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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인문학이란 무엇인가  = Medical humanities : 의학과 인문학의 경계 넘기
저자 황임경
출판사 동아시아
출판일 20211217
가격 ₩ 25,000
ISBN 9788962624038
페이지 515 p.
판형 152 X 223 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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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박물관에 전시된 수많은 화석을 보면 지구의 나이가 약 6000살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은 재고할 필요가 없는 헛소리인 것 같다. 그런데 화석의 정체에 대해 알지 못했던 옛날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1670년 시칠리아에 살던 학자이자 화가인 아고스티노 실라는 시칠리아섬과 그와 인접한 이탈리아 지방에서 수집한 조개껍질을 설명하는 책을 펴냈다. 그는 그 물건들이 한때 정말로 살아 있던 조개의 껍질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그에 반대하는 많은 사람은 조개 모양의 화석이 유기물과 단순한 유사성을 지닌 대상이라고 여겼다. 형태상 유기물과 유사한 무기물도 있지만, 유사한 형태를 가졌다고 해서 반드시 유기체에서 유래했으리라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은 결과적으로 다양한 종류와 형태의 화석이 발견되면서, 살아 있는 유기체로부터 화석이 형성되었다는 합의에 다다른다. 화석의 존재는 다양한 사실을 시사하는데, 예컨대 지금은 사막인 지역이 예전에는 바다였다거나, 지금은 살아 있지 않은 생물이 예전에 살았을 것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균일과 격변에 관한 논쟁도 흥미롭다. 지질학의 창시자라고도 불리는 찰스 라이엘은 일종의 정상 상태 이론을 옹호했다. 그 이유는 그가 현 원인, 즉 현재의 지질 작용이 아득히 긴 시간 동안 작용한다면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즉, 지금 작용하는 원인을 제외한 어떠한 원인도 과거에 작용한 바 없다는 원리를 내세우고, 이 원칙에 따라 지질학을 구성할 수 있으리라 믿은 것이다. 이에 따르면 지구의 역사에서는 한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경향도, 이례적인 격변도 없다. 반대로 격변론자는 지구와 생명의 역사에 자신들이 ‘혁명’이나 ‘격변’이라 부르는 갑작스러운 자연현상이 개입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 두 주장은 언뜻 보면 격렬하게 대립하는 듯하지만, 모두 현재론이라고 불리는, 즉 현재를 통해 과거를 이해하려는 신조를 다른 방식으로 적용한 결과였다. ‘현재’의 작용이 현재의 강도로 일어났을 때 먼 과거에 있던 모든 일을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는지에서만 차이가 있었다. 이 책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이런 논쟁과 입장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이는 과학이 발전하는 방식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어떠한 결정적인 발견이 곧바로 과학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참 지나고 나서는 그 발견의 의미가 명확해지지만, 그 당시에 발견 자체는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이론과 입장이 경합하고 서로를 보완하면서 과학은 발전한다. 때로는 예전에 폐기되었던 이론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이 책에서는 하나의 과학이 생겨나고 성숙하는 모습을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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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책을 펴내며 4
들어가며 12

1부 의료인문학이란 무엇인가

1장 의학+인문학=의료인문학?
1. 의료인문학은 언제, 왜, 어떻게 탄생했는가?
2. 한국의 의료인문학
3. 그렇다면 의료인문학이란 무엇인가?
4. 의료인문학의 목표와 앎의 방식

2장 인문학으로 본 의학
5. 의과대학생이 역사를 배우는 까닭은? _의학과 역사
6. 좋은 의사는 또한 철학자이다 _의학과 철학
7. 누구를 먼저 살릴 것인가? _의학과 윤리
8. 질병은 이야기를 낳는다 _의학과 문학
9. 병든 몸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_의학과 예술
10. 탈모는 질병이다!? _의학과 과학기술학

2부 의학 속의 인문학

1장 증상과 징후
11. 열은 증상일까, 징후일까?
12. 몸과 기호를 통해 본 증상과 징후
13. 통증과 고통

2장 질병
14. 성스러운 병에서 세속적인 병으로
15. 철학으로 본 질병
16. 질병의 의미론과 이야기
17. 재현과 은유로서의 질병

3장 진단
18. 진단의 기예에서 진단의 과학으로
19. 의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20. 의사는 무엇을 느끼는가?
21. 분류와 차이의 정치학

