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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tail Information
파리 미술관 역사로 걷다 : 프랑스 혁명기의 다비드부터 자본주의 시대의 반 고흐까지
저자
출판사
출판일
20181213
가격
₩ 18,000
ISBN
9791196128975
페이지
390 p.
판형
153 X 201 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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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책 소개
루브르, 오르세, 베르사유 궁 박물관에서 프랑스 역사를 만나다
루브르, 오르세 미술관에서 프랑스 역사를 만나다 프랑스 파리는 낭만과 예술의 도시이자 자유와 혁명의 도시다. 파리만의 이런 독특한 이미지가 생겨난 것은 1789년 프랑스 혁명과, 이를 기반으로 형성된 시민사회 위에서 다양한 예술과 문화가 자유롭게 꽃피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 공포 정치, 나폴레옹의 등장과 제1제정, 제2제정, 파리 코뮌, 제3공화국을 거쳐 프랑스에서는 자유ㆍ평등ㆍ박애를 내세운 시민사회가 자리잡는다. 이 고단한 역사의 여정이 파리 미술관들의 소장작들에는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왕정-혁명-제정 때마다 지지 세력을 바꿔 살아남은 기회주의자 다비드, 혁명을 캔버스에 담은 들라크루아, 새 시대에 투표권을 부여받은 농민과 노동자와 하층민을 그린 밀레와 쿠르베, 대중 시대에 스캔들로 스타가 된 마네, 혁명 대신 평범한 일상을 그린 모네, 근대 도시로 거듭난 파리를 담은 르누아르, 초기 자본주의 사회의 냉혹함에 희생당한 반 고흐, 노동자들의 주말 휴식이 보장된 시대에 일요일의 화가로 성공한 루소……. 이들의 그림에는 프랑스 역사의 흔적이 그대로 담겨 있다. 『파리 미술관 역사로 걷다』는 루브르, 오르세, 오랑주리, 프티 팔레, 로댕, 마르모탕 모네, 베르사유 궁 박물관 등 파리(와 인근) 미술관의 그림들을 통해 프랑스 역사를 친절하게 이야기해 주는 인문교양+예술+여행 책이다. 그림 여행을 하다 보면 어느새 프랑스 근현대사를 쉽고도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루브르, 오르세 미술관에서 프랑스 역사를 만나다 프랑스 파리는 낭만과 예술의 도시이자 자유와 혁명의 도시다. 파리만의 이런 독특한 이미지가 생겨난 것은 1789년 프랑스 혁명과, 이를 기반으로 형성된 시민사회 위에서 다양한 예술과 문화가 자유롭게 꽃피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 공포 정치, 나폴레옹의 등장과 제1제정, 제2제정, 파리 코뮌, 제3공화국을 거쳐 프랑스에서는 자유ㆍ평등ㆍ박애를 내세운 시민사회가 자리잡는다. 이 고단한 역사의 여정이 파리 미술관들의 소장작들에는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왕정-혁명-제정 때마다 지지 세력을 바꿔 살아남은 기회주의자 다비드, 혁명을 캔버스에 담은 들라크루아, 새 시대에 투표권을 부여받은 농민과 노동자와 하층민을 그린 밀레와 쿠르베, 대중 시대에 스캔들로 스타가 된 마네, 혁명 대신 평범한 일상을 그린 모네, 근대 도시로 거듭난 파리를 담은 르누아르, 초기 자본주의 사회의 냉혹함에 희생당한 반 고흐, 노동자들의 주말 휴식이 보장된 시대에 일요일의 화가로 성공한 루소……. 이들의 그림에는 프랑스 역사의 흔적이 그대로 담겨 있다. 『파리 미술관 역사로 걷다』는 루브르, 오르세, 오랑주리, 프티 팔레, 로댕, 마르모탕 모네, 베르사유 궁 박물관 등 파리(와 인근) 미술관의 그림들을 통해 프랑스 역사를 친절하게 이야기해 주는 인문교양+예술+여행 책이다. 그림 여행을 하다 보면 어느새 프랑스 근현대사를 쉽고도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목차
들어가며
01 다비드와 프랑스 혁명: 천재 화가인가, 비열한 기회주의자인가?
02 다비드와 나폴레옹: “황제께 이 그림을 바칩니다”
03 들라크루아와 부르봉 왕조: 과거 권위에 반기를 들다
04 밀레와 보통선거의 시작: 농부를 그림의 주인공으로 내세우다
05 쿠르베와 제2제정: 노동자와 하층민을 그리다
06 마네와 대중 시대: 스타는 스캔들로 탄생한다
07 드가와 파리 코뮌 이후: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자
08 모네와 제3공화국: 회화의 혁명을 완성하다
09 르누아르와 근대 도시 파리: 프랑스적인 낭만을 그리다
10 세잔과 공화정 시대: 다 빈치를 살해하다
11 반 고흐와 자본주의: 새로운 인간형이 만들어지다
12 루소와 평등 시대: 누구나 화가가 될 수 있다
부록1: 파리 미술관과 주요 소장품 지도
부록2: 프랑스 주요 사건과 미술 연대표
01 다비드와 프랑스 혁명: 천재 화가인가, 비열한 기회주의자인가?
