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상세정보
Detail Information
오은선의 한 걸음 : 도전한다는 것, 물러설 용기를 얻는다는 것
저자
출판사
출판일
20221208
가격
₩ 18,000
ISBN
9788992162951
페이지
293 p.
판형
150 X 210 mm
커버
Book
책 소개
‘세계 여성 최초 히말라야 14좌, 7대륙 최고봉 등정’ 오은선의 등반기. 저자는 20년 가까운 고산등반 기간 목숨이 위태로운 극한의 상황에서 일기를 쓰고 메모를 했다. 이 책은 35권 분량의 기록을 압축해 한 권으로 엮은 것이다. 등반 과정의 디테일한 묘사는 기억을 재구성하지 않고 그 날 그 날 기록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결과다. 단점으로 보일 수 있는,감정의 기복이 심한 것 역시 그때 그때 상황과 체감을 있는 그대로 기술했기 때문이다. 호불호를 떠나 20년의 전 등반을 녹화하지 않는 이상 이처럼 생생한 등반기가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난중일기가 그렇듯 등반일기가 없었다면 오은선도 없었을 것이다. 저자는 등반을 하며 책을 쓰고, 책을 쓰듯 등반을 해온 셈이다. 일기는 과거이자 미래다. 실패의 기록이 성공의 지침서가 될 수 있음이 오은선 일기 곳곳에서 증명되고 있다.
목차
prologue
꿈의 한 걸음, 인수봉
철밥통과 바꾼, 에베레스트
찬란함에 가려진 그늘, 가셔브룸Ⅱ
말없는 山, 브로드피크
다시 자연을 배운, 마칼루
들러리의 한계를 꺠닫다.
스스로 끼운 첫 단추, 엘부르즈
그림자를 벗삼아 홀로서기, 매킨리
비난 받을 용시, 에베레스트
어설픈 대장도 잘 따라준, 킬리만자로
억겁의 기운을 받다, 빈슨매시프
절반의 성공, 시샤팡마[8,027m]·초오유[8,201m]
선애와 단둘이, 초오유
무산소의 자신감을 심어준, K2[8,611m]·브로드피크[8,047m]
첫 연속등정, 마칼루[8,463m]-로체[8,516m]
죽음의 유혹, 로체[8,516m]
무수한 나와의 갈등, 브로드피크[8,047m]
누가 논란을 조장하는가? 칸첸중가[8,586m]
운명을 갈라놓은, 낭가파르바트[8,126m]
마음은 발걸음보다 한 걸음 뒤에 안나푸르나[8,091m]
15좌, 학문의 산[infinity]
epilogue
꿈의 한 걸음, 인수봉
철밥통과 바꾼, 에베레스트
찬란함에 가려진 그늘, 가셔브룸Ⅱ
말없는 山, 브로드피크
다시 자연을 배운, 마칼루
들러리의 한계를 꺠닫다.
스스로 끼운 첫 단추, 엘부르즈
그림자를 벗삼아 홀로서기, 매킨리
비난 받을 용시, 에베레스트
어설픈 대장도 잘 따라준, 킬리만자로
억겁의 기운을 받다, 빈슨매시프
절반의 성공, 시샤팡마[8,027m]·초오유[8,201m]
선애와 단둘이, 초오유
무산소의 자신감을 심어준, K2[8,611m]·브로드피크[8,047m]
첫 연속등정, 마칼루[8,463m]-로체[8,516m]
죽음의 유혹, 로체[8,516m]
무수한 나와의 갈등, 브로드피크[8,047m]
누가 논란을 조장하는가? 칸첸중가[8,586m]
운명을 갈라놓은, 낭가파르바트[8,126m]
마음은 발걸음보다 한 걸음 뒤에 안나푸르나[8,091m]
15좌, 학문의 산[infinity]
epilogue
본문발췌
P.6
“아! 이 얼마나 역사적인 순간입니까! 만세~!”
