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상세정보
Detail Information
트로피컬 나이트 = Tropical night : 조예은 소설집
저자
출판사
출판일
20220817
가격
₩ 15,000
ISBN
9791160408331
페이지
309 p.
판형
128 X 188 mm
커버
Book
책 소개
제2회 황금가지 타임리프 소설 공모전에서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로 우수상을, 제4회 교보문고 스토리 공모전에서 <시프트>로 대상을 수상한 후,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 <칵테일, 러브, 좀비> <스노볼 드라이브> 등을 펴내며 차곡차곡 독자들의 사랑을 쌓아온 조예은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총과 칼, 선혈과 비명 너머에 자리한 온기를 포착한 첫 단편집 <칵테일, 러브, 좀비>에 이어, 장편소설 <스노볼 드라이브>에서는 애틋하고도 경쾌한 디스토피아 세계를 선보인 바 있다. <트로피컬 나이트>는 조예은 특유의 독특한 판타지성을 가미한 호러·스릴러풍의 직설적이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사랑스러운 괴담 여덟 편을 담았다. 기존 작품에서 더 확장된 조예은 월드의 시작이라 할 만하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총천연색 마음으로 쓰인 소설집 <트로피컬 나이트>는 소름이 돋을 만큼 무서운데도 사랑과 다정함이 충만하다. 한여름의 트로피카나 스파클링 음료수처럼 짜릿하고 다채로운 이 이야기들은 올여름 더위에 지친 우리를 시원하게 위로해줄 것이다.
목차
할로우 키즈
고기와 석류
릴리의 손
새해엔 쿠스쿠스
가장 작은 신
나쁜 꿈과 함께
유니버설 캣숍의 비밀
푸른 머리칼의 살인마
작가의 말
고기와 석류
릴리의 손
새해엔 쿠스쿠스
가장 작은 신
나쁜 꿈과 함께
유니버설 캣숍의 비밀
푸른 머리칼의 살인마
작가의 말
본문발췌
P.11~12
영화 채널에서 종종 방영하던 영화 〈할로우맨〉을 기억하나요? 투명인간이 나오는 SF 스릴러요. 그 영화 같았어요. 교실의 누구도 저를 보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좋았죠. 말 그대로 사라지고 싶은 날이었잖아요. 평소에 못되게 굴던 아이에게 골탕을 먹이기도 하고, 자잘한 장난을 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점점 무서워지더군요. 아무도 저를 찾지 않았거든요. 이러다가 정말 영영 사라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울면서 집으로 갔습니다. 다행히 다음 날에는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어요. 아이들은 하루 동안 제가 없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짝꿍이 놀리는 건 여전했지만요. 네? 말도 안 된다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어린 시절이니, 언젠가 꾼 기묘한 꿈을 현실로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끔 생각이 납니다. 어른들도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순간들이 있잖아요. 아이들이라고 다를까요. 왜, 늘 집에 가고 싶다고 울잖아요. 그게 그 말이죠.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곳, 나를 상처 주지 않는 곳에 가고 싶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제 말은 사라진 재이 또한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입니다.
P.41
옥주는 자신이 언제든지 먹힐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자신이 키우는 건 말 안 듣는 손주나, 길고양이 같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석류가 자신을 먹어도 상관없다는 말이었다.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그랬다. 옥주는 아이러니하게도 언제 자신을 해칠지 모르는 석류 덕분에 두려움을, 공포를 덜어낼 수 있었다. 외롭게 혼자 죽음을 맞이하고 이불 속에서 썩어갈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석류를 키움으로써 자신은 혼자 죽지 않을 것이다. 썩지도 않을 것이다. 자신이 죽고, 더 이상 고기를 줄 사람이 없으면 눈앞의 양분인 자신을 붉은 눈의 석류가 먹어치울 것이다. 기왕이면 석류가 아주 깨끗이 자신을 발라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썩을 살점도 없을 만큼 깨끗이, 오랫동안 배고프지 않게 두고두고 발라 먹었으면 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 좀 더 나중의 일. 그런 미래를 위해서는 석류가 자신의 곁에서 버텨야만 했다.
P.92~93
“엄마도 어렸을 때 넘어온 편이라 그리 어렵지 않게 적응했다고 들었어. 딱히 크게 힘들어하지는 않았다고, 아빠 말로는 그래. 그런데 또 모르는 일이지. 아빠는 엄마가 아니고, 엄마가 되어본 적도 없으니까. (…) 엄마는 활발했어. 직장에서 친구도 많았고, 여기저기 잘 놀러 다니고, 배우고 싶은 게 있으면 바로 배워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어서 오히려 내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거든. (…) 그런데 엄마가 갑자기, 진짜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날들이 있었어. 그럴 땐 되게 난감해. 엄마도 자기가 왜 우는지 모르는데 그냥 막 눈물이 난대. 엄마도 모르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그냥 가만히 그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거지. 그럴 때면 엄마가 너무 낯설고…… 슬펐어.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 나는 엄마를 평생 완전히 이해할 수 없겠구나. 당연하잖아. 본인도 본인을 이해할 수 없게 되어버렸는데.”
