.18
복잡한 장소에서 일 마치고 코너를 돌 때는••••••.
속도를 줄이거나 벽쪽에 붙지 말고 바깥으로 원을 넉넉하게 그리라고 했지. 마주 오던 사람이랑 부딪혀 갖고 있던걸죄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어쩔 거야. 여기 증거물 있으니다 가져가세요 하게?
그렇게 말하던 이의 표정을 바로 어제인 양 떠올리며 그녀는 집에 닿는 가능한 한 복잡한 경로를 머릿속에 그린다.
이대로 나가 한 블록 걸어가면 버스 정류장이 나올 테고 거기서 아무 번호나 잡아탄 다음 이곳으로부터 최대한 멀리떨어진 또 다른 노선의 전철역에 내려 굳이 먼 길을 돌아가리라, 최대한의 궤적을 그리며 잔손금과도 같이 펼쳐진 길을 돌아가리라, 몸이 허락하는 한 그녀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출구를 향해 간다. 머리 위로 드리워진 지상의 찬란한 어둠을 향해 나아간다.

P.36
그는 얼핏 보아 말투는 천진하고 느슨하며 시시껄렁한 태도는 시러베장단에 호박 국 끓여 먹을 기세이고 가명도 어딘가 미련하게 들리는 데다 지금 하고 나타난 차림새는 사업 실패로 집을 날리고 장롱에 식탁까지 차압당한 뒤 신장이 떼이기 일보 직전인 알코올중독자를 떠올리게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로, 뜯어보면 은근히 밀알진 얼굴에 신체 기능이 떨어진다며 술 담배를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높으신분들을 자주 상대하다 보니 명품 양복을 수시로 갈아들인다. 신속 정확 치밀과 같은 방역업자가 기본으로 장착해야할 속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거기에 서비스 정신까지 딸려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방역을 완수하기만 하면 된다고생각하는 업자들이 있는 반면, 투우는 사소한 과정 한 단계까지 고객의 필요에 따라 이행한다. 요구 사항이 따로 없는경우는 목표물을 찾아내어 제거하기까지 국내 거주자인 경우 1박 2일 정도면 충분하지만, 귀퉁이를 물그릇에 담가둔수건처럼 작은 징후가 번져나가게 하고 목표물의 영혼을 불안과 초조에 충분히 적신 뒤 그가 온몸의 구멍으로 남김없이 배설물을 쏟아낼 만큼의 공포에 사로잡혀 가능한 한 처참하게 가도록 해달라는 옵션 주문이 들어오면 개중에는모든 손가락을 한 마디씩 끊어서 총 스물여덟 개의 조각을먼저 보내달라거나 팔다리 관절부터 분질러달라는, 깊은 원한의 소산이라고만 하기엔 참으로 번거롭고 정서적으로 문제 있어 보이는 주문들도 많았다-그에 필요한 무대를 짜고연출을 하여 최장 석 달 가까이 목표물 주위를 맴돌기도한다.

P.37
처음에는 사소한 이변과 의구심 정도였다가 압박감과 고조되는 두려움으로 호흡곤란 지경이 되면 비로소 목표물은 어그러진 일상과 폐허를 목도하게 되고, 목표물이 미쳐버리기 직전 투우는 그 앞에 본색을 드러낸다. 이때 목표물이 완전히 미칠 틈을 주지 않도록 그의 정신 공간의 여분을 치밀하게 계산하는 한편 작품에 꽂을 나사를 쥐었다 풀었다 하면서 보다 정확한 견적을 낼 필요가 있는데, 정신이 나간상대를 제거하는 것은 그에게 자비를 베푸는 셈이 되어서 의뢰인의 요구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P.87
의사는 시계를 확인하고는 정말로 간호사들이 출근하기전에 몸을 피해야겠다는 듯이 어질러진 주변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조각은 점차 긴장이 풀리며 의사에 대한 작은 믿음이 생겼는데, 이것은 방역업자가 타인을 대할때 갖게 되는 양면의 관점으로서 우선 닥치는 대로 누구든의심하고 보자는 반면에 그가 진실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파악하는 눈도 발달한 결과로, 이 의사는 물에 빠진 걸 건져줬더니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달려드는 사람에게 최소한의 적개심조차 드러내지 않고 있었으며, 그 태도에는 방법이 약간 올바르지 않으나 그 상황에 의사로서 할 수밖에 없었던일을 했을 뿐이라는 심상함과 무관심이 깃들어 있었다.

P.96
할머니의 말에 아이는 샐쭉하게 입을 내밀어 보인다. 아저 아이가 강 박사의 딸이구나. 저 아이는 그날 무슨 맛 아이스크림을 먹었을까. 아니면 예쁜 옷 한 벌이라도 새로 해입었을까. 요즘 아이들 옷은 터무니없이 비싸다던데 그걸론모자라지나 않았을까. 아이의 뺨과 귀 사이에 난 작고 귀여운 점을 보고 조각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걸린다. 아이의팽팽한 뺨에 우주의 입자가 퍼져 있다. 한 존재 안에 수렴된시간들, 응축된 언어들이 아이의 몸에서 리듬을 입고 튕겨나온다. 누가 꼭 그래야 한다고 정한 게 아닌데도, 손주를 가져본 적 없는 노부인이라도 어린 소녀를 보면 자연히 이런 감정이 심장에 고이는 걸까. 바다를 동경하는 사람이 바닷가에 살지 않는 사람뿐인 것처럼. 손 닿지 않는 존재에 대한 경이로움과 채워지지 않는 감각을 향한 대상화.