2010년 4월 27일 현지 시각 오후 3시(한국시각 6시 15분) 나는 히말라야 14좌 마지막 봉우리 안나푸르나(8,091m) 꼭대기에 태극기를 꽂았다. 종일 전국에 생중계된 나의 등정은 “천안함사건으로 암울했던 국내에 단비 같은”(<연합뉴스>), “스산한 봄을 환하게 밝힌”(<동아일보> 특별기고, 김서령) 소식이 됐다.
히말라야 14좌 등정은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많은 여성이 도전했지만 꿈을 이루지 못하고 몇몇은 죽음을 맞았다. 여성山악인 최초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언론은 “희박한 산소”, “낮은 기압”, “가파른 경사”를 “작은 체구의 한국 여성”이 온몸으로 기어올라 일궈낸 “아름다운 승리”라고 극찬했다.
2007년 K2(8,611m) 등반에 성공한 후 히말라야 14좌 도전에 뜻을 세웠다. 이후 스페인의 에두르네 파사반과 독일의 겔렌데 칼텐부르너 두 여성이 도전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세계 여성 최초’ 기록보다 “지금까지 남녀를 통틀어 15개월 동안 8,000미터 8개 봉을 무산소로 오른 전무후무한 사람”이라는 라인홀트 메스너(Reinhold Messner, 인류 최초 히말라야 14좌 완등, 최고봉 에베레스트 무산소등정)의 평가에 더 큰 자부심을 갖는다. 어처구니없게 칸첸중가(8,586m) 등반이 ‘논란 중’ 꼬리표를 달게 됐지만 두 봉우리씩 연속적으로 1년에 5~6개 봉우리에 도전한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다.
히말라야에 도전한 여성은 많았지만 대다수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그 이유를 메스너는 “100년 전 남성등반가들은 여성등반가들과 비교되는 것을 싫어하고 뛰어난 여성등반가의 출현을 못마땅하게 여겨 의도적으로 막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P.11
사람의 山은 자연의 山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고 험했다. 가늠하기 어려운 山, 화내는 山, 시기하는 山, 차별하는 山, 왜곡하는 山, 상처 주는 山, 상처 받는 山. 사과하지 못하는 山, 용서하지 못하는 山. 사람의 山은 ‘갈등의 크레바스’투성이다. 아무리 올라가도 정상은 가늠할 수 없었다. 내가 넘지 못한 사람의 山이 어디 타인뿐이랴. 나는 나라는 山도 넘지 못했다.
P.14
성공과 영광의 순간만 있지는 않았다. 하늘에 다가갈수록 죽음과 가까워짐을 느끼고 죽음에 직면하기도 했던 나에게 가장 귀중한 가치는 ‘살아있음’이다. 고소에서 피를 토하며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나에겐 일상으로 돌아와 숨 쉴 수 있는 것이 행복이었다. 악천후를 뚫고 오르려는 ‘나’와 자연의 섭리에 순응해 무사히 내려가려는 ‘나’는 끊임없이 충돌했다.
자연이 주는 시련에는 감정이 없다. 섭리대로 나아갈 뿐이다. 인간은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면 된다. 정상에 다다를 때까지 정진하고 베이스캠프로 살아 내려오기까지 쉼 없이 걸어야 등반이 완성된다. 최고봉들을 오르내리며 수천만 걸음을 걷고 나서야 ‘한 걸음’의 의미를 알게 됐다. 오르리라는 수만 번의 꿈보다 내딛는 한 걸음이 중요하다.
인생이 드라마틱한 것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 때문이다. 자신의 미래를 알면 인생이 얼마나 따분할까. 처음 山에 다닐 때만 해도 고山등반은 상상도 못했고, ‘철밥통’을 버리고 7대륙 최고봉과 히말라야 14좌를 등정하리라곤 꿈에도 몰랐다. 유명해짐과 동시에 혹독한 유명세를 치르리라는 것도 알 수 없었다. 등山은 내 삶의 전부다. 山을 빼고는 말할 수 없을 만큼 山은 내 삶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그야말로 ‘나의 심장’(오은선, 류태호, 2018)이다.
