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상세정보
Detail Information
영원한 유산 : 심윤경 장편소설
총서명
문학동네 장편소설{}
저자
출판사
출판일
20210104
가격
₩ 17,000
ISBN
9788954676281
페이지
283 p.
판형
128 X 188 mm
커버
Book
책 소개
작품에서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 작가, 자신의 작품을 치열하게 경신해나가는 작가 심윤경의 장편소설. 새해 첫날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려진 갓난아기로 발견된 소녀의 혹독한 성장담 <설이>를 펴낸 후 근 2년 만이다. <영원한 유산>은 작가의 오래된 앨범 속 사진 한 장에서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의 작가와 할머니가 함께 찍힌 사진 속 낯선 건물, 유럽식 뾰족탑과 흰 톱니모양 테두리를 두른 창문이 인상적인, 크고 아름다운 근대 건축물에 대한 호기심에서 말이다. 지금은 사라진 그 건물은 알고 보니 악명 높은 친일파 윤덕영이 지은 것으로, 그의 아호를 따 '벽수산장'이라 불렸던 곳이다. 해방 후 국유화되어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UN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 줄여서 언커크(UNCURK)라 불린 곳의 본부로 쓰였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1973년 봄 철거되어 놀랍도록 빠르게 잊혔다. 한 동네에서 나고 자라 현재도 거주중인 작가에게 이 잊힘은 매우 유별난 것으로 남았다. 사진 속 벽수산장을 인지한 2012년 이후 8년간 작가를 사로잡았던 대저택의 존속과 소멸. 여기에 작가적 상상력이 결합되며 완전히 새로운 또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잊힌 것과 존재하는 것, 오래된 소명과 새로운 운명을 품은 소설로.
목차
영원한 유산
작가의 말
참고문헌
작가의 말
참고문헌
본문발췌
P.242
더럽혀진 것. 모욕받은 것. 그렇게 쉽게 조롱받는 것. 얼굴도 보지 못한 아버지가 목숨과 바꾼 것이 겨우 그렇게 미약한 것. 그런 것들이 해동의 푸른 새벽에 끝도 없는 파문을 일으켰다.
P.274
저택은 다시 복구될까? 아니면 이대로 무너져 기억 속으로 사라질까? 해동은 어느 쪽을 바라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저택은 나라의 것 같기도, 유엔의 것 같기도, 윤원섭의 것 같기도 했다. 친일파의 자손이 빌붙은 썩어빠진 집이기도 했고 세상에 다시 없이 아름다운 것이기도 했다. 적산, 그것은 그렇게 사람을 혼동되게 했다. 썩어문드러져 짜내야 할 고름인지, 다시 얻지 못할 귀중한 자산인지 알 수 없었다.
P.92
하지만 이날 그는 그 짧고 복잡하지 않은 말을 전달하는 동안, 통역사의 임무가 언어의 소통을 넘어 한 인간을 통째 전달하는 것도 넘어 한 세상과 한 시대의 명예까지 혼자 어깨에 짊어지고 만 것 같은 견디기 힘든 부담감에 짓눌리고 말았다. 그것은 그에게 몹시 부당하게 느껴졌고 심지어 불행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P.233
스물네 살에 끝나버린 한 사람의 가혹한 운명이 오해로 인해 결정된 것이라면, 해동의 인생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 가혹함의 먹물을 온몸으로 뒤집어쓴 것을 생각하면 더욱 억장 무너지는 일이지만, 그냥 세상은 그런 것이었다. 알고 보면 다 별일이 아니었다.
P.119
“아버님은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셨지만 조선의 자존심을 세우고자 했고, 그분이 뜻하는 바대로 그 길을 걸으셨네.”
“어떤 길을 걸으셨죠?”
“바로 자네가 알고 있는, 이 저택이지.”
P.215
공원들과 해동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경원시의 벽이 있었고 해동은 그것을 신분 차이가 아니라 특권 때문이라고 바꾸어 생각하기를 좋아했다. 이제야 그것을 후회했다. 갑자기 윤원섭이 나타났을 때 특권으로 높은 담을 치고 살던 해동은 불시에 고립되었다.
P.223
가장 안전한 길이 있다면 그 길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어디가 안전한 길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P.74~75
먼 훗날 그는 그날 그가 고향에 가서 위태롭게 부서지려 하는 어떤 것, 굳건하지 않았던 신념 같은 것들을 보강하기 위한 구호활동을 벌였다고 해석하게 되었다. 그 방문에서 만났던 늙은 고모 같은 사람들, 잊힘과 존재함의 경계에 수십 년간 그대로 머문 기억들, 쇠락하였으나 오래된 소명을 떠올리게 하는 선교사집 같은 사물들이 붕괴 위기에 처한 그의 세계를 어떻게 구원하였는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고향에서 돌아올 때 그는 조금 더 침착해져 있었다.
P.226
해동은 그때처럼 고모의 이불자락에 고개를 파묻고 흐느껴 울었다. 해동의 졸업과 입학을 중요하게 여겼던 단 한 사람, 고모가 세상을 떠나면 그때는 정말로 천애고아였다.