4장 치료 334
22. 약물과 수술의 역사
23. 의학의 불확실성과 임상적 의사 결정의 역설
24. 플라세보와 관계의 힘
25. 치료를 둘러싼 생명과학기술과 지식의 정치
26. 환자-의사 관계의 수수께끼

5장 치료 너머
27. 예후가 중요한 이유
28. 아프면서 행복할 수 있을까?
29. 노화라는 질병
30. 투병기를 통해 본 죽음

나오며 _다시, 의료인문학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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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발췌
P.9
앞서 언급한 기원전 4004년이란 악명 높은 연도는 계몽된 이성의 진보에 저항하는 교회의 억압적 반계몽주의를 상징하는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과학Science과 종교Religion, 교회Church와 이성Reason 같은 딱지(보통 단수이고 첫 글자를 대문자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를 붙이는 일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야 한다. 진짜 역사는 그렇게 추상적이지도, 깔끔하지도 않다. 사실 과학과 종교가 끊임없이 갈등한다는 고정관념은 그런 갈등의 예로 언급되는 사건들을 면밀히 연구한 역사가들에 의해 폐기된 지 오래됐다.
_ ‘서론’ 중에서

P.29
어셔의 증거에서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다른 연대학자와 마찬가지로 성서가 아니라 고대의 세속 기록에서 끌어온 증거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셔의 전거는 기원전에서도 최근에 가까운 시대에 대한 것일수록 풍부했고, 먼 과거로 가면 갈수록 그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초창기에 대한 자료는 매우 빈약했고, 고작해야 인류의 초기 세대에 ‘누가 누구를 낳았더라’라는 창세기의 기록이 전부인 경우가 많았다. 이 점을 보면 어셔의 주요 목표가 세계에 대해 상세한 역사를 한데 엮는 것이었지 본래부터 천지창조의 연도를 확정하거나 전반적으로 성서의 권위를 드높이려던 것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_ ‘1. 과학이 된 역사’ 중에서

P.72
예를 들어 그는 진기한 물건을 수집하는 사람들이 매우 귀중한 것으로 평가했던 다양한 모습의 아름다운 ‘암모나이트’를 두고 논쟁을 벌여야 했는데, 암모나이트는 당시 알려진 어떤 조개의 껍질과도 닮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동식물에 대해 아는 바가 매우 적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화석으로만 알려진 조개일지라도 언젠가는 살아 있는 채로 발견되리라 예상하는 편이 사리에 맞다고 여겼다. 장거리 항해나 탐험이 이루어질 때면 처음 보는 새로운 형체의 물건이 유럽에 여럿 유입되었다. 후크는 그게 아니라면 마치 품종 개량으로 새로운 가축 품종이 나타나듯이 어떤 종은 시간이 흐르며 형상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이 부분에서 그의 생각은 진화에 대한 후대의 생각과 비슷하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_ ‘2. 자연 고유의 고대품’ 중에서

P.127
많은 자연사학자가 현지 조사를 수행한 주된 이유는 자신의 과학적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현실적 이유가 있었다. 18세기 후반 유럽의 각국 정부는 급격히 성장하는 광업에 필요한 과학 인력을 훈련하기 위해 광업 전문학교를 창설했는데, 현지 조사는 이런 시류를 반영했다(영국은 예외였다. 영국은 광업 전체를 민간사업으로 남겨두었다). 어느 특정한 지역에서 새 광물 자원을 발견하고 채굴하려면 암석의 지하 구조를 조사하여 기술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는 채석장을 새롭게 개장하고 광산을 개발하기 위해 수직 갱도를 굴착할 때 지침으로 삼을 수 있었다. 이런 식의 상세한 3차원 조사는 새로운 광물학 분야를 낳았으니, 이 분야는 ‘지구에 대한 앎(Earth-knowledge)’을 뜻하는 ‘지구구조학(geognosy)’이라 불렸다(‘geognosy’의 어원만 놓고 보면 ‘지구학’이라 옮기는 편이 한결 어울리지만, ‘geognosy’가 현재 지구구조학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고 당시의 활동을 따져보더라도 지구구조학이란 단어가 이해에 크게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지구구조학으로 통일해서 번역했다. ― 옮긴이).
_ ‘4. 시간과 역사의 확장’ 중에서