P.38
1번은 1999년 안나푸르나로 등반을 떠날 때까지 우리와 말도 섞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소식은 언론을 통해 듣게 됐다. 그녀는 1999년 엄홍길 대장과 안나푸르나 정상에 섰지만 하산 도중 추락사 하면서 영영 우리와 화해하지 못했다.
그때 우리는 왜 이름 대신 번호를 붙였을까? 각자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닌 “국내 첫 여성 에베레스트 등정자”를 배출하기 위한 부속품처럼 취급됐기 때문이었을까.
에베레스트 등반은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며 취미로 등반을 하던 나를 죽음의 공포와 맞서야 하고 미래가 불확실한 고산등반가의 길로 접어들게 한 계기가 됐다.
P.43
먹고살기 위해 방문교사 일을 했다. 학생들 하교시간에 시작해 밤 9시가 넘어야 일이 끝나 새벽에 일어나 운동하기가 점점 더 어렵게 됐다. 직장과 원정대 일을 병행하다 보니 운동하는 날보다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암벽등반이나 주마링보다 종주하며 하중훈련 하는 것이 힘들었다. 힘들어 하면서도 산에 가는 일이 제일 신났다.
P.170
자연 앞에 절대 강자가 어디 있는가? 먼저 들어와 애쓴 보람이 없어 보였다. 모두에게 인정받아야 진정한 실력이지. 자신들만이 내세우는 게 무슨 실력일까? 겸손이라는 단어가 새삼 떠오르는 날이다. 그러면 나는 겸손한가? 되물어본다. 모르겠다. 여러 가지 실타래처럼 엉켜 있는 내 머릿속과 마음속의 잡념들부터 몰아내고 생각하자. 연이은 좋지 않은 날씨는 나에게 반성과 재정비 할 시간을 주는 거 같다. 역시 자연은 위대하다. 나의 몸과 마음의 자유를 위해 K2신께 기도드린다. (2007. 7. 8. 일기)
P.237
칸첸중가 등반 논란은 그 해 11월 24일 <한겨레신문>에 나에 관한 기사가 실리면서 시작됐다. 그 일로 나는 기자회견까지 하며 당시 상황을 마무리짓고 마지막 열네 번째 봉우리인 안나푸르나 등반 준비에만 집중했다.
이듬해인 2010년 8월 21일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 후 논란이 재점화됐다. 나는 숨을 쉬기 위해 잠적했다. 나에 관한 기사는 읽지 않았다. 일의 발단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박준우 피디는 박영석 대장의 다큐를 여러 편 만들었던 신언훈 국장의 강한 지지 아래 나의 등반에 대한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박 피디는 나와 인터뷰 스케줄을 잡아놓고 네팔로 떠나버렸다. 칸첸중가 등반 때 카메라를 담당한 누루부와 인터뷰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박 피디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블랙야크 회의실에서 두 시간 동안 칸첸중가 등반 논란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김재수는 나와 칸첸중가 등반을 같이 갔던 또 다른 셰르파 페마를 데리고 파키스탄으로 등반을 떠난 상태였다. 박 피디와 김재수가 한 편이 돼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했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P.244
칸첸중가 등반 논란에 대한 나의 양심은 정상에서 내가 외친 ‘풀샷’에 있다. 등반 떠나기 전 만난 월간 <산>의 한필석 기자와 안 기자로부터 정상이 애매한 경우 하늘을 배경으로 상반신만 찍는 경우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로체를 홀로 등반할 때 셀카를 찍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정상 부위를 찍고 셀카를 찍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등반을 마치고 철수하는 도중 나보다 하루 먼저 정상에 깃발을 설치한 팀을 만났었다. 그들이 나의 등정을 인정해 주는 메모를 써 주었었다.