P.58
고모는 온몸에서 물기가 다 빠져나간 고목처럼 파삭파삭했다.
죽은 막냇동생 이야기를 할 때에도 물기 없이 덤덤했다. 하지만 해동은 아버지가 옥에서 나올 때, 죽을 때, 애간장이 녹도록 울던 고모를 눈으로 본 것 같은 착각 속에 살아왔다. 고모의 무표정은 그런 것들이 다 녹아 있는 것이었다. 하염없이 울고, 시도 때도 없이울고, 멍하니 넋이 나가고, 오랜 시간 멍했던 것들이 다 지나간 뒤에 찾아온 굳은살 같은 얼굴이었다.
P.232
˝원래부터, 그게 아주 대단한 일은 아니었으니까요. 인쇄기를숨겼다가 발각된 정도라면 뭐, 큰일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어차피 그 시골에서 무슨 대단한 일을 하신 건 아닐 테니까요. 안골의이성준이건 눈티재의 이성준이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그냥 사촌형이라는 작자가, 누워 계신 고모님 앞에서 말하는 꼴이 하도 아니꼬워서, 제가 속이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사내들 하는 짓이 뭐그런 것이지요.˝
P.67
그것을 두고 간 자도 차지한 자도똑같이 욕하는 목소리였다. 적산, 적이 남겨두고 간 자산이라는 표현에는 불을 지르고 싶은 적의와 한입에 삼키고 싶은 상반된 욕망이 뒤섞여 듣기만 해도 잠잠하던 피마저 들끓게 했다.
P.235
그런데 왜 나만? 다른 사람들은 이런 고민 따위 조금도 하지않고 잘사는데, 왜 나만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아버지에이어서 나까지, 내 일도 아닌 것의 대가를 왜 내가. 나만, 치러야하는 것인지.
P.245
막걸리로 흐려진 눈을 애써 껌벅거리며, 해동은 진형을 보았다.
형제자매들에게 둘러싸인 그녀는 편안해 보였다. 부숭부숭한 어머니와 억센 형제자매들은 진형의 깊은 뿌리였다. 해동이 가지지못한 그 건강하고 단단한 뿌리들을 해동에게 나누어줄 것이다.
해동은 쉬지 않고 떠드는 제 주둥이를 틀어막아버리고 싶었다.
실은 말없이 걷고 있는 진형에게 묻고 싶었다. 내가 지금 도저히 아무 생각도 못하겠는데, 언커크에 계속 다녀야 할지. 월급이많긴 하다. 서울 시내를 뒤져도 이만한 일자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윤원섭 그 여자는 정말이지, 부끄러움을 모르는 친일파가 가짜 경력으로 승승장구하는데, 나더러 애커넌 씨가 아닌 그 여자 밑에서 일을 하라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라도 일을 계속해야 하는
P.245
해동은 아주 자연스럽게, 고모의 상가에 모여 앉은 이 자리가 말하자면 양가의 상견례나 다름없는 것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고모는 시신이 되어 땅에 묻히기 전, 고모의 육신이 이 땅에 머무는마지막 순간에 해동의 부모로서 상견례에 함께했다. 그 미미한 연결이 해동을 기쁘게 했다. 겨우 그것밖에 안 되더라도 해동에게는우주를 가득 채울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P.134
서울 처녀들과 상경 처녀들은 어쩌면 이렇게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차이가 나는 걸까. 남들이 저를 보아도, 제아무리 유창하게 꼬부랑말을 지껄이고 다녀도 첫눈에 서울내기가 아닌 것을 알아챌까, 해동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왠지 우울해졌다.
P.278
적은 언제나 뻔뻔하다. 잘못을 뉘우치는 법은 결코 없다. 윤원섭처럼 뻔뻔한 적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득을 취한 것으로도 모자라 커다란 명예마저 챙기려 한다. 이익과 명예 둘 중 하나는 놓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적의 행태는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적의(敵意)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적들은 마지막 시험과도 같이 유산(遺産)을 남기고 떠난다. 적이 남긴 유산, 적산(敵産),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적과 함께 말살해야 할 폐해인가, 남기고 지켜야 할 공동의 자산인가.
—— 작가의 말 중에서
P.279
이 소설에는 친일파와 왕가, 국제기구와 대저택 같은 거창한 것들이 등장하지만 진정한 주인공은 사람을 이리저리 떠밀어대는이념의 밀물과 썰물 속에서 정직과 존엄을 지키려 애썼던 평범한사람들이다. 저택의 존속과 소멸에 아무런 결정권을 가지지 못했던 해동이 애꿎게 그의 직장을 내놓은 것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역사의 제단에 목숨이나 밥벌이할 직장 같은 것들을 올렸는데, 그것은 실상 그들이 가진 전부였다. 노랫말처럼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남김없이 역사에 파묻고 잊혀져간 수많은 그분들이야말로 진정한우리 역사의 주인공들이며, 우리는 각자 그렇게 우주의 중심에 살고 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P.248
해동이 가진 것은 온통 미미한 것들뿐이었다. 아버지가 돼지막에 숨겼던 인쇄기, 생전에 고모가 쌓은 덕과 인정, 애커넌 씨와 개인간 고용으로 만들어진 언커크의 일자리. 그런 미미한 것들은 길가의 거미줄처럼 금세 더럽혀지고 아무 발길에나 찢어지고 제일먼저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런 것이 존재했다고 증언해줄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져 그것이 실제 있었다고 말할 근거조차 희박해지는 것들뿐이었다. 그에 비하면 윤덕영은, 벽수산장은, 언커크는 얼마나 확실하고 단단하고 부인할 수 없이 존재하는가.