P.104
릴리. 나는 아마도 세상을 만지는 시도를 할 거야. 동시에 내가 잃어버린, 떨어져 나간 나의 일부를 찾아 나설 거야.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 찾아 나서는 과정보다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더 길지도 몰라.
P.114
엄마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지금 저 모습이 엄마가 살아온 삶 자체일 테니까. 하지만 엄마와 나는 다르다. 나는 엄마의 삶을 살아본 적 없다. 엄마 역시 내 삶을 살아보지 않았다. 그 당연한 사실을 왜 받아들이지 못하지? 누구 하나 들르는 이 없는 원룸에서 홀로 순간과 감정을 곱씹다 보면 늘 같은 물음을 마주했다. 나는 왜 나를 괴롭게 한 그들보다도 엄마가 더 원망스러운 걸까. 나는 왜 엄마를 쉽게 용서할 수 없나. 그리고 문득 깨닫는 것이다. 애정과 배신감은 정비례한다는 걸. 또한 아직도 나는 엄마를 믿고 싶어 한다는 걸 말이다.
“나는 늘 누군가에게 복수하는 상상을 해.”
언젠가 연우 언니가 잔뜩 취해 중얼거린 말이 뇌리를 스쳤다. 언니가 사라지기 2년쯤 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복수. 누구를 향한 복수인지,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엄마가 말했지. 괴롭히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냐고. 맞다. 난 일부러 이러는 거다. 이건 엄마를 상처 입힌다는 점에서 복수와 비슷하다. 하지만 나는 엄마를 괴롭히려는 게 아니다. 단지 이해받고 싶을 뿐이다.
P.184~185
[수안아, 나 지우야. 너 미주랑 연락해? 아니라면 다행인데 걔 멀리하는 게 좋아. 걔 다단계야. 동창회 와서 애들 여럿 등쳐먹고 잠수 탔어. 너도 조심해.]
진동과 함께 도착한 재난 경보 문자가 지우의 메시지를 덮었다. 근방에서 먼지바람이 일고 있다는 경고음이 울렸다. 수안은 지우라는 이름의 지인이 보낸 메시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메시지는 그대로였다. 수안은 핸드폰을 노려봤다. 지우가 누구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워낙 흔한 이름이기도 하고 고등학교 동창 모두를 기억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쩌면 진짜 동창이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사실, 동창이 맞고 아니고는 중요하지 않다. 수안에게 이 메시지는 아무것도 아니다. 평소에는 까마득하게 잊고 살다가, 죄책감을 떨치기 위해 아무렇게나 보낸 문자 한 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등쳐먹기 위해서라도 매일 찾아오는 미주가 더 중요하다. 수안은 무표정으로 답장을 작성했다.
[알고 있으니까 신경 꺼.]
P.221~222
살아 있는 것은 부드럽고 말랑하며 따뜻하다. 그 부드럽고 말랑하고 따뜻한 피부가 나를 감싸자 죽을 것 같았다. 힘은 또 어찌나 센지 숨까지 막혔다. 온몸이 지글지글 타고 있었다. 이러다 정말 프레디 크루거가 되어버릴지도 몰라. 나는 은성에게 더 이상 해줄 말이 없었다. 나는 진짜 곰 인형이 아니라 곰 인형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배고픈 몽마다. 몽마로서의 역할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몽마. 몽마가 더 이상 나쁜 꿈을 불러오지 못하면 어떻게 되지?
P.249
체다가 쪼그려 앉은 나의 어깨를 위로하듯이 쓰다듬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감촉이었다. 그대로 체다를 안아 도망치고 싶었다. 고양이 별의 사정이고 뭐고, 그냥 나랑 살면 안 돼? 그런 질문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애써 참았다. 체다의 두 눈에는 어떤 책임감이 서려 있었다. 집 안에 나타난 바퀴벌레를 잡아줬을 때처럼 단단한 눈이었다. 나는 체다를 품에 꽉 안으며 말했다.
“언제든지 돌아와. 기다릴게.”
체다도 팔을 벌려서 내 목을 껴안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털북숭이 팔. 이 온기를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P.298
“문을 넘었고 많은 걸 보았어. 너를 죽게 하지 않을 거야. 나도 죽지 않을 거고.”