그렇게 나의 히말라야 14좌 완등은 언론을 통해 표출된 남성산악인들과의 갈등으로 ‘세계 여성 최초’의 영광이 아니라 ‘논란 중’이란 상처만 안게 됐다. 목숨을 건 등반에 대해 스포츠적 관점에서 보도하던 언론과의 갈등은 표면적인 모습이었고, 내부로 들어가 보면 산악계 중심에 서 있던 남성산악인들과 갈등이었다.
P.274
혼자 트레킹 하며 지내는 동안 법정 스님의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을 읽었다.
『물, 바람, 햇빛, 나무, 공기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무상으로 준다. 자연의 혜택, 무상의 은혜와 보살핌』
새삼 자연의 은혜와 보살핌 속에 이어가고 있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가를 생각하게 됐다. 나를 성원해 주는 이들에게 50장의 엽서를 썼다.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지만 보람찬 하루였다. 3월 30일 레테에서 방송팀과 합류했다. 1년 전 여섯 명이었던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대규모 방송팀이었다.
P.279
4월 18일 6시 아침식사를 하고 6시 50분 위성 연결을 마친 후 생방송에 출연했다. 캠프1을 향해 출발하는데 생방송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 버거웠다. 다큐 촬영할 때는 카메라가 나를 따라오는 것이라 속도만 늦춰주면 됐는데 생방송은 많은 사람의 생각과 입장에 맞춰야 해 등반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방송 때문에 흔들려선 안 된다고 다짐했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내 방식대로 등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4월 25일에 1차 정상시도에 맞추어 22일 오전 7시 베이스캠프를 출발해 곧바로 캠프2까지 진출했고 이튿날은 캠프3까지 진출했다. 안나푸르나 등반은 캠프간 이동 중에 눈사태가 많이 나서 상당히 위험한 산이다. 캠프2를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캠프3 가는 계곡에서 눈사태가 났다. 나보다 먼저 출발한 우리 팀 셰르파들에게 후폭풍이 덮쳤고 그들은 모두 시야에서 사라졌다. 가슴이 철렁했다. 잠시 후 후폭풍이 가라앉으면서 한 명 두 명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모두 무사했다.
P.286
나는 등반 때문에 다시 직장에서 쫓겨나는 시련을 딛고 K2 등반 성공 후 브로드피크까지 연속등정을 시도했다. 피를 토하는 고통을 견디며 8,400미터 이상 두 개의 고봉 마칼루와 로체를 연속 등정했다. 낭가파르바트 등반에서는 언론에 의해 라이벌로 그려져 있는 고미영의 죽음으로 큰 충격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그 역시 극복하고 다음 등반을 이어나갔다. 14좌 마지막 봉우리인 안나푸르나 등반은 2009년부터 두 번에 걸쳐 시도해 결국 2010년 4월 27일 정상에 서면서 ‘세계 여성 최초 14좌 완등’ 기록을 세웠다. 내 이름은 전 세계에 알려졌다.
“아! 이 얼마나 역사적인 순간입니까! 만세~!”
2010년 4월 27일 현지 시각 오후 3시(한국시각 6시 15분) 나는 히말라야 14좌 마지막 봉우리 안나푸르나(8,091m) 꼭대기에 태극기를 꽂았다. 종일 전국에 생중계된 나의 등정은 “천안함사건으로 암울했던 국내에 단비 같은”(<연합뉴스>), “스산한 봄을 환하게 밝힌”(<동아일보> 특별기고, 김서령) 소식이 됐다.
히말라야 14좌 등정은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많은 여성이 도전했지만 꿈을 이루지 못하고 몇몇은 죽음을 맞았다. 여성山악인 최초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언론은 “희박한 산소”, “낮은 기압”, “가파른 경사”를 “작은 체구의 한국 여성”이 온몸으로 기어올라 일궈낸 “아름다운 승리”라고 극찬했다.