더럽혀진 것. 모욕받은 것. 그렇게 쉽게 조롱받는 것. 얼굴도 보지 못한 아버지가 목숨과 바꾼 것이 겨우 그렇게 미약한 것. 그런 것들이 해동의 푸른 새벽에 끝도 없는 파문을 일으켰다.
P.274
저택은 다시 복구될까? 아니면 이대로 무너져 기억 속으로 사라질까? 해동은 어느 쪽을 바라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저택은 나라의 것 같기도, 유엔의 것 같기도, 윤원섭의 것 같기도 했다. 친일파의 자손이 빌붙은 썩어빠진 집이기도 했고 세상에 다시 없이 아름다운 것이기도 했다. 적산, 그것은 그렇게 사람을 혼동되게 했다. 썩어문드러져 짜내야 할 고름인지, 다시 얻지 못할 귀중한 자산인지 알 수 없었다.
P.92
하지만 이날 그는 그 짧고 복잡하지 않은 말을 전달하는 동안, 통역사의 임무가 언어의 소통을 넘어 한 인간을 통째 전달하는 것도 넘어 한 세상과 한 시대의 명예까지 혼자 어깨에 짊어지고 만 것 같은 견디기 힘든 부담감에 짓눌리고 말았다. 그것은 그에게 몹시 부당하게 느껴졌고 심지어 불행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P.233
스물네 살에 끝나버린 한 사람의 가혹한 운명이 오해로 인해 결정된 것이라면, 해동의 인생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 가혹함의 먹물을 온몸으로 뒤집어쓴 것을 생각하면 더욱 억장 무너지는 일이지만, 그냥 세상은 그런 것이었다. 알고 보면 다 별일이 아니었다.
P.119
“아버님은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셨지만 조선의 자존심을 세우고자 했고, 그분이 뜻하는 바대로 그 길을 걸으셨네.”
“어떤 길을 걸으셨죠?”
“바로 자네가 알고 있는, 이 저택이지.”
P.215
공원들과 해동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경원시의 벽이 있었고 해동은 그것을 신분 차이가 아니라 특권 때문이라고 바꾸어 생각하기를 좋아했다. 이제야 그것을 후회했다. 갑자기 윤원섭이 나타났을 때 특권으로 높은 담을 치고 살던 해동은 불시에 고립되었다.
P.223
가장 안전한 길이 있다면 그 길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어디가 안전한 길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P.74~75
먼 훗날 그는 그날 그가 고향에 가서 위태롭게 부서지려 하는 어떤 것, 굳건하지 않았던 신념 같은 것들을 보강하기 위한 구호활동을 벌였다고 해석하게 되었다. 그 방문에서 만났던 늙은 고모 같은 사람들, 잊힘과 존재함의 경계에 수십 년간 그대로 머문 기억들, 쇠락하였으나 오래된 소명을 떠올리게 하는 선교사집 같은 사물들이 붕괴 위기에 처한 그의 세계를 어떻게 구원하였는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고향에서 돌아올 때 그는 조금 더 침착해져 있었다.
P.226
해동은 그때처럼 고모의 이불자락에 고개를 파묻고 흐느껴 울었다. 해동의 졸업과 입학을 중요하게 여겼던 단 한 사람, 고모가 세상을 떠나면 그때는 정말로 천애고아였다.
P.58
고모는 온몸에서 물기가 다 빠져나간 고목처럼 파삭파삭했다.
죽은 막냇동생 이야기를 할 때에도 물기 없이 덤덤했다. 하지만 해동은 아버지가 옥에서 나올 때, 죽을 때, 애간장이 녹도록 울던 고모를 눈으로 본 것 같은 착각 속에 살아왔다. 고모의 무표정은 그런 것들이 다 녹아 있는 것이었다. 하염없이 울고, 시도 때도 없이울고, 멍하니 넋이 나가고, 오랜 시간 멍했던 것들이 다 지나간 뒤에 찾아온 굳은살 같은 얼굴이었다.
P.232
˝원래부터, 그게 아주 대단한 일은 아니었으니까요. 인쇄기를숨겼다가 발각된 정도라면 뭐, 큰일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어차피 그 시골에서 무슨 대단한 일을 하신 건 아닐 테니까요. 안골의이성준이건 눈티재의 이성준이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그냥 사촌형이라는 작자가, 누워 계신 고모님 앞에서 말하는 꼴이 하도 아니꼬워서, 제가 속이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사내들 하는 짓이 뭐그런 것이지요.˝
P.67
그것을 두고 간 자도 차지한 자도똑같이 욕하는 목소리였다. 적산, 적이 남겨두고 간 자산이라는 표현에는 불을 지르고 싶은 적의와 한입에 삼키고 싶은 상반된 욕망이 뒤섞여 듣기만 해도 잠잠하던 피마저 들끓게 했다.