영화 채널에서 종종 방영하던 영화 〈할로우맨〉을 기억하나요? 투명인간이 나오는 SF 스릴러요. 그 영화 같았어요. 교실의 누구도 저를 보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좋았죠. 말 그대로 사라지고 싶은 날이었잖아요. 평소에 못되게 굴던 아이에게 골탕을 먹이기도 하고, 자잘한 장난을 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점점 무서워지더군요. 아무도 저를 찾지 않았거든요. 이러다가 정말 영영 사라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울면서 집으로 갔습니다. 다행히 다음 날에는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어요. 아이들은 하루 동안 제가 없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짝꿍이 놀리는 건 여전했지만요. 네? 말도 안 된다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어린 시절이니, 언젠가 꾼 기묘한 꿈을 현실로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끔 생각이 납니다. 어른들도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순간들이 있잖아요. 아이들이라고 다를까요. 왜, 늘 집에 가고 싶다고 울잖아요. 그게 그 말이죠.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곳, 나를 상처 주지 않는 곳에 가고 싶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제 말은 사라진 재이 또한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입니다.
P.41
옥주는 자신이 언제든지 먹힐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자신이 키우는 건 말 안 듣는 손주나, 길고양이 같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석류가 자신을 먹어도 상관없다는 말이었다.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그랬다. 옥주는 아이러니하게도 언제 자신을 해칠지 모르는 석류 덕분에 두려움을, 공포를 덜어낼 수 있었다. 외롭게 혼자 죽음을 맞이하고 이불 속에서 썩어갈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석류를 키움으로써 자신은 혼자 죽지 않을 것이다. 썩지도 않을 것이다. 자신이 죽고, 더 이상 고기를 줄 사람이 없으면 눈앞의 양분인 자신을 붉은 눈의 석류가 먹어치울 것이다. 기왕이면 석류가 아주 깨끗이 자신을 발라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썩을 살점도 없을 만큼 깨끗이, 오랫동안 배고프지 않게 두고두고 발라 먹었으면 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 좀 더 나중의 일. 그런 미래를 위해서는 석류가 자신의 곁에서 버텨야만 했다.
P.92~93
“엄마도 어렸을 때 넘어온 편이라 그리 어렵지 않게 적응했다고 들었어. 딱히 크게 힘들어하지는 않았다고, 아빠 말로는 그래. 그런데 또 모르는 일이지. 아빠는 엄마가 아니고, 엄마가 되어본 적도 없으니까. (…) 엄마는 활발했어. 직장에서 친구도 많았고, 여기저기 잘 놀러 다니고, 배우고 싶은 게 있으면 바로 배워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어서 오히려 내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거든. (…) 그런데 엄마가 갑자기, 진짜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날들이 있었어. 그럴 땐 되게 난감해. 엄마도 자기가 왜 우는지 모르는데 그냥 막 눈물이 난대. 엄마도 모르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그냥 가만히 그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거지. 그럴 때면 엄마가 너무 낯설고…… 슬펐어.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 나는 엄마를 평생 완전히 이해할 수 없겠구나. 당연하잖아. 본인도 본인을 이해할 수 없게 되어버렸는데.”
P.104
릴리. 나는 아마도 세상을 만지는 시도를 할 거야. 동시에 내가 잃어버린, 떨어져 나간 나의 일부를 찾아 나설 거야.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 찾아 나서는 과정보다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더 길지도 몰라.
P.114
엄마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지금 저 모습이 엄마가 살아온 삶 자체일 테니까. 하지만 엄마와 나는 다르다. 나는 엄마의 삶을 살아본 적 없다. 엄마 역시 내 삶을 살아보지 않았다. 그 당연한 사실을 왜 받아들이지 못하지? 누구 하나 들르는 이 없는 원룸에서 홀로 순간과 감정을 곱씹다 보면 늘 같은 물음을 마주했다. 나는 왜 나를 괴롭게 한 그들보다도 엄마가 더 원망스러운 걸까. 나는 왜 엄마를 쉽게 용서할 수 없나. 그리고 문득 깨닫는 것이다. 애정과 배신감은 정비례한다는 걸. 또한 아직도 나는 엄마를 믿고 싶어 한다는 걸 말이다.
“나는 늘 누군가에게 복수하는 상상을 해.”
언젠가 연우 언니가 잔뜩 취해 중얼거린 말이 뇌리를 스쳤다. 언니가 사라지기 2년쯤 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복수. 누구를 향한 복수인지,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엄마가 말했지. 괴롭히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냐고. 맞다. 난 일부러 이러는 거다. 이건 엄마를 상처 입힌다는 점에서 복수와 비슷하다. 하지만 나는 엄마를 괴롭히려는 게 아니다. 단지 이해받고 싶을 뿐이다.
P.184~185
[수안아, 나 지우야. 너 미주랑 연락해? 아니라면 다행인데 걔 멀리하는 게 좋아. 걔 다단계야. 동창회 와서 애들 여럿 등쳐먹고 잠수 탔어. 너도 조심해.]