2007년 K2(8,611m) 등반에 성공한 후 히말라야 14좌 도전에 뜻을 세웠다. 이후 스페인의 에두르네 파사반과 독일의 겔렌데 칼텐부르너 두 여성이 도전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세계 여성 최초’ 기록보다 “지금까지 남녀를 통틀어 15개월 동안 8,000미터 8개 봉을 무산소로 오른 전무후무한 사람”이라는 라인홀트 메스너(Reinhold Messner, 인류 최초 히말라야 14좌 완등, 최고봉 에베레스트 무산소등정)의 평가에 더 큰 자부심을 갖는다. 어처구니없게 칸첸중가(8,586m) 등반이 ‘논란 중’ 꼬리표를 달게 됐지만 두 봉우리씩 연속적으로 1년에 5~6개 봉우리에 도전한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다.
히말라야에 도전한 여성은 많았지만 대다수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그 이유를 메스너는 “100년 전 남성등반가들은 여성등반가들과 비교되는 것을 싫어하고 뛰어난 여성등반가의 출현을 못마땅하게 여겨 의도적으로 막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P.11
사람의 山은 자연의 山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고 험했다. 가늠하기 어려운 山, 화내는 山, 시기하는 山, 차별하는 山, 왜곡하는 山, 상처 주는 山, 상처 받는 山. 사과하지 못하는 山, 용서하지 못하는 山. 사람의 山은 ‘갈등의 크레바스’투성이다. 아무리 올라가도 정상은 가늠할 수 없었다. 내가 넘지 못한 사람의 山이 어디 타인뿐이랴. 나는 나라는 山도 넘지 못했다.
P.14
성공과 영광의 순간만 있지는 않았다. 하늘에 다가갈수록 죽음과 가까워짐을 느끼고 죽음에 직면하기도 했던 나에게 가장 귀중한 가치는 ‘살아있음’이다. 고소에서 피를 토하며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나에겐 일상으로 돌아와 숨 쉴 수 있는 것이 행복이었다. 악천후를 뚫고 오르려는 ‘나’와 자연의 섭리에 순응해 무사히 내려가려는 ‘나’는 끊임없이 충돌했다.
자연이 주는 시련에는 감정이 없다. 섭리대로 나아갈 뿐이다. 인간은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면 된다. 정상에 다다를 때까지 정진하고 베이스캠프로 살아 내려오기까지 쉼 없이 걸어야 등반이 완성된다. 최고봉들을 오르내리며 수천만 걸음을 걷고 나서야 ‘한 걸음’의 의미를 알게 됐다. 오르리라는 수만 번의 꿈보다 내딛는 한 걸음이 중요하다.
인생이 드라마틱한 것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 때문이다. 자신의 미래를 알면 인생이 얼마나 따분할까. 처음 山에 다닐 때만 해도 고山등반은 상상도 못했고, ‘철밥통’을 버리고 7대륙 최고봉과 히말라야 14좌를 등정하리라곤 꿈에도 몰랐다. 유명해짐과 동시에 혹독한 유명세를 치르리라는 것도 알 수 없었다. 등山은 내 삶의 전부다. 山을 빼고는 말할 수 없을 만큼 山은 내 삶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그야말로 ‘나의 심장’(오은선, 류태호, 2018)이다.
P.38
1번은 1999년 안나푸르나로 등반을 떠날 때까지 우리와 말도 섞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소식은 언론을 통해 듣게 됐다. 그녀는 1999년 엄홍길 대장과 안나푸르나 정상에 섰지만 하산 도중 추락사 하면서 영영 우리와 화해하지 못했다.
그때 우리는 왜 이름 대신 번호를 붙였을까? 각자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닌 “국내 첫 여성 에베레스트 등정자”를 배출하기 위한 부속품처럼 취급됐기 때문이었을까.
에베레스트 등반은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며 취미로 등반을 하던 나를 죽음의 공포와 맞서야 하고 미래가 불확실한 고산등반가의 길로 접어들게 한 계기가 됐다.
P.43
먹고살기 위해 방문교사 일을 했다. 학생들 하교시간에 시작해 밤 9시가 넘어야 일이 끝나 새벽에 일어나 운동하기가 점점 더 어렵게 됐다. 직장과 원정대 일을 병행하다 보니 운동하는 날보다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암벽등반이나 주마링보다 종주하며 하중훈련 하는 것이 힘들었다. 힘들어 하면서도 산에 가는 일이 제일 신났다.