P.235
그런데 왜 나만? 다른 사람들은 이런 고민 따위 조금도 하지않고 잘사는데, 왜 나만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아버지에이어서 나까지, 내 일도 아닌 것의 대가를 왜 내가. 나만, 치러야하는 것인지.
P.245
막걸리로 흐려진 눈을 애써 껌벅거리며, 해동은 진형을 보았다.
형제자매들에게 둘러싸인 그녀는 편안해 보였다. 부숭부숭한 어머니와 억센 형제자매들은 진형의 깊은 뿌리였다. 해동이 가지지못한 그 건강하고 단단한 뿌리들을 해동에게 나누어줄 것이다.
해동은 쉬지 않고 떠드는 제 주둥이를 틀어막아버리고 싶었다.
실은 말없이 걷고 있는 진형에게 묻고 싶었다. 내가 지금 도저히 아무 생각도 못하겠는데, 언커크에 계속 다녀야 할지. 월급이많긴 하다. 서울 시내를 뒤져도 이만한 일자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윤원섭 그 여자는 정말이지, 부끄러움을 모르는 친일파가 가짜 경력으로 승승장구하는데, 나더러 애커넌 씨가 아닌 그 여자 밑에서 일을 하라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라도 일을 계속해야 하는
P.245
해동은 아주 자연스럽게, 고모의 상가에 모여 앉은 이 자리가 말하자면 양가의 상견례나 다름없는 것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고모는 시신이 되어 땅에 묻히기 전, 고모의 육신이 이 땅에 머무는마지막 순간에 해동의 부모로서 상견례에 함께했다. 그 미미한 연결이 해동을 기쁘게 했다. 겨우 그것밖에 안 되더라도 해동에게는우주를 가득 채울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P.134
서울 처녀들과 상경 처녀들은 어쩌면 이렇게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차이가 나는 걸까. 남들이 저를 보아도, 제아무리 유창하게 꼬부랑말을 지껄이고 다녀도 첫눈에 서울내기가 아닌 것을 알아챌까, 해동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왠지 우울해졌다.
P.278
적은 언제나 뻔뻔하다. 잘못을 뉘우치는 법은 결코 없다. 윤원섭처럼 뻔뻔한 적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득을 취한 것으로도 모자라 커다란 명예마저 챙기려 한다. 이익과 명예 둘 중 하나는 놓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적의 행태는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적의(敵意)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적들은 마지막 시험과도 같이 유산(遺産)을 남기고 떠난다. 적이 남긴 유산, 적산(敵産),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적과 함께 말살해야 할 폐해인가, 남기고 지켜야 할 공동의 자산인가.
—— 작가의 말 중에서
P.279
이 소설에는 친일파와 왕가, 국제기구와 대저택 같은 거창한 것들이 등장하지만 진정한 주인공은 사람을 이리저리 떠밀어대는이념의 밀물과 썰물 속에서 정직과 존엄을 지키려 애썼던 평범한사람들이다. 저택의 존속과 소멸에 아무런 결정권을 가지지 못했던 해동이 애꿎게 그의 직장을 내놓은 것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역사의 제단에 목숨이나 밥벌이할 직장 같은 것들을 올렸는데, 그것은 실상 그들이 가진 전부였다. 노랫말처럼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남김없이 역사에 파묻고 잊혀져간 수많은 그분들이야말로 진정한우리 역사의 주인공들이며, 우리는 각자 그렇게 우주의 중심에 살고 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P.248
해동이 가진 것은 온통 미미한 것들뿐이었다. 아버지가 돼지막에 숨겼던 인쇄기, 생전에 고모가 쌓은 덕과 인정, 애커넌 씨와 개인간 고용으로 만들어진 언커크의 일자리. 그런 미미한 것들은 길가의 거미줄처럼 금세 더럽혀지고 아무 발길에나 찢어지고 제일먼저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런 것이 존재했다고 증언해줄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져 그것이 실제 있었다고 말할 근거조차 희박해지는 것들뿐이었다. 그에 비하면 윤덕영은, 벽수산장은, 언커크는 얼마나 확실하고 단단하고 부인할 수 없이 존재하는가.