02 다비드와 나폴레옹: “황제께 이 그림을 바칩니다”
03 들라크루아와 부르봉 왕조: 과거 권위에 반기를 들다
04 밀레와 보통선거의 시작: 농부를 그림의 주인공으로 내세우다
05 쿠르베와 제2제정: 노동자와 하층민을 그리다
06 마네와 대중 시대: 스타는 스캔들로 탄생한다
07 드가와 파리 코뮌 이후: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자
08 모네와 제3공화국: 회화의 혁명을 완성하다
09 르누아르와 근대 도시 파리: 프랑스적인 낭만을 그리다
10 세잔과 공화정 시대: 다 빈치를 살해하다
11 반 고흐와 자본주의: 새로운 인간형이 만들어지다
12 루소와 평등 시대: 누구나 화가가 될 수 있다
부록1: 파리 미술관과 주요 소장품 지도
부록2: 프랑스 주요 사건과 미술 연대표
본문발췌
〈상처 입은 남자〉로부터 6년 후, 쿠르베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그림으로 살롱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바로 〈오르낭의 장례식〉이다. … 살롱에 제출할 당시 제목은 〈오르낭의 장례식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람들의 그림〉이다. 시골 동네의 흔한 사람들을 그려놓고 역사적인 사람들이라니, 밀레의 농부화보다 더 노골적으로 기존 회화에 반기를 든 모양새다. “지금은 평범한 사람들의 시대니, 시골의 보통 사람들도 역사적인 인물로 기록하겠다. 나는 그림으로 저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표출하겠다.” 이렇듯 쿠르베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그림을 그렸다. 그것은 사실주의다.
[134-142쪽]
르네상스 이후로 (투시)원근법은 세상을 현실적으로 표현한다고 믿어져 왔다. 하지만 우리는 원근법이 구현된 그림처럼 실제 풍경을 보지 않는다. 소실점으로 세상이 수렴되는 투시원근법은 시점을 한곳으로 고정하므로, 그림에는 단 하나의 시점과 풍경만이 담긴다. 그런데 우리의 눈은 풍경을 볼 때 이곳저곳으로 계속 움직인다. 각각의 시점에서 본 대상은 클로즈업되듯이 거리가 멀어도 크게 보인다. 이렇게 다양한 시점의 총합으로 우리는 풍경에 대한 기억을 만든다. 그러니 원근법에 맞춰 정리된 풍경은 허구의 풍경이다.
[183쪽]
〈스타〉는 드가의 파스텔화 가운데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다. … 제목은 화려하게 빛나는 별이지만, 별들이 반짝이는 무대는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무대 왼편 위쪽의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는 후원자다. 당시는 무용수에게 돈을 얼마 지불하고 따로 만날 수 있었고 그런 만남은 자주 매춘으로 흘렀다. 다른 무용수 그림에서는 간혹 나이 든 여자들도 보이는데, 그런 만남을 주선하는 뚜쟁이거나 그들의 유혹으로부터 자기 딸을 보호하려는 가족이다. 우리는 순백 발레리나의 아름다움을 보지만, 얼굴이 감춰진 남자는 소녀를 성욕의 대상으로 보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발레리나를 통해 아름다움을 느끼는데, 그 아름다움을 전하는 소녀의 현실은 비참하다.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그림이다.
[214쪽]
음악에 맞춰 사람들이 춤추는 몽마르트르 언덕은 5년 전 학살의 장소였다. 1871년 봄날 몽마르트르 언덕에 자리잡은 파리 코뮌 지도부는 프랑스 정부군과 연합군에 맞서 격렬한 투쟁을 벌였으나, 비참하게 학살당했다. … 그 후로 5년 동안 파리와 파리 시민은 완전히 달라졌다. 신도시 파리에서 투쟁의 흔적은 지워졌고,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도시를 산책하며 쇼핑과 유흥을 즐겼다. 피의 과거는 지나갔고, 빛의 현재가 다가왔다. 제3공화국에서 대립과 투쟁을 넘어 희망찬 새 시대로 가자는 말은 사람들에게 간절하게 다가갔다. 단두대가 설치되었던 ‘혁명광장’을, 화합을 뜻하는 ‘콩코르드 광장’으로 서둘러 개명하여 그곳에서 잘려나갔던 수많은 목숨의 피를 덮었다.