P.100
˝공주님 몇 살?˝
˝여섯 살이에요.˝
여섯 살•••••• 강 박사의 딸은 여섯 살. 알면서 물었으나 굳이 아이의 목소리로 듣고 나니 ‘- 쌀‘이라는 발음에 맺힌 수분이 언제까지고 증발하지 않은 채 귓가에 맴돌 듯하다.

P.106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진주색 등으로, 목뒤로 늘어뜨려진스카프가 홈이 깊이 파인 셔츠를 걸친 등을 반쯤 가리고 있었으나 달빛에 반사되는 단단한 척추와 견갑골이 두드러져이제 곧 거기서 날개가 돋기라도 할 것 같았다. 바깥쪽으로 돌아선 자세로 베란다 난간에 걸터앉아 있던 사람이 숨기에 고개를 반쯤 돌려서는 태연한 표정으로 소년을 흘겨보았는데, 그것이 지난 엿새간 가사를 맡아준 도우미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소년은 기억에 입력해야 하는 몇 가지사실들 ㅡ추정 40대 초중반 여성, 마른 단신에 세미 롱의 직모ㅡ을 잊어버린 채 그녀의 실루엣을 따라 일어난 미풍이 창밖에 휘날리는 꽃잎들을 실어 날라 오는 것만 같다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아버지를 저렇게 만들어놓고 어째서 당신의 옷이나 얼굴에는 단 한 방울의 피가 튀지 않고 그토록 깨끗한가요 그것은 대체 무슨 기술인가요, 소년은 이 순간 진심으로 그것이 궁금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녀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을지도 몰랐다.

P.130
이제 내가 당신에게 뭐라고 하면 좋을까.
마주친 첫 순간 투우는 그녀의 버들눈썹과 옴쏙한 두 뺨이며 강퍅해 보이는 입술을 바로 알아보았고 물론 상대편에서는 소 닭 보듯 멀뚱히 건너다보며 이쪽에서 선배에게 건네는 인사를 거절했다. 우리는 서로 모르고 지내도 되네. 팀워크로 하는 일도 아니고, 내가 알고 지내서 이익 될 만한 사람도 아닐세.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녀가 자신을 기억하지못함이 확실해지자 그의 몸 한 귀퉁이에서 약봉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한 시절과, 그것을 이루거나 부순 몇몇 장면들이 요동하며 그의 눈꺼풀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이제 내가 당신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당신은 이미 늙었고 완고하며 현명함과는 거리가 멀지.
그렇게 무심히 고개 돌리는 순간 언제라도 내 손가락 다섯개를 펼쳐 당신의 머리를 쥐어 터뜨릴 수 있지. 당신은 방심할까. 당신은 막거나 피할 수 있을까. 아마 쉽지 않겠지. 시선의 속도와 마음의 움직임을 몸이 따라잡지 못하리라는 걸스스로도 잘 알겠지.
그러나 그렇다고 다른 시시껄렁한 놈들처럼 최저가 입찰이나 클릭하고 앉았다면 그건 그거대로 실망스럽겠지.
어떻게, 한때 내 아비의 대갈통을 박살 냈던 여자가 고작 그런 일을 그것만은 있어선 안 되는 일.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자기도 모르게 뻗은 손을 슬그머니거둬들여 입 맞추며 그는 다만 바라보았다. 끌어당겨 손가락에 감아보고 싶었던 머리카락 대신, 거기엔 푸석하고 건조하며 구불거리는 잿빛 머리카락이 손 닿지 않는 선반 위의 해묵은 먼지처럼 뭉쳐 있었다. 그것은 기억과 호환되지않는 현재였고 상상에 호응하지 않는 실재였으며, 영원히 괄호나 부재로 남겨두어야만 하는 감촉이었다.