P.170
자연 앞에 절대 강자가 어디 있는가? 먼저 들어와 애쓴 보람이 없어 보였다. 모두에게 인정받아야 진정한 실력이지. 자신들만이 내세우는 게 무슨 실력일까? 겸손이라는 단어가 새삼 떠오르는 날이다. 그러면 나는 겸손한가? 되물어본다. 모르겠다. 여러 가지 실타래처럼 엉켜 있는 내 머릿속과 마음속의 잡념들부터 몰아내고 생각하자. 연이은 좋지 않은 날씨는 나에게 반성과 재정비 할 시간을 주는 거 같다. 역시 자연은 위대하다. 나의 몸과 마음의 자유를 위해 K2신께 기도드린다. (2007. 7. 8. 일기)
P.237
칸첸중가 등반 논란은 그 해 11월 24일 <한겨레신문>에 나에 관한 기사가 실리면서 시작됐다. 그 일로 나는 기자회견까지 하며 당시 상황을 마무리짓고 마지막 열네 번째 봉우리인 안나푸르나 등반 준비에만 집중했다.
이듬해인 2010년 8월 21일
나는 박 피디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블랙야크 회의실에서 두 시간 동안 칸첸중가 등반 논란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김재수는 나와 칸첸중가 등반을 같이 갔던 또 다른 셰르파 페마를 데리고 파키스탄으로 등반을 떠난 상태였다. 박 피디와 김재수가 한 편이 돼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했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P.244
칸첸중가 등반 논란에 대한 나의 양심은 정상에서 내가 외친 ‘풀샷’에 있다. 등반 떠나기 전 만난 월간 <산>의 한필석 기자와 안 기자로부터 정상이 애매한 경우 하늘을 배경으로 상반신만 찍는 경우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로체를 홀로 등반할 때 셀카를 찍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정상 부위를 찍고 셀카를 찍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등반을 마치고 철수하는 도중 나보다 하루 먼저 정상에 깃발을 설치한 팀을 만났었다. 그들이 나의 등정을 인정해 주는 메모를 써 주었었다.
그렇게 나의 히말라야 14좌 완등은 언론을 통해 표출된 남성산악인들과의 갈등으로 ‘세계 여성 최초’의 영광이 아니라 ‘논란 중’이란 상처만 안게 됐다. 목숨을 건 등반에 대해 스포츠적 관점에서 보도하던 언론과의 갈등은 표면적인 모습이었고, 내부로 들어가 보면 산악계 중심에 서 있던 남성산악인들과 갈등이었다.
P.274
혼자 트레킹 하며 지내는 동안 법정 스님의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을 읽었다.
『물, 바람, 햇빛, 나무, 공기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무상으로 준다. 자연의 혜택, 무상의 은혜와 보살핌』
새삼 자연의 은혜와 보살핌 속에 이어가고 있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가를 생각하게 됐다. 나를 성원해 주는 이들에게 50장의 엽서를 썼다.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지만 보람찬 하루였다. 3월 30일 레테에서 방송팀과 합류했다. 1년 전 여섯 명이었던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대규모 방송팀이었다.
P.279
4월 18일 6시 아침식사를 하고 6시 50분 위성 연결을 마친 후 생방송에 출연했다. 캠프1을 향해 출발하는데 생방송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 버거웠다. 다큐 촬영할 때는 카메라가 나를 따라오는 것이라 속도만 늦춰주면 됐는데 생방송은 많은 사람의 생각과 입장에 맞춰야 해 등반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방송 때문에 흔들려선 안 된다고 다짐했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내 방식대로 등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4월 25일에 1차 정상시도에 맞추어 22일 오전 7시 베이스캠프를 출발해 곧바로 캠프2까지 진출했고 이튿날은 캠프3까지 진출했다. 안나푸르나 등반은 캠프간 이동 중에 눈사태가 많이 나서 상당히 위험한 산이다. 캠프2를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캠프3 가는 계곡에서 눈사태가 났다. 나보다 먼저 출발한 우리 팀 셰르파들에게 후폭풍이 덮쳤고 그들은 모두 시야에서 사라졌다. 가슴이 철렁했다. 잠시 후 후폭풍이 가라앉으면서 한 명 두 명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모두 무사했다.