진동과 함께 도착한 재난 경보 문자가 지우의 메시지를 덮었다. 근방에서 먼지바람이 일고 있다는 경고음이 울렸다. 수안은 지우라는 이름의 지인이 보낸 메시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메시지는 그대로였다. 수안은 핸드폰을 노려봤다. 지우가 누구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워낙 흔한 이름이기도 하고 고등학교 동창 모두를 기억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쩌면 진짜 동창이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사실, 동창이 맞고 아니고는 중요하지 않다. 수안에게 이 메시지는 아무것도 아니다. 평소에는 까마득하게 잊고 살다가, 죄책감을 떨치기 위해 아무렇게나 보낸 문자 한 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등쳐먹기 위해서라도 매일 찾아오는 미주가 더 중요하다. 수안은 무표정으로 답장을 작성했다.
[알고 있으니까 신경 꺼.]
P.221~222
살아 있는 것은 부드럽고 말랑하며 따뜻하다. 그 부드럽고 말랑하고 따뜻한 피부가 나를 감싸자 죽을 것 같았다. 힘은 또 어찌나 센지 숨까지 막혔다. 온몸이 지글지글 타고 있었다. 이러다 정말 프레디 크루거가 되어버릴지도 몰라. 나는 은성에게 더 이상 해줄 말이 없었다. 나는 진짜 곰 인형이 아니라 곰 인형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배고픈 몽마다. 몽마로서의 역할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몽마. 몽마가 더 이상 나쁜 꿈을 불러오지 못하면 어떻게 되지?
P.249
체다가 쪼그려 앉은 나의 어깨를 위로하듯이 쓰다듬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감촉이었다. 그대로 체다를 안아 도망치고 싶었다. 고양이 별의 사정이고 뭐고, 그냥 나랑 살면 안 돼? 그런 질문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애써 참았다. 체다의 두 눈에는 어떤 책임감이 서려 있었다. 집 안에 나타난 바퀴벌레를 잡아줬을 때처럼 단단한 눈이었다. 나는 체다를 품에 꽉 안으며 말했다.
“언제든지 돌아와. 기다릴게.”
체다도 팔을 벌려서 내 목을 껴안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털북숭이 팔. 이 온기를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P.298
“문을 넘었고 많은 걸 보았어. 너를 죽게 하지 않을 거야. 나도 죽지 않을 거고.”
저자소개
소설가. 제2회 황금가지 타임리프 공모전에서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로 우수상을, 제4회 교보문고 스토리 공모전에서 [시프트]로 대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칵테일, 러브, 좀비], 장편소설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 [스노볼 드라이브] 등이 있다.
서평
“이 괴이한 것을 어쩌자고 집 안에 들였을까.”
한여름 밤을 사르르 녹여줄 젤리소다 맛 괴담집
[칵테일, 러브, 좀비] [스노볼 드라이브]
한국 문학의 보석, 조예은 신작 소설
“널 등쳐먹어서 미안해.
넌 대부분 한심하고 가끔 사랑스럽지만 잘 살 거야.”
[트로피컬 나이트]는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이야기다. 수록작 〈고기와 석류〉를 예로 들면, 이렇다. 남편이 죽고 아들도 떠나 혼자 남은 노인이 있다. 노인은 어린아이의 얼굴을 한 괴물을 우연히 만나고, 괴물을 집 안에 들이고야 만다. 노인은 괴물에게 잡아먹히게 될까? 아니다. 조예은의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 그의 소설은 힘든 삶을 힘들다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공포를 보여주지만 공포가 우리의 삶을 갉아먹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어쨌든 삶은 계속되니까. 소설이 끝난 뒤에도 이야기는 이어지니까. 이야기가 계속되는 한 조예은의 인물들은 끝까지 살아내고 버틴다. 삶이 계속되는 한 조예은의 이야기는 반드시 밝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신작 소설 [트로피컬 나이트] 또한 그렇다.
[트로피컬 나이트]는 제2회 황금가지 타임리프 소설 공모전에서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로 우수상을, 제4회 교보문고 스토리 공모전에서 [시프트]로 대상을 수상한 후,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 [칵테일, 러브, 좀비] [스노볼 드라이브] 등을 펴내며 차곡차곡 독자들의 사랑을 쌓아온 조예은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총과 칼, 선혈과 비명 너머에 자리한 온기를 포착한 첫 단편집 [칵테일, 러브, 좀비]에 이어, 장편소설 [스노볼 드라이브]에서는 애틋하고도 경쾌한 디스토피아 세계를 선보인 바 있다. [트로피컬 나이트]는 조예은 특유의 독특한 판타지성을 가미한 호러/스릴러풍의 직설적이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사랑스러운 괴담 여덟 편을 담았다. 기존 작품에서 더 확장된 조예은 월드의 시작이라 할 만하다.