저자소개
2002년 [나의 아름다운 정원]으로 제7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5년 [달의 제단]으로 제6회 무영문학상을, 2021년 [영원한 유산]으로 제5회 이호철통일로문학상 특별상을 받았다. 장편소설 [이현의 연애] [사랑이 달리다] [사랑이 채우다] [설이], 연작소설 [서라벌 사람들], 동화 [화해하기 보고서], 산문집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등을 썼다. 수상 : 2005년 무영문학상, 2002년 한겨레문학상 인터뷰 : 소통의 창구를 만드는 소설가- 2004.07.22
서평
“이 소설은 그 유별난 잊혀짐에 대해 8년간 궁리한 결과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 [달의 제단] [설이]…
장편소설의 마이스터, 심윤경 문학의 결정판
작품에서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 작가, 자신의 작품을 치열하게 경신해나가는 작가 심윤경의 신작 장편소설이 출간되었다. 새해 첫날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려진 갓난아기로 발견된 소녀의 혹독한 성장담 [설이]를 펴낸 후 근 2년 만이다. 신작 [영원한 유산]은 작가의 오래된 앨범 속 사진 한 장에서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의 작가와 할머니가 함께 찍힌 사진 속 낯선 건물, 유럽식 뾰족탑과 흰 톱니모양 테두리를 두른 창문이 인상적인, 크고 아름다운 근대 건축물에 대한 호기심에서 말이다. 지금은 사라진 그 건물은 알고 보니 악명 높은 친일파 윤덕영이 지은 것으로, 그의 아호를 따 ‘벽수산장’이라 불렸던 곳이다. 해방 후 국유화되어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UN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 줄여서 언커크(UNCURK)라 불린 곳의 본부로 쓰였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1973년 봄 철거되어 놀랍도록 빠르게 잊혔다. 한 동네에서 나고 자라 현재도 거주중인 작가에게 이 잊힘은 매우 유별난 것으로 남았다. 사진 속 벽수산장을 인지한 2012년 이후 8년간 작가를 사로잡았던 대저택의 존속과 소멸. 여기에 작가적 상상력이 결합되며 완전히 새로운 또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잊힌 것과 존재하는 것, 오래된 소명과 새로운 운명을 품은 소설로.
“이 세상에는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이분법의 시대가 남긴 새로운 회색지대
경계에 선 인물과 시대의 초상을 만나다
배경은 해방 후 20년이 지난 1966년, 주무대는 옥인동 ‘벽수산장’이다.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의 아들 이해동은 유엔 산하 한국통일부흥위원회(언커크UNCURK)에서 통역 비서로 일하고 있다. 현재 언커크의 사무실로 쓰이고 있는 대저택 벽수산장은 친일파였던 윤덕영이 지은 별장이었다. 달러로 월급을 받으며 ‘나 정도면 괜찮은 삶이지’ 생각하는 소시민 청년 이해동 앞에 어느 날 윤덕영의 막내딸 윤원섭이 나타난다. 윤원섭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한 뒤 국제기구로 쓰이는 벽수산장으로 돌아와 아무도 몰랐던 비밀의 방을 찾아내며 언커크에 파견 온 외교관들에게 저택의 옛 주인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각인시킨다. 기세등등해진 윤원섭의 뻔뻔한 말들을 통역하며 이해동의 삶에는 서서히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이해동에게는 적산(敵産)이며 윤원섭에게는 유산(遺産)인 저택 벽수산장이 그 모든 것을 굽어보는 가운데, 상반된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은 두 인물의 전혀 다른 삶의 행보가 박진감 넘치게 그려진다. 그리고 그해 식목일, 벽수산장에서 기묘한 불길이 치솟는데……
*
등장인물
이해동(27세)
언커크에서 호주 대표의 통역 비서로 일한다. 조실부모하고 선교사 손에 자라며 영어를 배운 인물. 얼굴도 모르는 그의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혀가 죽었다고 하는데, 역사에 이름자 하나 남기지 못한 수많은 죽음 중 하나였을 뿐이다. 해동이 그 사실에 매여 사는 건 아니다. 앞 세대의 일이었고, 자신은 자신의 삶을 잘 꾸려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윤원섭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윤원섭이 자신의 근무지인 언커크(벽수산장)를 제집 드나들듯 하며 시절 지난 위세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것이 자신의 상사와 언커크 수뇌부들의 눈에 들기 전까지는. 결국 자신이 윤원섭의 말을 통역해 입밖에 내기 전까지는.