P.263
빙하 이론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을 담고 있었던지라 앞서 지질학계가 도달한 합의를 흔들어놓았다. 지구가 오랜 역사를 거치며 점진적으로 서서히 식어왔다고 생각한 지질학자 대다수는 물론이고, 지구가 거의 변함없이 정상 상태를 줄곧 유지해왔다고 생각한 라이엘에게도 빙하 이론은 예상 밖이었다. 지구가 지질학적 시간으로 보았을 때 최근에 짧은 혹한기를 겪었다가 다시 따뜻해졌다는 연구 결과를 예견한 지질학자은 아무도 없었다. 빙하 이론이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굳이 따지자면 격변론자들이었다. 빙하 이론은 격변론자들이 늘 강조하던 대로 지구의 과거사가 철저히 우연에 좌우되며 사후에 되짚어보더라도 예측하기 어렵다는 뿌리 깊은 직관을 북돋웠기 때문이었다.
_ ‘7. 흔들리는 합의’ 중에서

P.290
다윈은 과학계에 지질학자로 처음 이름을 알렸다. 그는 라이엘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으며, 나중에 유명세를 떨치게 되는 비글호 항해를 할 때도 라이엘의 『원리』를 지참했다(그는 비글호의 비공식 자연사학자였으며 남아메리카 해안선의 공식 수로를 측량할 때 선장의 말벗 역할을 했지만, 육지에서도 그에 못지않게 긴 시간을 보냈다). 그는 항해 전에 세지윅에게 지질학 현지 조사에 대해 잠깐 배운 적이 있었다. 다윈은 항해에서 돌아와 지질학회의 정회원이 되었고, 약혼자에게 자신을 “지질학자인 저는”이라고 소개했으며 항해를 하면서 현장에서 목격한 내용을 바탕으로 이후 몇 년 동안 지질학 논문과 책을 저술하고 발표하는 데 몰두했다. 그러나 다윈은 이와 동시에 남몰래 진화 이론을 전개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이 앞서 제시한 이론보다 상세한 증거로 뒷받침하지 않으면 폭넓은 대중은 고사하고 ‘과학지식인’도 자신의 이론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_ ‘8. 자연사 속의 인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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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한림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영상의학전문의가 되었다. 전문의 생활을 하면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인문의학교실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제주대학교 의과대학 의료인문학교실에 재직 중이다. 의철학, 의료인문학, 서사의학 등을 연구하고 가르쳐 왔으며, 최근에는 서사, 취약성,돌봄, 정의, 면역 등을 주제로 학제적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의학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비친 인간과 사회를 탐구하는 일을 죽는 순간까지 할 수 있길 바라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Body Talk in the Medical Humanities: Whose Language?](공저), [21세기 청소년 인문학 2](공저), [의학의 전환과 근대병원의 탄생](공저), [내러티브 연구의 현황과 전망](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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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의사는 원래 치유자이자 인문학자였다
첨단 의료, 삶의 의료화 시대에 의학의 기본을 다시 생각하다

‘의료인문학’이라는 단어는 여러 사람에게 생소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의학’은 무엇보다 ‘과학’에 기반을 두고 임상 활동을 하는 학문이지 ‘인문학’이 들어갈 여지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의학의 역사를 조금만 따라가 보면 의학과 인문학이 얼마나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고대부터 의학과 인문학의 관련성은 강조되었다. 고대 그리스 의사들에게는 진료 능력 못지않게 진단이나 예후를 환자나 대중에게 설명하고 치료법을 설득하는 웅변술이 요구되었고 증상에 관해 환자가 하는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이를 정리하여 납득할 만한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는 서사적 능력도 필수였다. 중세 시대에 대학에서 의학부가 생겨 근대적인 의학 교육이 체계를 잡아갈 때도 교양 과목을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했는데, 이는 예과와 본과로 나누어져 있는 오늘날의 의학 교육 체제에까지 그 기본 정신이 지속되고 있다.
의학이 과학의 방법론과 성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인문학과 거리가 생긴 것은 19세기 이후였다. 이 시기부터 윌리엄 오슬러, 에이브러햄 플렉스너 등은 의학에서 휴머니즘의 전통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960년대 들어 의료기술이 발전하면서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도덕적·사회적 문제들이 발생했다. 혈액 투석기와 같은 새로운 의료기술을 누구에게 먼저 배분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으며, 심장 이식이 성공함에 따라 심폐사 중심의 전통적인 죽음 관념에도 변화가 필요해졌다. 시민들이 권리 의식에 각성하면서 의료에서의 권리, 즉 건강권과 환자의 자기 결정권이 주목받고 상대적으로 의사의 권위는 약화되었다. 또한 병원이 점점 비대해지고 영리를 추구하게 되면서 관료적인 체제로 발전해 갔고 환자들은 돌봄의 대상보다는 치료의 대상이나 고객으로 바뀌어 갔다. 만성질환을 앓으면서 오래 사는 환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질병 치료에만 중점을 두고 질병을 앓는 환자의 ‘삶의 질’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현대의학의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도 증가하게 된다. 이 모든 도덕적·사회적 이슈들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과학으로서의 의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서구 사회는 의료계에 인간적인 의료와 함께 사회적 책임을 다할 것을 요구했으며, 그에 따라 의료계에서는 인문학을 도입하여 의학 교육과 임상 의료를 개혁함으로써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에 대처했다. 그 과정에서 의학의 인간적인 면을 보강하여 의료의 질을 향상하자는 생명의료윤리와 근대적 의미의 의료인문학이 탄생하게 된다.