“아이들이라고 다를까요”, 〈할로우 키즈〉
한 유치원의 핼러윈 연극 공연 날에 ‘유령1’ 역을 맡은 아이가 사라진다. 유치원 교사는 사라진 아이에게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아이는 왜 사라졌을까? 〈할로우 키즈〉는 짧은 소설이지만 작은 괴담에서부터 계급에 의한 인간소외에 대한 이야기로까지 깊은 울림을 준다.
“이걸 어떻게 하지. 열대야가 심하니 얼어 죽지는 않을 테지만……”, 〈고기와 석류〉
남편이 죽고 아들도 떠나고, 이웃과 친구도 없이 혼자 남게 된 옥주는 장례식장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어느 날, 산발을 한 채 쓰레기통을 뒤지는 어린아이의 얼굴을 한 괴물을 만난다. 결국 옥주는 괴물을 집 안에 들이고 ‘석류’라고 부르며 돌보게 된다. 옥주와 석류의 기묘한 동거는 해피 엔딩으로 끝나게 될까? 옥주와 석류의 이야기는 고독사의 의미와 인간다운 죽음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그냥 가만히 그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거지”, 〈릴리의 손〉
이야기 하나. 연주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는다. 이름도, 나이도 기억하지 못한다. 사고 현장을 찾은 연주는 그곳에서 기계 손을 줍는다. 연주는 기계 손을 고치기 위해 전자상가를 찾아가는데……. 이야기 둘. 릴리와 연주는 시공간의 ‘틈’으로 들어온 이방인을 구조하고 돌보는 일을 한다. 어느 날, 긴급 호출을 받아 현장으로 출동한 둘의 발밑으로 갑자기 시공간의 ‘틈’이 벌어지는데……. 한 세상과 다른 세상, 한 차원과 다른 차원에서 살아가게 된 연주와 릴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소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사랑을 통해, 찾아 나서는 사랑이 아니라 기다리는 사랑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늘 누군가에게 복수하는 상상을 해”, 〈새해엔 쿠스쿠스〉
유리는 학교를 그만둔 채 모두와 연락을 끊고 집 안에 숨어 잠수를 탄다. 그런 유리를 설득하러 매일 엄마가 찾아온다.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엄마와의 실랑이가 계속되던 그때, 유리는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나는 모로코에 있어’라는 메시지를 받는다. ‘모로코. 사막과 쿠스쿠스.’ 메시지는 사촌인 연우 언니가 보낸 게 분명해 보인다. 유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결국 아무 메시지도 보내지 못한다. 하지만 연우 언니가 쿠스쿠스를 먹으러 가자고 했던 어느 날을 떠올리는데……. ‘유리’와 ‘연우’의 이야기를 통해 ‘여성’이라서, ‘자식’이라서 무시당하고 존중받지 못하던 일상의 폭력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널 등쳐먹어서 미안해”, 〈가장 작은 신〉
원인 불명의 급성 먼지바람으로 첫 대규모 사망자가 발생한 날,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수안은 그 뒤로 2년을 집 안에서만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수안에게 고교 동창 미주가 찾아온다. 다단계 회사에 다니는 미주의 흑심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자기도 모르게 점점 마음의 문을 여는 수안과, 처음의 나쁜 의도와는 다르게 영구 회원 가입 동의서만은 끝내 건네지 못한 채 죄책감에 시달리는 미주의 기묘한 만남이 아슬아슬하게 계속된다. 결국 미주는 수안에게 미안해, 라는 문자를 남긴 채 저조한 실적의 책임을 지고 야유회에 가게 되고, 연락이 두절된 미주를 찾아 수안은 2년여 만에 집 밖으로 나갈 결심을 한다. ‘먼지의 신’이 지배하는 디스토피아 세계에서 타인에 대한 편견에 갇힌 채 뿌연 삶을 이어가는 둘은, 잿빛 현재에서 희망이란 미래를 보게 될까? 수안은 미주를 구하게 될까?
“곰. 곰이야?”, 〈나쁜 꿈과 함께〉
‘나’는 몽마다. 인간들은 ‘나’를 통해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을 본다. 하지만 코를 골며 잠든 은성의 이불 위로 기어 올라간 ‘나’는, 눈알을 턱까지 늘어뜨린 채 목을 조르는 귀신도 아니고, 온몸에 화상을 입은 프레디 크루거도 아니고, 회칼을 든 살인마도 아니고, 거대한 괴물 개구리도 아닌, 핫초코를 떠올리게 하는 부드러운 갈색의 팔다리가 짧고 뭉툭한 곰 인형이 되고야 만다. 심지어 은성은 ‘나’를 와락 끌어안기까지 한다. 무시무시한 몽마인 ‘내’가 도대체 왜 ‘곰 인형’의 모습이 되고 말았을까? 공포와 불안의 기운만을 먹고 살았던 몽마는 은성을 만나면서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되는데…….