하지만 윤원섭 그 여자는 정말이지, 부끄러움을 모르는 친일파가 가짜 경력으로 승승장구하는데, 나더러 애커넌 씨가 아닌 그 여자 밑에서 일을 하라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라도 일을 계속해야 하는지. 그런데 왜 나만? 다른 사람들은 이런 고민 따위 조금도 하지 않고 잘사는데, 왜 나만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아버지에 이어서 나까지, 내 일도 아닌 것의 대가를 왜 내가, 나만, 치러야 하는 것인지. _234~235쪽
윤원섭(51세)
이완용보다 더한 친일파라 불렸던 윤덕영의 막내딸. 대귀족의 자손이었으나 해방 후 가세가 기울고 집(벽수산장)은 적산으로 국유화되었다. 사기죄로 2년 2개월 형을 살고 나왔다. 출소 후 가장 먼저 챙긴 것이 자신의 샤넬백일 만큼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한 사람이다. 귀족의 혈통과 감옥의 어두움, 그리고 붉은 대저택의 비밀스러운 신비까지 한데 두른 채 저택에 숨겨진 비밀 통로와 그곳을 여는 두 개의 열쇠로 언커크 사람들을 휘어잡는다. 수완이 좋고 눈치가 빠르며 사람을 부릴 줄 알아 모든 상황과 말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능수능란하게 가져간다. 결국 ‘문화복원 디렉터’로 언커크에 합류하여 예산까지 주무르게 되는데… 과연 윤원섭이 진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무례한 자는 대체 누구인가? 어찌 너 같은 쭈그러진 월급쟁이 따위가 해평 윤씨를 운운한다는 말이냐? 너 같은 자 백만 명을 합쳐도 감히 내 아버지 윤덕영 한 사람을 당해낼 수 없었을 거란 말이다!” _183쪽
애커넌(47세)
언커크 호주 대표로 이해동의 고용주이다. 외교관답게 처세에 능하고 합리적인 인물로, 독립운동에도 친일 행위에도 부채감 없는 제삼자의 시각을 대변한다. 윤원섭의 사기꾼 기질을 의심하지 않는 건 아니나 몰락한 묘령의 귀족에게서 풍기는 특별한 분위기와 그가 기억하고 있는 벽수산장의 내력에 매료된 것 역시 사실이다. 윤원섭에게 연모의 정을 느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기도 하지만 정말 그럴까? 언커크가 유엔 기구이나 국제 정세와 동떨어질 수 없는 법, 애커넌은 점점 위태로워지는 언커크의 위신을 회복하는 데 벽수산장의 특별한 스토리를 활용하고자 한다.
“윤자작의 일족이 일본 지배 시절의 행적으로 비난받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의 대한민국과 그때의 조선은 다른 세상이 아닌가? 나는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의 형편은 그때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_97쪽
손진형(24세)
해동이 부모처럼 따랐던 고모가 소개해준 여성. 지방에서 상경한 지 삼사 년이 됐다지만 세련된 구석은 보이지 않는다. 요컨대 ‘서울 처녀’와는 한눈에 다른 ‘상경 처녀’이다. 작은 섬유회사에서 경리로 일한다. 유복하진 않지만 3남2녀의 막내딸로 형제간의 우애와 가족의 정이 끈끈한 집에서 자랐다. 해동에게는 한 번도 없었던 다복한 가정의 품. 진형은 자신이 가진 건강하고 든든한 그 뿌리들을 해동에게 나눠줄 수 있을까.
“화요일에 별일이 없으시면 언니네 같이 가실래요? 다른 형제들도 거기서 보기로……”
“화요일요?”
“네, 그다음날이 식목일이라서 형부랑 다들 쉬니까. 다음날 아침에 나무 심으러 다 같이 소풍 가자고. 저녁때 저 퇴근하면 만나서 같이 가요. 언니네는 충현동이에요.” _257쪽
*
희대의 친일파가 남긴 대저택과 그것에 빌붙어 다시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그의 막내딸, 한없이 뻔뻔하고 그것에 당당한 적에 대한 미움과 부인할 수 없이 아름다운 저택 사이에 선 소시민 청년 해동. 작가는 벽수산장과 언커크라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 삼고 그 위에 윤원섭과 이해동 가상의 두 인물을 내세워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로 우리를 이끈다. 이쪽 아니면 저쪽이라는 이분법의 엄혹한 시절을 지나, 양쪽이 얽히고설켜 기묘한 회색지대가 생성되는 시기란 역사 속에 종종 등장하곤 한다. 그리고 그 경계에 선 인물들이 자신의 가치관과 삶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어렵게 선택한 길들이 있다.
“친일파와 왕가, 국제기구와 대저택 같은 거창한 것들이 등장하지만 진정한 주인공은 사람을 이리저리 떠밀어대는 이념의 밀물과 썰물 속에서 정직과 존엄을 지키려 애썼던 평범한 사람들이다”라고 작가가 밝힌 소회는 그래서 더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한 사람의 인생을 조망하며 잘 담아내는 장편이 있는가 하면, 이 작품처럼 누군가의 인생에서 아주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해 담아내는 좋은 장편도 있다. 문장들이 쌓이고 쌓여 맥락 속에서 빛나기 시작할 때, 우리가 소설을 읽는 기쁨이 거기 있을 것이다. 인생의 불가해함을 말하는 것은 그토록 아름답고 슬픈 것이고, 그것이 소설의 시간이다.
해동이 가진 것은 온통 미미한 것들뿐이었다. (…) 그런 미미한 것들은 길가의 거미줄처럼 금세 더럽혀지고 아무 발길에나 찢어지고 제일 먼저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런 것이 존재했다고 증언해줄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져 그것이 실제 있었다고 말할 근거조차 희박해지는 것들뿐이었다. 그에 비하면 윤덕영은, 벽수산장은, 언커크는 얼마나 확실하고 단단하고 부인할 수 없이 존재하는가.