P.286
나는 등반 때문에 다시 직장에서 쫓겨나는 시련을 딛고 K2 등반 성공 후 브로드피크까지 연속등정을 시도했다. 피를 토하는 고통을 견디며 8,400미터 이상 두 개의 고봉 마칼루와 로체를 연속 등정했다. 낭가파르바트 등반에서는 언론에 의해 라이벌로 그려져 있는 고미영의 죽음으로 큰 충격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그 역시 극복하고 다음 등반을 이어나갔다. 14좌 마지막 봉우리인 안나푸르나 등반은 2009년부터 두 번에 걸쳐 시도해 결국 2010년 4월 27일 정상에 서면서 ‘세계 여성 최초 14좌 완등’ 기록을 세웠다. 내 이름은 전 세계에 알려졌다.
저자소개
세계 여성 최초 7대륙 최고봉, 히말라야 14좌 완등의 전설. 공무원을 그만두고 히말라야 등반에 입문했지만 남성 중심 산악계의 들러리라는 한계를 느끼고 2004년 한 해 동안 5대륙 최고봉을 오르며 국내 여성 최초로 7대륙 최고봉 등정에 성공했다. 2005년 다리부상을 극복하고 마흔이 넘은 나이에 K2 등정을 시작으로 히말라야 14좌를 모두 올랐다. 1년에 4개 봉우리씩 성공해 15개월 만에 8개 봉우리를 무산소로 오른 것은 세계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고려대에서 체육학 박사학위를 받고 학교와 기업 등에서 강연하고 있다. 2018년 국립공원관리공단 홍보대사에 위촉됐고 ‘열린의사회’ 볼룬투어(voluntourism)로 네팔 산악마을에서 봉사활동도 하고 있다.
서평
이순신이 영웅이 된 것은 용기와 지략으로 나라를 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하루하루가 백척간두인 전장에서 지친 심신을 달래기도 힘겨운 상황에서 그 날을 세세히 기록한 열정이 더 영웅적이다. 명량, 한산, 또 어느 바다에서, 그리고 노량에서 전사하기 한 달 전까지 7년. 밤이면 무거운 어깨, 떨리는 손으로 붓을 들어 한 획, 한 획 오늘을 반성하고 내일을 준비한 열정! 난중일기(亂中日記)가 없었다면 이순신도 없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우리는 알 길이 없다.
등반일기가 없었다면 오은선도 없다
[오은선의 한 걸음] 역시 ‘세계 여성 최초 히말라야 14좌, 7대륙 최고봉 등정’ 이상의 가치가 있다. 저자는 20년 가까운 고산등반 기간 목숨이 위태로운 극한의 상황에서 일기를 쓰고 메모를 했다. 이 책은 35권 분량의 기록을 압축해 한 권으로 엮은 것이다. 등반 과정의 디테일한 묘사는 기억을 재구성하지 않고 그 날 그 날 기록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결과다. 단점으로 보일 수 있는,감정의 기복이 심한 것 역시 그때 그때 상황과 체감을 있는 그대로 기술했기 때문이다. 호불호를 떠나 20년의 전 등반을 녹화하지 않는 이상 이처럼 생생한 등반기가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난중일기가 그렇듯 등반일기가 없었다면 오은선도 없었을 것이다. 저자는 등반을 하며 책을 쓰고, 책을 쓰듯 등반을 해온 셈이다. 일기는 과거이자 미래다. 실패의 기록이 성공의 지침서가 될 수 있음이 오은선 일기 곳곳에서 증명되고 있다.