의학과 인문학은 어떻게 연결되나?
역사, 철학, 윤리, 문학, 예술 그리고 의학

그렇다면 의료인문학이란 무엇일까? 의료인문학의 정의나 개념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비판을 살펴보면 대개 두 가지 특정한 사유의 틀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의학과 인문학의 이항대립 구도에서 의료인문학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며, 둘째, 의료인문학의 개념이 대부분 ‘인간적인 의료’라는 규범적 관점에서 논의된다는 점이다. 이 책의 주장에 따르면 의료인문학의 개념과 성격은 의학과 인문학이라는 이항 대립에서 벗어난 지점에서 새롭게 사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의료인문학의 시작이 교육적 목적이건 학문적 목적이건 상관없이, 그것이 전개되고 상호작용 하는 과정에서 의학과 인문학은 모두 일정한 변화 혹은 변형을 겪게 되고, 결국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태생적으로 경계에 위치하며 끊임없이 양쪽을 횡단하고 사유와 실천을 진행해야 하는 유동적인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의료인문학의 개념은 기존의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 매우 느슨하게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의료인문학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의학과 인문학이 만나는 지점들을 포괄한다. 예를 들어서 의료는 구체적인 질병을 치료하는 실천적인 활동이지만, 그 과정에서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철학적인 활동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의학에서 철학적인 논의를 해야 할 필요성이 발생한다. 지난 40년간 건강과 질병이라는 개념은 가장 많이 논의되었는데, ‘질병이 없는 상태가 곧 건강’이라는 기존 의료계의 정의가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규범주의 입장에 따르면 건강과 질병 개념에는 항상 개인적·사회적 가치판단이 개입되어 있다고 보고 건강은 단순히 질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인간이 추구해야 할 그 무엇이라 본다. 반면 자연주의 입장에서는 질병이 사회의 가치와는 무관한 생물학적 현상이며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라 본다. 건강과 질병에 관하여 철학적으로 어떤 입장에 서느냐 하는 문제는 결국 건강과 질병에 관해 특정한 시각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미시적인 환자-의사 관계부터 거시적으로는 국가의 의료제도나 정책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철학뿐 아니라 역사, 윤리, 문학, 예술, 과학기술학 등이 의학과 관련을 맺고 있고 어떤 방식으로든 의료 활동이나 의학 교육에서 실천적으로 쓰이고 있다. ‘누구를 살릴 것인가’로 대표되는 의료윤리의 영역은 이미 많은 미디어에서 다루면서 대중에게도 친숙해졌고, 서사의학이나 퍼포먼스의학처럼 문학이나 예술이 의학과 접목되는 사례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증상의 발현에서 치료 너머까지
임상의 각 단계에서 만날 수 있는 실천으로서의 의료인문학