P.138
평소와 대동소이한 읊조림에 리듬이 실리고 한때의 평온함이 몸속에 번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무용의 등을쓸어내린다. 무용은 촉촉한 코를 그녀의 턱에 비비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꼭 개라서가 아니다. 사람한테라고 다를 바 없지. 늙은이는 온전한 정신으로 여생을 살 수 없을 거라는••••••  늙은이는 질병에 잘 옮고 또 잘 옮기고 다닌다는•••••• 누구도 그의 무게를 대신 감당해주지 않는다는. 다 사람한테 하듯이 그러는 거야. 너를 잘 돌봐주진 못했어도 네가 그런 지경에 놓이는 건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다. 죽어서도 마음이 불편하겠지. 그러니 언젠가 필요한 때가 되면 너는 저리로 나가. 그리고 어디로든 가. 알겠니. 살아 있는데, 처치 곤란의 폐기물로 분류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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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소설가. 소설집 [고의는 아니지만]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단 하나의 문장] [있을 법한 모든 것], 장편소설 [파과] [네 이웃의 식탁] [상아의 문으로] [절창] 등이 있다. 오늘의작가상, 김유정문학상, 김현문학패 등을 수상했다. 수상 : 2022년 김유정문학상, 2015년 오늘의작가상, 2008년 창비청소년문학상 SNS : //twitter.com/erewho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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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베를린영화제 공식 초청 영화 〈파과〉 원작 소설
전 세계 13개국 수출, 뉴욕타임스 선정‘주목할 만한 책 100선’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뜨거운 찬사
이름은 조각(爪角). 한때 ‘손톱’으로 불리던 그녀는 40여 년간 청부 살인을 업으로 삼으며, 날카롭고 빈틈없는 깔끔한 마무리로 ‘방역 작업’을 처리해왔다. 하지만 몸도 기억도 예전 같지 않게 삐걱거리면서 이제는 퇴물 취급을 받는다. 한편 노화와 쇠잔의 과정을 겪으며,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고 평생을 되뇌어온 조각의 마음속에 어느새 지키고 싶은 것들이 하나둘 생겨난다. 버려진 늙은 개를 데려다 키우는가 하면, 청부 살인 의뢰인의 눈에서 슬픔과 공허를 발견한다. 삶의 희로애락을 외면하고 살아온 조각의 눈에 타인의 고통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연민으로 조각의 마음에 온기가 스며든다.
이 소설은 ‘냉장고 속 한 개의 과일’에서 비롯되었다. 구병모 작가는 “뭉크러져 죽이 되기 직전인 갈색의, 원래는 복숭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물건”,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를 보고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파과’의 사전적 의미는 두 가지다. 부서진 과일, 흠집 난 과실이 그 첫 번째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여자 나이 16세 이팔청춘, 즉 가장 빛나는 시절을 뜻한다. 우리 모두 깨지고 상하고 부서져 사라지는 ‘파과(破果)’임을 받아들일 때, 주어진 모든 상실도 기꺼이 살아내리라 의연하게 결심할 때 비로소 ‘파과(破瓜)’의 순간이 찾아온다. 이처럼 소설 [파과]는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뜨거운 찬사다.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한국 소설에 가장 강렬하게 새겨질 여성 서사의 탄생
노인, 여성, 킬러.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세 가지를 조합한 주인공 조각은 65세 여성 킬러다. 한국 소설 가운데 이토록 파격적인 주인공이 또 있을까. 그동안 아가미를 가진 소년([아가미]), 인간을 닮은 로봇([한 스푼의 시간]) 등 환상적인 상상력을 통해 독특한 주인공들을 탄생시킨 구병모 작가는 한국 소설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60대 여성 킬러’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통해 새로운 여성 서사를 써내려가며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다. 사회의 최약자로서 차별받아온 ‘노인’과 ‘여성’이라는 인물이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사회에 ‘킬러’라는 강렬한 이름으로 맞서 싸우는 것이다.
자신을 치료해준 강 박사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게 된 조각, 그런 조각을 경멸하는 투우, 킬러들에게서 가족을 지키려는 강 박사. 마침내 투우가 강 박사의 딸을 납치하고, 조각이 투우에게 총을 겨누며 생애 마지막 작업을 실행키로 결심하면서 소설은 절정으로 향한다. 읽는 내내 한 편의 액션 영화를 보는 듯 박진감과 긴장감이 넘치는 이 소설의 말미에서 조각과 투우가 벌이는 총격전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파과]는 내가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만 하는 이 지독하고 잔혹한 현실 속에서 어떤 기대도 소망도 없이, 오늘도 눈을 떴기 때문에, 그저 살아 있기 때문에, 기꺼이 살아내는 모든 것들에게 따뜻한 응원과 위로를 전한다.

한 자 한 자 혼신을 다한 문장들이 한 땀 한 땀 정성으로 피어나다
이번 리커버 작업은 이은정 자수 화가의 작품을 활용하여 박연미 디자이너가 새롭게 표현해냈다. 한 땀 한 땀 정성으로 피어난 아름다움은, 한 문장 한 문장 혼신을 다해 밀고 나가는 구병모 작가의 작품 세계와 닮아 있다. 이은정 자수 화가는 인생의 가장 소중한 ‘찰나의 순간’들을 모아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살아가면서 제일 반짝였던 순간들, 기억, 시간, 감정의 조각들을 통해 꿈속 공간, 꿈꾸는 공간을 그려내는 자수 작품들은 신비롭고 환상적인 구병모 월드를 그대로 재현해낸 듯하다. 표지에는 소설 속 주인공들의 가장 행복한 순간, 그 빛나고 아름다운 찰나를 담고자 했으며, 활짝 핀 꽃처럼, 누구나 한 번쯤 갖게 되는 빛나는 순간을 그려냈다. 형형색색의 식물과 꽃, 나무의 모습으로 주인공 조각이 살아온 삶을, 저마다 고요하지만 힘 있게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가는 이미지를 표현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자신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떠올려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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