“제가 고양이를 잃어버렸는데요. 혹시 이렇게 생긴 고양이 보신 적 없나요?”, 〈유니버설 캣숍의 비밀〉
어느 날부터 고양이들이 집에서, 침대에서, 소파에서 사라지기 시작한다. 은하도 체다를 그렇게 잃었다. 고양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고양이 별로 돌아갔을까? 기발한 상상으로 그려낸 인간과 고양이의 이야기를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을 따스하게 그린다.
“만약 금지된 문이 나타난다면 여세요. 그게 당신이 살길입니다”, 〈푸른 머리칼의 살인마〉
어느 날, 젊은 영주가 머리에 도끼가 박혀 살해된 채로 발견된다. 유력한 용의자는 영주의 부인인 블루. “아이는 파도를 닮은 푸른 곱슬머리와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아름답게 자랄 것이오. 많은 이에게 사랑을 받으며 크겠지만 끔찍한 외로움이 아이를 기다리고 있소. 결국 무수한 피를 손에 묻히게 될 것이오. 남편의 목을 베고 구천을 떠돌 것이외다.” 한 노파의 저주를 받으며 태어났지만, 금지된 문을 열고 끔찍한 진실과 미래를 목격하면서 진짜 자신의 인생을 살기 시작한 블루의 잔인하고 슬프지만 아름다운 동화 같은 이야기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총천연색 마음으로 쓰인 한여름 밤의 젤리소다 맛 괴담집
[트로피컬 나이트] 속 정체불명의 주인공들은(괴물, 악마, 살인마, 외계 생명, 유령 등) 공포와 긴장감을 유발하는 소재에 그치지 않는다. 어엿한 ‘이야기의 주체’로서 등장한다. 인간의 곁에서 연민을 느끼고(〈고기와 석류〉 〈나쁜 꿈과 함께〉 〈유니버설 캣숍의 비밀〉), 비참하게 살해당한 이들을 위해 기꺼이 살인마가 된다(〈푸른 머리칼의 살인마〉). 소설 속 ‘인간’들 또한 희생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닌 극복하고 성장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시도 때도 없이 먼지바람이 몰아치거나 시공간을 넘나드는 싱크홀이 생겨나는 세상에서도 사랑과 우정을 포기하지 않고(〈가장 작은 신〉 〈릴리의 손〉), 공포에 가까운 공허에 사로잡힐지언정 아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는다(〈할로우 키즈〉).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총천연색 마음으로 쓰인 소설집 [트로피컬 나이트]는 소름이 돋을 만큼 무서운데도 사랑과 다정함이 충만하다. 한여름의 트로피카나 스파클링 음료수처럼 짜릿하고 다채로운 이 이야기들은 올여름 더위에 지친 우리를 시원하게 위로해줄 것이다.
나는 오늘도 그의 침대에 악몽을 가져가겠지. 배를 채워야 하니 어쩔 수 없다. 오늘 밤, 또다시 그에게 가위를 걸고 꿈의 언어를 속삭여 제일 피하고 싶은 것을 보도록 하겠지. 어제와 같이 누더기로 변하는 곰 인형일 수도, 결국 다른 직원을 구했다고 말하는 카페 매니저일 수도, 집세를 달라고 재촉하는 집주인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예상보다 많이 찍힌 가스비 고지서로 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왕이면 어제와 같이 곰 인형이었으면 좋겠다. 더 누더기여도 좋고 다른 인형이어도 되니 최대한 불쌍하고 귀여웠으면 좋겠다. 오늘은 가위를 일부러 걸 것이다. _본문에서
한여름 밤을 사르르 녹여줄 젤리소다 맛 괴담집
[칵테일, 러브, 좀비] [스노볼 드라이브]
한국 문학의 보석, 조예은 신작 소설
“널 등쳐먹어서 미안해.
넌 대부분 한심하고 가끔 사랑스럽지만 잘 살 거야.”
[트로피컬 나이트]는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이야기다. 수록작 〈고기와 석류〉를 예로 들면, 이렇다. 남편이 죽고 아들도 떠나 혼자 남은 노인이 있다. 노인은 어린아이의 얼굴을 한 괴물을 우연히 만나고, 괴물을 집 안에 들이고야 만다. 노인은 괴물에게 잡아먹히게 될까? 아니다. 조예은의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 그의 소설은 힘든 삶을 힘들다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공포를 보여주지만 공포가 우리의 삶을 갉아먹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어쨌든 삶은 계속되니까. 소설이 끝난 뒤에도 이야기는 이어지니까. 이야기가 계속되는 한 조예은의 인물들은 끝까지 살아내고 버틴다. 삶이 계속되는 한 조예은의 이야기는 반드시 밝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신작 소설 [트로피컬 나이트] 또한 그렇다.