[293-295쪽]
반 고흐가 활동했던 19세기 예술가들의 가장 큰 딜레마는 시장의 헤게모니였다. 그림의 제작자이자 판매자인 그들은, 시장에서 주도권을 쥘 수 없었다. 시장이 없다면 그림을 팔 가능성이 아예 차단되니, 시장은 필요했으나 시장의 논리를 거부해야 하는 이중성을 감내해야 했다. 여기서 현대의 우리 삶과 조우한다. 19세기 초기의 자본주의보다 더욱 냉정한 신자유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하기 싫은 일들을 해야만 한다. 그렇게 살다 보면, 하고 싶었던 일은 어젯밤 꿈처럼 점차 멀어지고 흐릿해진다.
[365쪽]
[134-142쪽]
르네상스 이후로 (투시)원근법은 세상을 현실적으로 표현한다고 믿어져 왔다. 하지만 우리는 원근법이 구현된 그림처럼 실제 풍경을 보지 않는다. 소실점으로 세상이 수렴되는 투시원근법은 시점을 한곳으로 고정하므로, 그림에는 단 하나의 시점과 풍경만이 담긴다. 그런데 우리의 눈은 풍경을 볼 때 이곳저곳으로 계속 움직인다. 각각의 시점에서 본 대상은 클로즈업되듯이 거리가 멀어도 크게 보인다. 이렇게 다양한 시점의 총합으로 우리는 풍경에 대한 기억을 만든다. 그러니 원근법에 맞춰 정리된 풍경은 허구의 풍경이다.
[183쪽]
〈스타〉는 드가의 파스텔화 가운데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다. … 제목은 화려하게 빛나는 별이지만, 별들이 반짝이는 무대는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무대 왼편 위쪽의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는 후원자다. 당시는 무용수에게 돈을 얼마 지불하고 따로 만날 수 있었고 그런 만남은 자주 매춘으로 흘렀다. 다른 무용수 그림에서는 간혹 나이 든 여자들도 보이는데, 그런 만남을 주선하는 뚜쟁이거나 그들의 유혹으로부터 자기 딸을 보호하려는 가족이다. 우리는 순백 발레리나의 아름다움을 보지만, 얼굴이 감춰진 남자는 소녀를 성욕의 대상으로 보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발레리나를 통해 아름다움을 느끼는데, 그 아름다움을 전하는 소녀의 현실은 비참하다.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그림이다.
[214쪽]
음악에 맞춰 사람들이 춤추는 몽마르트르 언덕은 5년 전 학살의 장소였다. 1871년 봄날 몽마르트르 언덕에 자리잡은 파리 코뮌 지도부는 프랑스 정부군과 연합군에 맞서 격렬한 투쟁을 벌였으나, 비참하게 학살당했다. … 그 후로 5년 동안 파리와 파리 시민은 완전히 달라졌다. 신도시 파리에서 투쟁의 흔적은 지워졌고,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도시를 산책하며 쇼핑과 유흥을 즐겼다. 피의 과거는 지나갔고, 빛의 현재가 다가왔다. 제3공화국에서 대립과 투쟁을 넘어 희망찬 새 시대로 가자는 말은 사람들에게 간절하게 다가갔다. 단두대가 설치되었던 ‘혁명광장’을, 화합을 뜻하는 ‘콩코르드 광장’으로 서둘러 개명하여 그곳에서 잘려나갔던 수많은 목숨의 피를 덮었다.
[293-295쪽]
반 고흐가 활동했던 19세기 예술가들의 가장 큰 딜레마는 시장의 헤게모니였다. 그림의 제작자이자 판매자인 그들은, 시장에서 주도권을 쥘 수 없었다. 시장이 없다면 그림을 팔 가능성이 아예 차단되니, 시장은 필요했으나 시장의 논리를 거부해야 하는 이중성을 감내해야 했다. 여기서 현대의 우리 삶과 조우한다. 19세기 초기의 자본주의보다 더욱 냉정한 신자유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하기 싫은 일들을 해야만 한다. 그렇게 살다 보면, 하고 싶었던 일은 어젯밤 꿈처럼 점차 멀어지고 흐릿해진다.
[365쪽]
저자소개
이동섭
예술인문학자. 한양대학교 광고홍보학과 졸업 후, 파리로 유학을 갔다. 파리 제8대학 사진학과, 조형예술학부 석사(현대무용), 박사 준비과정(비디오아트), 박사(예술과 공연미학)를 마쳤다. 그림과 음악, 영화와 패션 등에 걸쳐 폭넓게 공부하고 일했다. 서울로 돌아와 SBS 컬처클럽을 비롯한 방송, 한국일보와 한겨레신문 등 언론에서 인문학을 예술작품으로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한편, 한국예술종합학교, 동국대학교, 성신여자대학교 등에서는 문화와 예술을 중심으로 다양한 장르를 융합시키는 강의를 하고 있다.