이 세상에는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흔들리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것들. 지난 석 달 동안 그것의 질긴 생명력을 경험하면서 해동은 그것이 ‘힘’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세상에는 부정할 수 없는 강력한 힘들이 있었다. 그것을 가지지 못한 입장에서는 분하고 고까울지언정 그것이 아예 없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_248~249쪽
[나의 아름다운 정원] [달의 제단] [설이]…
장편소설의 마이스터, 심윤경 문학의 결정판
작품에서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 작가, 자신의 작품을 치열하게 경신해나가는 작가 심윤경의 신작 장편소설이 출간되었다. 새해 첫날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려진 갓난아기로 발견된 소녀의 혹독한 성장담 [설이]를 펴낸 후 근 2년 만이다. 신작 [영원한 유산]은 작가의 오래된 앨범 속 사진 한 장에서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의 작가와 할머니가 함께 찍힌 사진 속 낯선 건물, 유럽식 뾰족탑과 흰 톱니모양 테두리를 두른 창문이 인상적인, 크고 아름다운 근대 건축물에 대한 호기심에서 말이다. 지금은 사라진 그 건물은 알고 보니 악명 높은 친일파 윤덕영이 지은 것으로, 그의 아호를 따 ‘벽수산장’이라 불렸던 곳이다. 해방 후 국유화되어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UN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 줄여서 언커크(UNCURK)라 불린 곳의 본부로 쓰였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1973년 봄 철거되어 놀랍도록 빠르게 잊혔다. 한 동네에서 나고 자라 현재도 거주중인 작가에게 이 잊힘은 매우 유별난 것으로 남았다. 사진 속 벽수산장을 인지한 2012년 이후 8년간 작가를 사로잡았던 대저택의 존속과 소멸. 여기에 작가적 상상력이 결합되며 완전히 새로운 또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잊힌 것과 존재하는 것, 오래된 소명과 새로운 운명을 품은 소설로.
“이 세상에는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이분법의 시대가 남긴 새로운 회색지대
경계에 선 인물과 시대의 초상을 만나다
배경은 해방 후 20년이 지난 1966년, 주무대는 옥인동 ‘벽수산장’이다.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의 아들 이해동은 유엔 산하 한국통일부흥위원회(언커크UNCURK)에서 통역 비서로 일하고 있다. 현재 언커크의 사무실로 쓰이고 있는 대저택 벽수산장은 친일파였던 윤덕영이 지은 별장이었다. 달러로 월급을 받으며 ‘나 정도면 괜찮은 삶이지’ 생각하는 소시민 청년 이해동 앞에 어느 날 윤덕영의 막내딸 윤원섭이 나타난다. 윤원섭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한 뒤 국제기구로 쓰이는 벽수산장으로 돌아와 아무도 몰랐던 비밀의 방을 찾아내며 언커크에 파견 온 외교관들에게 저택의 옛 주인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각인시킨다. 기세등등해진 윤원섭의 뻔뻔한 말들을 통역하며 이해동의 삶에는 서서히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이해동에게는 적산(敵産)이며 윤원섭에게는 유산(遺産)인 저택 벽수산장이 그 모든 것을 굽어보는 가운데, 상반된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은 두 인물의 전혀 다른 삶의 행보가 박진감 넘치게 그려진다. 그리고 그해 식목일, 벽수산장에서 기묘한 불길이 치솟는데……
*
등장인물
이해동(27세)
언커크에서 호주 대표의 통역 비서로 일한다. 조실부모하고 선교사 손에 자라며 영어를 배운 인물. 얼굴도 모르는 그의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혀가 죽었다고 하는데, 역사에 이름자 하나 남기지 못한 수많은 죽음 중 하나였을 뿐이다. 해동이 그 사실에 매여 사는 건 아니다. 앞 세대의 일이었고, 자신은 자신의 삶을 잘 꾸려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윤원섭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윤원섭이 자신의 근무지인 언커크(벽수산장)를 제집 드나들듯 하며 시절 지난 위세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것이 자신의 상사와 언커크 수뇌부들의 눈에 들기 전까지는. 결국 자신이 윤원섭의 말을 통역해 입밖에 내기 전까지는.