[트로피컬 나이트]는 제2회 황금가지 타임리프 소설 공모전에서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로 우수상을, 제4회 교보문고 스토리 공모전에서 [시프트]로 대상을 수상한 후,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 [칵테일, 러브, 좀비] [스노볼 드라이브] 등을 펴내며 차곡차곡 독자들의 사랑을 쌓아온 조예은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총과 칼, 선혈과 비명 너머에 자리한 온기를 포착한 첫 단편집 [칵테일, 러브, 좀비]에 이어, 장편소설 [스노볼 드라이브]에서는 애틋하고도 경쾌한 디스토피아 세계를 선보인 바 있다. [트로피컬 나이트]는 조예은 특유의 독특한 판타지성을 가미한 호러/스릴러풍의 직설적이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사랑스러운 괴담 여덟 편을 담았다. 기존 작품에서 더 확장된 조예은 월드의 시작이라 할 만하다.
“아이들이라고 다를까요”, 〈할로우 키즈〉
한 유치원의 핼러윈 연극 공연 날에 ‘유령1’ 역을 맡은 아이가 사라진다. 유치원 교사는 사라진 아이에게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아이는 왜 사라졌을까? 〈할로우 키즈〉는 짧은 소설이지만 작은 괴담에서부터 계급에 의한 인간소외에 대한 이야기로까지 깊은 울림을 준다.
“이걸 어떻게 하지. 열대야가 심하니 얼어 죽지는 않을 테지만……”, 〈고기와 석류〉
남편이 죽고 아들도 떠나고, 이웃과 친구도 없이 혼자 남게 된 옥주는 장례식장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어느 날, 산발을 한 채 쓰레기통을 뒤지는 어린아이의 얼굴을 한 괴물을 만난다. 결국 옥주는 괴물을 집 안에 들이고 ‘석류’라고 부르며 돌보게 된다. 옥주와 석류의 기묘한 동거는 해피 엔딩으로 끝나게 될까? 옥주와 석류의 이야기는 고독사의 의미와 인간다운 죽음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그냥 가만히 그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거지”, 〈릴리의 손〉
이야기 하나. 연주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는다. 이름도, 나이도 기억하지 못한다. 사고 현장을 찾은 연주는 그곳에서 기계 손을 줍는다. 연주는 기계 손을 고치기 위해 전자상가를 찾아가는데……. 이야기 둘. 릴리와 연주는 시공간의 ‘틈’으로 들어온 이방인을 구조하고 돌보는 일을 한다. 어느 날, 긴급 호출을 받아 현장으로 출동한 둘의 발밑으로 갑자기 시공간의 ‘틈’이 벌어지는데……. 한 세상과 다른 세상, 한 차원과 다른 차원에서 살아가게 된 연주와 릴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소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사랑을 통해, 찾아 나서는 사랑이 아니라 기다리는 사랑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늘 누군가에게 복수하는 상상을 해”, 〈새해엔 쿠스쿠스〉
유리는 학교를 그만둔 채 모두와 연락을 끊고 집 안에 숨어 잠수를 탄다. 그런 유리를 설득하러 매일 엄마가 찾아온다.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엄마와의 실랑이가 계속되던 그때, 유리는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나는 모로코에 있어’라는 메시지를 받는다. ‘모로코. 사막과 쿠스쿠스.’ 메시지는 사촌인 연우 언니가 보낸 게 분명해 보인다. 유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결국 아무 메시지도 보내지 못한다. 하지만 연우 언니가 쿠스쿠스를 먹으러 가자고 했던 어느 날을 떠올리는데……. ‘유리’와 ‘연우’의 이야기를 통해 ‘여성’이라서, ‘자식’이라서 무시당하고 존중받지 못하던 일상의 폭력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널 등쳐먹어서 미안해”, 〈가장 작은 신〉
원인 불명의 급성 먼지바람으로 첫 대규모 사망자가 발생한 날,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수안은 그 뒤로 2년을 집 안에서만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수안에게 고교 동창 미주가 찾아온다. 다단계 회사에 다니는 미주의 흑심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자기도 모르게 점점 마음의 문을 여는 수안과, 처음의 나쁜 의도와는 다르게 영구 회원 가입 동의서만은 끝내 건네지 못한 채 죄책감에 시달리는 미주의 기묘한 만남이 아슬아슬하게 계속된다. 결국 미주는 수안에게 미안해, 라는 문자를 남긴 채 저조한 실적의 책임을 지고 야유회에 가게 되고, 연락이 두절된 미주를 찾아 수안은 2년여 만에 집 밖으로 나갈 결심을 한다. ‘먼지의 신’이 지배하는 디스토피아 세계에서 타인에 대한 편견에 갇힌 채 뿌연 삶을 이어가는 둘은, 잿빛 현재에서 희망이란 미래를 보게 될까? 수안은 미주를 구하게 될까?