『반 고흐 인생 수업』 『파리 로망스』 『그림이 야옹야옹 고양이 미술사』 『도쿄 로망스』 『패션 코리아, 세계를 움직이다』『당신에게 러브 레터』 『뚱뚱해서 행복한 보테로』 『뮤지컬 토크 2.0』 『뮤지컬의 이해』 『나만의 파리』를 쓰고, 『파리 스케치북』과 『지금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번역했고, 『유럽 장인들의 아틀리에』의 사진을 찍었다.
그림은 시대의 초상화이자 역사의 기록물이므로, 우리는 미술관에서도 역사를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인문학자. 한양대학교 광고홍보학과 졸업 후, 파리로 유학을 갔다. 파리 제8대학 사진학과, 조형예술학부 석사(현대무용), 박사 준비과정(비디오아트), 박사(예술과 공연미학)를 마쳤다. 그림과 음악, 영화와 패션 등에 걸쳐 폭넓게 공부하고 일했다. 서울로 돌아와 SBS 컬처클럽을 비롯한 방송, 한국일보와 한겨레신문 등 언론에서 인문학을 예술작품으로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한편, 한국예술종합학교, 동국대학교, 성신여자대학교 등에서는 문화와 예술을 중심으로 다양한 장르를 융합시키는 강의를 하고 있다.
『반 고흐 인생 수업』 『파리 로망스』 『그림이 야옹야옹 고양이 미술사』 『도쿄 로망스』 『패션 코리아, 세계를 움직이다』『당신에게 러브 레터』 『뚱뚱해서 행복한 보테로』 『뮤지컬 토크 2.0』 『뮤지컬의 이해』 『나만의 파리』를 쓰고, 『파리 스케치북』과 『지금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번역했고, 『유럽 장인들의 아틀리에』의 사진을 찍었다.
그림은 시대의 초상화이자 역사의 기록물이므로, 우리는 미술관에서도 역사를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평
프랑스 파리에서 즐기는
미술 + 역사 + 여행의
흥미진진한 콜라보레이션!
파리 미술관들에 숨어 있는 역사 이야기
프랑스 파리를 찾는 여행자들이라면 꼭 들르는 곳이 있다. 바로 루브르와 오르세 미술관이다. 베르사유 궁을 방문한다면 그곳에 있는 프랑스 역사박물관도 필수 코스다. 길게 늘어선 관람객들의 줄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눈에 익은 작품들을 만나기도 한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알프스의 생베르나르 협곡을 넘는 나폴레옹〉, 〈만종〉, 〈수련〉, 반 고흐의 〈자화상〉 등이 그런 경우다.
파리(와 인근)에 위치한 루브르, 오르세, 오랑주리, 프티 팔레, 로댕, 마르모탕 모네, 베르사유 궁 프랑스 역사박물관 등에서 만나는 소장품들은 기나긴 프랑스 역사를 지금의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는 전달자 역할을 한다. 특히 프랑스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꾼 1789년 프랑스 혁명부터 자본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격동적인 변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오래전부터 인문학을 예술작품으로 설명하는 활동을 해온 예술인문학자 이동섭은 『파리 미술관 역사로 걷다』에서 파리 미술관의 그림들을 통해 프랑스 혁명과 역사를 이해하는 참신하고도 흥미로운 시도를 한다.
왕에서 혁명가로, 다시 나폴레옹에게로 변절하다: 다비드의 최후
자크루이 다비드는 천재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뛰어났던 신고전주의 화가다. 이름은 낯설더라도 나폴레옹이 흰 말을 타고 알프스 산을 넘는 그림을 그렸다고 하면 누구나, 아, 하고 외칠 것이다. 그만큼 지금의 우리에게도 익숙한 화가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비열한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들어왔다. 루이 16세 시기에는 왕의 화가로서 국가에 목숨 바쳐 충성하라는 메시지를 담은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를 그렸다가, 혁명기에는 자신의 후원자였던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하는 데 찬성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다비드의 행보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혁명가의 마지막 순간을 그린 〈마라의 죽음〉으로 혁명 세력에 충성심을 내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혁명 세력의 분열로 테르미도르 반동이 일어나고, 폭동과 쿠데타에 이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집권하자, 다비드는 다시 한 번 황제의 화가로 부활(또는 변심)한다. 그 결정적 증거가 〈황제의 대관식〉이다.
1804년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된 황제 대관식에서 나폴레옹은 교황 비오 7세의 손에서 관을 빼앗아 스스로의 머리에 쓰는 불경을 저질렀다. 이 장면을 그려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 처했던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황비 조제핀에게 관을 씌워주는 순간을 그림으로써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후에도 황제의 입맛에 맞는 그림을 그려 총애를 받았던 다비드는, 영국 봉쇄와 러시아 원정에 실패한 나폴레옹이 실각을 하자 궁지에 내몰리게 된다. 다비드는 로마로 망명하고자 했으나, 대관식 때 수모를 당했던 교황이 허락할 리 없었다. 결국 다비드는 벨기에 브뤼셀로 망명해서 거기서 생을 마쳤다.