이 책의 1부에서는 의료인문학이 무엇인지, 의학과 각 분과 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이 어떻게 교차하는지를 다룬다면, 2부에서는 증상과 징후, 질병, 진단, 치료, 치료 너머라는 각 단계에서 의료인문학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다룬다.
증상과 징후의 차이점을 생각해보자. 전 세계의 모든 의사들은 증상은 주관적인 것, 징후는 객관적이라고 보고 배우는데, 정말 그러할까? 18세기까지만 해도 서양의학에서의 증상은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지 않은 관찰된 현상을 의미했고, 그것이 이성적 사고 및 추론을 거쳐서 처음 지각될 당시에는 알 수 없었던 특정한 결론이 도출되었을 때 비로소 징후가 되었다. 오늘날처럼 증상은 주관적인 것, 징후는 객관적인 것이라는 의미로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았으며, 단지 감각의 대상이냐 추론의 대상이냐에 따른 구분만이 존재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타진법과 청진법, 엑스선, 심전도 등의 진단기술과 기기가 임상에 적용되면서 증상과 징후의 의미는 변하게 된다. 검사 기법이 발전하면서 검사 결과를 해석할 수 있는 지식이 늘어나고 그것을 의사가 독점하게 되면서 점차 징후는 의사가 환자에게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행해서 얻어내야 하는 것으로 바뀌어 갔다. 기침하는 환자의 가슴을 두드려 본다든지 청진기를 대본다든지 하는 특정한 의료 행위를 통해 의사만이 만들어 내고 해석할 수 있는 정보가 양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기존의 증상과 징후는 의사만이 알 수 있는 새로운 정보와 환자와 의사 모두가 알 수 있는 정보로 재편되었고, 점차 전자는 징후, 후자는 증상으로 불리게 되었다. 현대의학에서 엄격하게 구분하는 증상과 징후의 의미는 엄밀히 말하면 19세기 이후 서양의학의 유산이다.
이 책에서는 이런 식으로 임상 각 단계의 의미와 적용에서 어떤 문제가 나타나는지, 어떻게 더 나은 방식으로 개선할 수 있을지에 관해 인문학적 입장을 제시한다. 의사들이 실제로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면서 겪을 수 있는 다양한 문제적 상황들을 살펴보면서, 누군가는 그러한 문제를 먼저 겪고 고민했음을 기록하기도 한다. 현대 의료 체계에서는 질병과 그 질병을 겪는 인간을 나누고, 질병만 치료하려다가 생기는 문제도 많다. 의료인문학에서는 포괄적인 입장과 시선에서 의학과 의사, 환자, 그리고 인간을 조망하면서 더 나은 의학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모든 것을 대체하는 시대
인간적인 과학, 경험적인 예술, 과학적인 인문학을 추구하다

고대 의학을 집대성했으며 의학의 선구자라고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는 의학의 인본적 태도를 요구했다. 의료적 역량을 갖추고 나서 환자를 돌보며, 자유인과 노예를 차별하지 않고, 상처 입은 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을 말하는 의사에게 필요한 덕목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서양 의학의 기본적인 정신이었다.
하지만 19세기 이후 과학의 진보와 더불어 의학의 휴머니즘은 변화하기 시작한다. 의사의 과학적 임상 능력이 강조된 것이다. 나날이 새로워지는 진단법과 치료술에 능숙하지 못한 의사라면 환자에게 해를 끼칠 것이 분명하므로 무엇보다도 의사의 과학적 임상 역량이 휴머니즘의 중심부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실력 있는 의사인가, 인간미 있는 의사인가’의 이분법도 이런 변화의 산물이다.
이 시기에 교양 교육으로서의 인문학을 뛰어넘는 의료인문학의 방향 전환이 점차 요구되었다. 특히 펠레그리노는 의학의 인문성과 도덕성 자체에 주목했다. 과학과 인문학은 앎의 방식 자체가 다르므로 공약 불가능하다. 오로지 의학만이 이것을 극복할 수 있다. 실존적 개인으로서의 인간과 대상화된 객체로서의 인간을 통합적으로 다루는 것은 의학뿐이다. “의학은 가장 인간적인 과학이고, 가장 경험적인 예술이며, 가장 과학적인 인문학이다”라는 유명한 말은 이렇게 탄생했다.
결국 의사의 역량 속에 과학에 기반한 임상 능력과 한 인간으로서 아픈 이를 돌보려는 인본적 태도가 균형 잡힌 채 녹아 있는 것이 의학의 휴머니즘 전통이다. 그 전통에서 인문학은 언제나 의학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의료윤리학자인 앨버트 존슨은 이것을 호르몬에 비유한다. 매우 탁월한 비유이다. 호르몬은 미량으로 존재하지만, 그것이 없다면 신체 기능은 마비되고 말 것이다. 의료인문학은 의학의 호르몬이다. 복잡하고 급변화하는 의료 환경에서 의학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호르몬으로서 의료인문학이 담당해야 할 역할이며, 그 항상성이란 바로 의학의 휴머니즘 전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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