하지만 윤원섭 그 여자는 정말이지, 부끄러움을 모르는 친일파가 가짜 경력으로 승승장구하는데, 나더러 애커넌 씨가 아닌 그 여자 밑에서 일을 하라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라도 일을 계속해야 하는지. 그런데 왜 나만? 다른 사람들은 이런 고민 따위 조금도 하지 않고 잘사는데, 왜 나만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아버지에 이어서 나까지, 내 일도 아닌 것의 대가를 왜 내가, 나만, 치러야 하는 것인지. _234~235쪽
윤원섭(51세)
이완용보다 더한 친일파라 불렸던 윤덕영의 막내딸. 대귀족의 자손이었으나 해방 후 가세가 기울고 집(벽수산장)은 적산으로 국유화되었다. 사기죄로 2년 2개월 형을 살고 나왔다. 출소 후 가장 먼저 챙긴 것이 자신의 샤넬백일 만큼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한 사람이다. 귀족의 혈통과 감옥의 어두움, 그리고 붉은 대저택의 비밀스러운 신비까지 한데 두른 채 저택에 숨겨진 비밀 통로와 그곳을 여는 두 개의 열쇠로 언커크 사람들을 휘어잡는다. 수완이 좋고 눈치가 빠르며 사람을 부릴 줄 알아 모든 상황과 말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능수능란하게 가져간다. 결국 ‘문화복원 디렉터’로 언커크에 합류하여 예산까지 주무르게 되는데… 과연 윤원섭이 진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무례한 자는 대체 누구인가? 어찌 너 같은 쭈그러진 월급쟁이 따위가 해평 윤씨를 운운한다는 말이냐? 너 같은 자 백만 명을 합쳐도 감히 내 아버지 윤덕영 한 사람을 당해낼 수 없었을 거란 말이다!” _183쪽
애커넌(47세)
언커크 호주 대표로 이해동의 고용주이다. 외교관답게 처세에 능하고 합리적인 인물로, 독립운동에도 친일 행위에도 부채감 없는 제삼자의 시각을 대변한다. 윤원섭의 사기꾼 기질을 의심하지 않는 건 아니나 몰락한 묘령의 귀족에게서 풍기는 특별한 분위기와 그가 기억하고 있는 벽수산장의 내력에 매료된 것 역시 사실이다. 윤원섭에게 연모의 정을 느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기도 하지만 정말 그럴까? 언커크가 유엔 기구이나 국제 정세와 동떨어질 수 없는 법, 애커넌은 점점 위태로워지는 언커크의 위신을 회복하는 데 벽수산장의 특별한 스토리를 활용하고자 한다.
“윤자작의 일족이 일본 지배 시절의 행적으로 비난받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의 대한민국과 그때의 조선은 다른 세상이 아닌가? 나는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의 형편은 그때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_97쪽
손진형(24세)
해동이 부모처럼 따랐던 고모가 소개해준 여성. 지방에서 상경한 지 삼사 년이 됐다지만 세련된 구석은 보이지 않는다. 요컨대 ‘서울 처녀’와는 한눈에 다른 ‘상경 처녀’이다. 작은 섬유회사에서 경리로 일한다. 유복하진 않지만 3남2녀의 막내딸로 형제간의 우애와 가족의 정이 끈끈한 집에서 자랐다. 해동에게는 한 번도 없었던 다복한 가정의 품. 진형은 자신이 가진 건강하고 든든한 그 뿌리들을 해동에게 나눠줄 수 있을까.
“화요일에 별일이 없으시면 언니네 같이 가실래요? 다른 형제들도 거기서 보기로……”
“화요일요?”
“네, 그다음날이 식목일이라서 형부랑 다들 쉬니까. 다음날 아침에 나무 심으러 다 같이 소풍 가자고. 저녁때 저 퇴근하면 만나서 같이 가요. 언니네는 충현동이에요.” _257쪽
*
희대의 친일파가 남긴 대저택과 그것에 빌붙어 다시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그의 막내딸, 한없이 뻔뻔하고 그것에 당당한 적에 대한 미움과 부인할 수 없이 아름다운 저택 사이에 선 소시민 청년 해동. 작가는 벽수산장과 언커크라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 삼고 그 위에 윤원섭과 이해동 가상의 두 인물을 내세워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로 우리를 이끈다. 이쪽 아니면 저쪽이라는 이분법의 엄혹한 시절을 지나, 양쪽이 얽히고설켜 기묘한 회색지대가 생성되는 시기란 역사 속에 종종 등장하곤 한다. 그리고 그 경계에 선 인물들이 자신의 가치관과 삶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어렵게 선택한 길들이 있다.
“친일파와 왕가, 국제기구와 대저택 같은 거창한 것들이 등장하지만 진정한 주인공은 사람을 이리저리 떠밀어대는 이념의 밀물과 썰물 속에서 정직과 존엄을 지키려 애썼던 평범한 사람들이다”라고 작가가 밝힌 소회는 그래서 더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한 사람의 인생을 조망하며 잘 담아내는 장편이 있는가 하면, 이 작품처럼 누군가의 인생에서 아주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해 담아내는 좋은 장편도 있다. 문장들이 쌓이고 쌓여 맥락 속에서 빛나기 시작할 때, 우리가 소설을 읽는 기쁨이 거기 있을 것이다. 인생의 불가해함을 말하는 것은 그토록 아름답고 슬픈 것이고, 그것이 소설의 시간이다.
해동이 가진 것은 온통 미미한 것들뿐이었다. (…) 그런 미미한 것들은 길가의 거미줄처럼 금세 더럽혀지고 아무 발길에나 찢어지고 제일 먼저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런 것이 존재했다고 증언해줄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져 그것이 실제 있었다고 말할 근거조차 희박해지는 것들뿐이었다. 그에 비하면 윤덕영은, 벽수산장은, 언커크는 얼마나 확실하고 단단하고 부인할 수 없이 존재하는가.
이 세상에는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흔들리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것들. 지난 석 달 동안 그것의 질긴 생명력을 경험하면서 해동은 그것이 ‘힘’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세상에는 부정할 수 없는 강력한 힘들이 있었다. 그것을 가지지 못한 입장에서는 분하고 고까울지언정 그것이 아예 없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_248~2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