프랑스 혁명을 캔버스에 담다: 들라크루아의 반란
1789년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의 정치 체제뿐 아니라 사회, 문화 등 거의 모든 것을 바꾸었다. 예술도 예외가 아니었다.
프랑스 혁명을 그린 그림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다. 화면 가운데 있는 마리안(Marianne)은 프랑스 혁명 정신을 상징하는 삼색기와 장총을 들고 바리케이드를 넘어 민중을 이끈다. 마리안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고귀한 가치를 위해 목숨 바친 모든 이들이 현실에서 구현되길 바랐던 자유와 이성의 의인화다. 다비드나 앵그르 같은 신고전주의 화가들이라면 마리안을 고대 그리스 로마의 여신으로 묘사했을 것이나, 낭만주의자 들라크루아는 머리를 질끈 묶은 파리의 흔한 집 딸처럼 그렸다.
프랑스 혁명과 공포정치, 제1제정을 지나 왕위에 오른 루이 필리프는 이 그림을 3,000프랑에 사서 왕립미술관에서 전시했다. 하지만 미술관장이 바뀔 때마다 파리 시민들의 폭동 의식을 자극할까 두려워해서, 이 그림은 수장고와 전시장을 오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프랑스 혁명이 완결된 제3공화국 이후인 1874년부터 루브르 미술관에 영구 전시된다. 그림의 처지가 프랑스 국내 정치 상황과 긴밀하게 연동된 셈이다.
투표권을 얻은 농민과 노동자를 그리다: 밀레와 쿠르베의 선택
7월 혁명으로 집권한 루이 필리프의 왕정은 부르주아 왕국이었다. 유권자와 피선거권의 조건을 완화시켜 참정권을 넓히면서 부르주아들의 이익을 노골적으로 대변했다. 소득 불균형으로 인한 빈부 격차를 해소하려는 사회주의 운동이 사회 전반으로 퍼지던 차에, 흉작과 물가 폭등, 불황, 노동 임금 저하, 실업자 폭증, 주가 폭락이 이어지면서 정부의 재정 위기가 닥쳤다. 최악의 경제 상황과 루이 필리프의 무능으로 1848년 2월 혁명이 터지고, 시민군에게 패배한 왕은 망명길에 올랐다.
2월 혁명은 노동자와 서민의 승리였다. 왕정을 끝낸 프랑스는 다시 공화정(제2공화국)을 선택했다. 경제력과 상관없이 21세 이상의 모든 남자들에게 선거권이 부여되면서, 귀족과 부르주아보다 소득은 적지만 숫자는 많은 농부와 노동자 들이 사회 변화의 중요한 집단으로 주목받았다.
이런 시기에 장프랑수아 밀레는 바르비종 농촌의 농민을, 귀스타브 쿠르베는 산업사회의 노동자와 하층민을 그렸다. 밀레의 〈만종〉에 등장하는 농부는 환경과 세상을 탓하지 않고 매일 열심히 삶을 영위하는 정직하고 숭고한 존재다. 쿠르베의 〈오르낭의 장레식〉에 그려진 시골 동네의 흔한 사람들은 역사적 주인공으로 새롭게 부상한 ‘보통 사람들’이다.
파리 코뮌 이후의 평범한 일상을 담다: 드가와 르누아르의 선택
제2공화국 대통령이던 나폴레옹 3세(루이 나폴레옹)는 1851년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 자리에 오르고 제2제정을 성립시켰다. 하지만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지면서 폐위당했다. 임시정부는 프로이센 수상 비스마르크와 굴욕적인 휴전강화조약을 맺었다. 이에 반발한 파리 시민들은 자체 정부를 구성하는데, 이것이 바로 파리 코뮌이다. 파리 코뮌은 노동자 중심의 정책들을 발표하지만 결국은 프랑스와 프로이센 연합군에게 잔인하게 학살당하면서 무너진다.