꿈과 도전보다 현실 직시와 물러설 용기
불굴의 의지나 도전정신을 키우려는 사람은 이 책에서 별로 얻어갈 게 없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꿈과 도전’보다 ‘현실 직시’와 ‘물러설 용기’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 “산이 허락하지 않으면 돌아섰다”, “산은 감정이 없다. 산은 산이고 나는 나일 뿐이다. 산과 싸우지 않는다”는 산에 대한 태도는 ‘성공하는 비법’보다 ‘실패하지 않는 지혜’와 맞닿아 있다. 삶이든 일이든 무엇이든 성공보다 생존이 우선이며 본질적이다. 저자에게 한계는 극복하는 게 아니라 인정하는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고산등반가들 중 결코 적지 않은 수가 도전 중 유명을 달리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연의 山’이 가르쳐 준 ‘사람의 山’을 넘는 지혜
이 책에는 ‘자연의 산’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산’이 나온다. 저자는 “사람의 산은 히말라야 어떤 산보다 험준하고 변화무쌍해 넘지 못했다”고 토로한다. “산을 오르는 것은 결국 나와 그림자뿐”이라며 “자연의 산과 싸우지 않듯 사람의 산도 그렇게 대하자”고 제안한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고산등반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다. 산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일독을 권한다. 틀림없이 산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오늘도 ‘사람의 산’에서 한 걸음도 빠져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필독을 권한다.
등반일기가 없었다면 오은선도 없다
[오은선의 한 걸음] 역시 ‘세계 여성 최초 히말라야 14좌, 7대륙 최고봉 등정’ 이상의 가치가 있다. 저자는 20년 가까운 고산등반 기간 목숨이 위태로운 극한의 상황에서 일기를 쓰고 메모를 했다. 이 책은 35권 분량의 기록을 압축해 한 권으로 엮은 것이다. 등반 과정의 디테일한 묘사는 기억을 재구성하지 않고 그 날 그 날 기록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결과다. 단점으로 보일 수 있는,감정의 기복이 심한 것 역시 그때 그때 상황과 체감을 있는 그대로 기술했기 때문이다. 호불호를 떠나 20년의 전 등반을 녹화하지 않는 이상 이처럼 생생한 등반기가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난중일기가 그렇듯 등반일기가 없었다면 오은선도 없었을 것이다. 저자는 등반을 하며 책을 쓰고, 책을 쓰듯 등반을 해온 셈이다. 일기는 과거이자 미래다. 실패의 기록이 성공의 지침서가 될 수 있음이 오은선 일기 곳곳에서 증명되고 있다.
꿈과 도전보다 현실 직시와 물러설 용기
불굴의 의지나 도전정신을 키우려는 사람은 이 책에서 별로 얻어갈 게 없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꿈과 도전’보다 ‘현실 직시’와 ‘물러설 용기’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 “산이 허락하지 않으면 돌아섰다”, “산은 감정이 없다. 산은 산이고 나는 나일 뿐이다. 산과 싸우지 않는다”는 산에 대한 태도는 ‘성공하는 비법’보다 ‘실패하지 않는 지혜’와 맞닿아 있다. 삶이든 일이든 무엇이든 성공보다 생존이 우선이며 본질적이다. 저자에게 한계는 극복하는 게 아니라 인정하는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고산등반가들 중 결코 적지 않은 수가 도전 중 유명을 달리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연의 山’이 가르쳐 준 ‘사람의 山’을 넘는 지혜
이 책에는 ‘자연의 산’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산’이 나온다. 저자는 “사람의 산은 히말라야 어떤 산보다 험준하고 변화무쌍해 넘지 못했다”고 토로한다. “산을 오르는 것은 결국 나와 그림자뿐”이라며 “자연의 산과 싸우지 않듯 사람의 산도 그렇게 대하자”고 제안한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고산등반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다. 산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일독을 권한다. 틀림없이 산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오늘도 ‘사람의 산’에서 한 걸음도 빠져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필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