“곰. 곰이야?”, 〈나쁜 꿈과 함께〉
‘나’는 몽마다. 인간들은 ‘나’를 통해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을 본다. 하지만 코를 골며 잠든 은성의 이불 위로 기어 올라간 ‘나’는, 눈알을 턱까지 늘어뜨린 채 목을 조르는 귀신도 아니고, 온몸에 화상을 입은 프레디 크루거도 아니고, 회칼을 든 살인마도 아니고, 거대한 괴물 개구리도 아닌, 핫초코를 떠올리게 하는 부드러운 갈색의 팔다리가 짧고 뭉툭한 곰 인형이 되고야 만다. 심지어 은성은 ‘나’를 와락 끌어안기까지 한다. 무시무시한 몽마인 ‘내’가 도대체 왜 ‘곰 인형’의 모습이 되고 말았을까? 공포와 불안의 기운만을 먹고 살았던 몽마는 은성을 만나면서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되는데…….
“제가 고양이를 잃어버렸는데요. 혹시 이렇게 생긴 고양이 보신 적 없나요?”, 〈유니버설 캣숍의 비밀〉
어느 날부터 고양이들이 집에서, 침대에서, 소파에서 사라지기 시작한다. 은하도 체다를 그렇게 잃었다. 고양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고양이 별로 돌아갔을까? 기발한 상상으로 그려낸 인간과 고양이의 이야기를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을 따스하게 그린다.
“만약 금지된 문이 나타난다면 여세요. 그게 당신이 살길입니다”, 〈푸른 머리칼의 살인마〉
어느 날, 젊은 영주가 머리에 도끼가 박혀 살해된 채로 발견된다. 유력한 용의자는 영주의 부인인 블루. “아이는 파도를 닮은 푸른 곱슬머리와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아름답게 자랄 것이오. 많은 이에게 사랑을 받으며 크겠지만 끔찍한 외로움이 아이를 기다리고 있소. 결국 무수한 피를 손에 묻히게 될 것이오. 남편의 목을 베고 구천을 떠돌 것이외다.” 한 노파의 저주를 받으며 태어났지만, 금지된 문을 열고 끔찍한 진실과 미래를 목격하면서 진짜 자신의 인생을 살기 시작한 블루의 잔인하고 슬프지만 아름다운 동화 같은 이야기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총천연색 마음으로 쓰인 한여름 밤의 젤리소다 맛 괴담집
[트로피컬 나이트] 속 정체불명의 주인공들은(괴물, 악마, 살인마, 외계 생명, 유령 등) 공포와 긴장감을 유발하는 소재에 그치지 않는다. 어엿한 ‘이야기의 주체’로서 등장한다. 인간의 곁에서 연민을 느끼고(〈고기와 석류〉 〈나쁜 꿈과 함께〉 〈유니버설 캣숍의 비밀〉), 비참하게 살해당한 이들을 위해 기꺼이 살인마가 된다(〈푸른 머리칼의 살인마〉). 소설 속 ‘인간’들 또한 희생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닌 극복하고 성장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시도 때도 없이 먼지바람이 몰아치거나 시공간을 넘나드는 싱크홀이 생겨나는 세상에서도 사랑과 우정을 포기하지 않고(〈가장 작은 신〉 〈릴리의 손〉), 공포에 가까운 공허에 사로잡힐지언정 아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는다(〈할로우 키즈〉).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총천연색 마음으로 쓰인 소설집 [트로피컬 나이트]는 소름이 돋을 만큼 무서운데도 사랑과 다정함이 충만하다. 한여름의 트로피카나 스파클링 음료수처럼 짜릿하고 다채로운 이 이야기들은 올여름 더위에 지친 우리를 시원하게 위로해줄 것이다.
나는 오늘도 그의 침대에 악몽을 가져가겠지. 배를 채워야 하니 어쩔 수 없다. 오늘 밤, 또다시 그에게 가위를 걸고 꿈의 언어를 속삭여 제일 피하고 싶은 것을 보도록 하겠지. 어제와 같이 누더기로 변하는 곰 인형일 수도, 결국 다른 직원을 구했다고 말하는 카페 매니저일 수도, 집세를 달라고 재촉하는 집주인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예상보다 많이 찍힌 가스비 고지서로 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왕이면 어제와 같이 곰 인형이었으면 좋겠다. 더 누더기여도 좋고 다른 인형이어도 되니 최대한 불쌍하고 귀여웠으면 좋겠다. 오늘은 가위를 일부러 걸 것이다. _본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