파리 코뮌 이후에 제3공화국을 살던 보통 청춘들은 이제 지긋지긋한 전쟁과 정치 투쟁을 끝내고 평온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어 했다. 거창한 이념보다 평범한 일상에서 의미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기나긴 혼란의 시대를 끝낸 당시 프랑스인들의 마음과 같이, 드가의 그림은 비정치적이고, 세련되고, 도시적이고, 근대적이다. 드가의 〈압생트〉나 〈스타〉에 그려진 인물들은 19세기 말 파리의 현실과 우울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반면에 ‘슬픈 그림을 그린 적이 없는 유일한 거장’인 르누아르는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나 〈뱃놀이 점심〉에서 휴일을 즐기는 근대 파리인들의 모습을 낙천적으로 그렸다. 1850년 이후 파리에서는 자본주의의 확산과 산업화, 기술 혁신 등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대도시의 삶이 형성된다. 근대인은 풍요로운 삶을 위해 여가loisir를 발견했고, 식사 모임, 소풍, 산책, 보트 타기, 경마, 축제, 극장 관람 등이 일상화되었다. 르누아르는 이런 현실을 반영해서 가난한 노동자들도 밝고 유쾌하게 그렸다.
자본주의와 평등 사회의 명암: 반 고흐와 세관원 루소의 인생
왕정과 혁명, 여러 번의 제정, 공화정을 거치면서 프랑스에서는 자유ㆍ평등ㆍ박애 정신을 기초로 한 시민사회가 자리잡았다. 화가들도 왕이나 귀족의 요구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릴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이 자유는 공짜가 아니었다. 누가 화가들의 그림을 사줄 것인가 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가 남았다. 화가는 창작과 판매라는 까다로운 두 질문을 동시에 풀어야 했다. 프랑스 혁명으로 안착된 공화정은 결국 부르주아지를 위한 사회였고, 그들의 자본주의적 세계관에 어긋난 사람들은 쓸모없는 존재들로 처벌당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초기 자본주의를 살았던 반 고흐의 고난이 지금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다.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는 반 고흐가 썼던 팔레트가 소장되어 있는데, 미처 사용하지 못한 물감들이 말라붙은 모습은 생을 못다 산 채 죽어버린 그의 자화상으로 느껴진다. ‘빈센트 반 고흐’는 때 이른 죽음으로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꿈과 현실 사이의 불화의 상징이 되었다.
반면에 프랑스 혁명의 결과로 얻은 노동자들의 휴식일인 일요일을 이용해 꾸준히 작업해서 놀랍도록 매혹적인 세계를 열었던 화가도 있다. 앙리 루소, 철학자 루소와 구분하기 위해 ‘세관원 루소’라고도 불리는 이다. 그는 파리의 세관 하급 관리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서툰 솜씨를 가졌으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피카소도 인정한 독창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못 그린 그림’이라는 비아냥과 비난을 이기고 현재는 오르세 미술관에서 자기 방을 가진 불멸의 화가가 되었다.
파리의 매력은 프랑스 혁명 정신에서 시작되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내세운 자유ㆍ평등ㆍ박애 정신은 프랑스 정치와 사회뿐 아니라 문화와 예술, 거의 모든 것을 바꾸었다. 지금의 파리가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화 수도’ 파리의 매력은 예술가들의 다양한 개성을 폭넓게 수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것을 잃으면 파리의 매력도 사라질 것이다. 인상주의는 그 시작점이자 결과물로서, 프랑스 최대 수출품이다. 루이 14세가 만든 베르사유 궁의 영향력은 유럽 일부에 한정되었다면, 오르세와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대표되는 인상주의는 전 세계에 프랑스 문화의 대명사로서 힘을 발휘한다.
『파리 미술관 역사로 걷다』는 파리에서 만날 수 있는 그림들을 통해 프랑스 역사의 자취를 따라가며,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이 책과 함께 그림 여행을 하다 보면, 어느새 프랑스 역사와 문화를 쉽게 또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미술 + 역사 + 여행의
흥미진진한 콜라보레이션!
파리 미술관들에 숨어 있는 역사 이야기
프랑스 파리를 찾는 여행자들이라면 꼭 들르는 곳이 있다. 바로 루브르와 오르세 미술관이다. 베르사유 궁을 방문한다면 그곳에 있는 프랑스 역사박물관도 필수 코스다. 길게 늘어선 관람객들의 줄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눈에 익은 작품들을 만나기도 한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알프스의 생베르나르 협곡을 넘는 나폴레옹〉, 〈만종〉, 〈수련〉, 반 고흐의 〈자화상〉 등이 그런 경우다.
파리(와 인근)에 위치한 루브르, 오르세, 오랑주리, 프티 팔레, 로댕, 마르모탕 모네, 베르사유 궁 프랑스 역사박물관 등에서 만나는 소장품들은 기나긴 프랑스 역사를 지금의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는 전달자 역할을 한다. 특히 프랑스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꾼 1789년 프랑스 혁명부터 자본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격동적인 변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오래전부터 인문학을 예술작품으로 설명하는 활동을 해온 예술인문학자 이동섭은 『파리 미술관 역사로 걷다』에서 파리 미술관의 그림들을 통해 프랑스 혁명과 역사를 이해하는 참신하고도 흥미로운 시도를 한다.
왕에서 혁명가로, 다시 나폴레옹에게로 변절하다: 다비드의 최후
자크루이 다비드는 천재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뛰어났던 신고전주의 화가다. 이름은 낯설더라도 나폴레옹이 흰 말을 타고 알프스 산을 넘는 그림을 그렸다고 하면 누구나, 아, 하고 외칠 것이다. 그만큼 지금의 우리에게도 익숙한 화가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비열한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들어왔다. 루이 16세 시기에는 왕의 화가로서 국가에 목숨 바쳐 충성하라는 메시지를 담은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를 그렸다가, 혁명기에는 자신의 후원자였던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하는 데 찬성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다비드의 행보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혁명가의 마지막 순간을 그린 〈마라의 죽음〉으로 혁명 세력에 충성심을 내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혁명 세력의 분열로 테르미도르 반동이 일어나고, 폭동과 쿠데타에 이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집권하자, 다비드는 다시 한 번 황제의 화가로 부활(또는 변심)한다. 그 결정적 증거가 〈황제의 대관식〉이다.
1804년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된 황제 대관식에서 나폴레옹은 교황 비오 7세의 손에서 관을 빼앗아 스스로의 머리에 쓰는 불경을 저질렀다. 이 장면을 그려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 처했던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황비 조제핀에게 관을 씌워주는 순간을 그림으로써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후에도 황제의 입맛에 맞는 그림을 그려 총애를 받았던 다비드는, 영국 봉쇄와 러시아 원정에 실패한 나폴레옹이 실각을 하자 궁지에 내몰리게 된다. 다비드는 로마로 망명하고자 했으나, 대관식 때 수모를 당했던 교황이 허락할 리 없었다. 결국 다비드는 벨기에 브뤼셀로 망명해서 거기서 생을 마쳤다.
프랑스 혁명을 캔버스에 담다: 들라크루아의 반란
1789년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의 정치 체제뿐 아니라 사회, 문화 등 거의 모든 것을 바꾸었다. 예술도 예외가 아니었다.
프랑스 혁명을 그린 그림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다. 화면 가운데 있는 마리안(Marianne)은 프랑스 혁명 정신을 상징하는 삼색기와 장총을 들고 바리케이드를 넘어 민중을 이끈다. 마리안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고귀한 가치를 위해 목숨 바친 모든 이들이 현실에서 구현되길 바랐던 자유와 이성의 의인화다. 다비드나 앵그르 같은 신고전주의 화가들이라면 마리안을 고대 그리스 로마의 여신으로 묘사했을 것이나, 낭만주의자 들라크루아는 머리를 질끈 묶은 파리의 흔한 집 딸처럼 그렸다.
프랑스 혁명과 공포정치, 제1제정을 지나 왕위에 오른 루이 필리프는 이 그림을 3,000프랑에 사서 왕립미술관에서 전시했다. 하지만 미술관장이 바뀔 때마다 파리 시민들의 폭동 의식을 자극할까 두려워해서, 이 그림은 수장고와 전시장을 오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프랑스 혁명이 완결된 제3공화국 이후인 1874년부터 루브르 미술관에 영구 전시된다. 그림의 처지가 프랑스 국내 정치 상황과 긴밀하게 연동된 셈이다.
투표권을 얻은 농민과 노동자를 그리다: 밀레와 쿠르베의 선택
7월 혁명으로 집권한 루이 필리프의 왕정은 부르주아 왕국이었다. 유권자와 피선거권의 조건을 완화시켜 참정권을 넓히면서 부르주아들의 이익을 노골적으로 대변했다. 소득 불균형으로 인한 빈부 격차를 해소하려는 사회주의 운동이 사회 전반으로 퍼지던 차에, 흉작과 물가 폭등, 불황, 노동 임금 저하, 실업자 폭증, 주가 폭락이 이어지면서 정부의 재정 위기가 닥쳤다. 최악의 경제 상황과 루이 필리프의 무능으로 1848년 2월 혁명이 터지고, 시민군에게 패배한 왕은 망명길에 올랐다.
2월 혁명은 노동자와 서민의 승리였다. 왕정을 끝낸 프랑스는 다시 공화정(제2공화국)을 선택했다. 경제력과 상관없이 21세 이상의 모든 남자들에게 선거권이 부여되면서, 귀족과 부르주아보다 소득은 적지만 숫자는 많은 농부와 노동자 들이 사회 변화의 중요한 집단으로 주목받았다.
이런 시기에 장프랑수아 밀레는 바르비종 농촌의 농민을, 귀스타브 쿠르베는 산업사회의 노동자와 하층민을 그렸다. 밀레의 〈만종〉에 등장하는 농부는 환경과 세상을 탓하지 않고 매일 열심히 삶을 영위하는 정직하고 숭고한 존재다. 쿠르베의 〈오르낭의 장레식〉에 그려진 시골 동네의 흔한 사람들은 역사적 주인공으로 새롭게 부상한 ‘보통 사람들’이다.
파리 코뮌 이후의 평범한 일상을 담다: 드가와 르누아르의 선택
제2공화국 대통령이던 나폴레옹 3세(루이 나폴레옹)는 1851년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 자리에 오르고 제2제정을 성립시켰다. 하지만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지면서 폐위당했다. 임시정부는 프로이센 수상 비스마르크와 굴욕적인 휴전강화조약을 맺었다. 이에 반발한 파리 시민들은 자체 정부를 구성하는데, 이것이 바로 파리 코뮌이다. 파리 코뮌은 노동자 중심의 정책들을 발표하지만 결국은 프랑스와 프로이센 연합군에게 잔인하게 학살당하면서 무너진다.
파리 코뮌 이후에 제3공화국을 살던 보통 청춘들은 이제 지긋지긋한 전쟁과 정치 투쟁을 끝내고 평온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어 했다. 거창한 이념보다 평범한 일상에서 의미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기나긴 혼란의 시대를 끝낸 당시 프랑스인들의 마음과 같이, 드가의 그림은 비정치적이고, 세련되고, 도시적이고, 근대적이다. 드가의 〈압생트〉나 〈스타〉에 그려진 인물들은 19세기 말 파리의 현실과 우울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반면에 ‘슬픈 그림을 그린 적이 없는 유일한 거장’인 르누아르는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나 〈뱃놀이 점심〉에서 휴일을 즐기는 근대 파리인들의 모습을 낙천적으로 그렸다. 1850년 이후 파리에서는 자본주의의 확산과 산업화, 기술 혁신 등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대도시의 삶이 형성된다. 근대인은 풍요로운 삶을 위해 여가loisir를 발견했고, 식사 모임, 소풍, 산책, 보트 타기, 경마, 축제, 극장 관람 등이 일상화되었다. 르누아르는 이런 현실을 반영해서 가난한 노동자들도 밝고 유쾌하게 그렸다.
자본주의와 평등 사회의 명암: 반 고흐와 세관원 루소의 인생
왕정과 혁명, 여러 번의 제정, 공화정을 거치면서 프랑스에서는 자유ㆍ평등ㆍ박애 정신을 기초로 한 시민사회가 자리잡았다. 화가들도 왕이나 귀족의 요구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릴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이 자유는 공짜가 아니었다. 누가 화가들의 그림을 사줄 것인가 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가 남았다. 화가는 창작과 판매라는 까다로운 두 질문을 동시에 풀어야 했다. 프랑스 혁명으로 안착된 공화정은 결국 부르주아지를 위한 사회였고, 그들의 자본주의적 세계관에 어긋난 사람들은 쓸모없는 존재들로 처벌당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초기 자본주의를 살았던 반 고흐의 고난이 지금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다.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는 반 고흐가 썼던 팔레트가 소장되어 있는데, 미처 사용하지 못한 물감들이 말라붙은 모습은 생을 못다 산 채 죽어버린 그의 자화상으로 느껴진다. ‘빈센트 반 고흐’는 때 이른 죽음으로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꿈과 현실 사이의 불화의 상징이 되었다.
반면에 프랑스 혁명의 결과로 얻은 노동자들의 휴식일인 일요일을 이용해 꾸준히 작업해서 놀랍도록 매혹적인 세계를 열었던 화가도 있다. 앙리 루소, 철학자 루소와 구분하기 위해 ‘세관원 루소’라고도 불리는 이다. 그는 파리의 세관 하급 관리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서툰 솜씨를 가졌으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피카소도 인정한 독창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못 그린 그림’이라는 비아냥과 비난을 이기고 현재는 오르세 미술관에서 자기 방을 가진 불멸의 화가가 되었다.
파리의 매력은 프랑스 혁명 정신에서 시작되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내세운 자유ㆍ평등ㆍ박애 정신은 프랑스 정치와 사회뿐 아니라 문화와 예술, 거의 모든 것을 바꾸었다. 지금의 파리가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화 수도’ 파리의 매력은 예술가들의 다양한 개성을 폭넓게 수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것을 잃으면 파리의 매력도 사라질 것이다. 인상주의는 그 시작점이자 결과물로서, 프랑스 최대 수출품이다. 루이 14세가 만든 베르사유 궁의 영향력은 유럽 일부에 한정되었다면, 오르세와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대표되는 인상주의는 전 세계에 프랑스 문화의 대명사로서 힘을 발휘한다.
『파리 미술관 역사로 걷다』는 파리에서 만날 수 있는 그림들을 통해 프랑스 역사의 자취를 따라가며,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이 책과 함께 그림 여행을 하다 보면, 어느새 프랑스 역사와 문화를 쉽게 또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