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상세정보
Detail Information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 안도현 시집
총서명
창비시선{449}
저자
출판사
출판일
20200925
가격
₩ 10,000
ISBN
9788936424497
페이지
107 p.
판형
126 X 201 mm
커버
Book
책 소개
'시인 안도현'이 돌아왔다. "절필이라는 긴 침묵 시위"(도종환)를 끝내고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 지 4년, 시집으로는 <북향>(문학동네 2012) 이후 8년 만에 펴내는 열한번째 시집이다. 4년간의 절필이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었음에도 시심(詩心)의 붓이 무뎌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깊어졌다. 세상을 늘 새롭게 바라보는 "남다른 시선"과 그동안 겪어온 "인생살이의 깊이와 넓이"(염무웅, 추천사)가 오롯이 담긴 정결한 시편들이 가슴을 깊이 울린다. 무엇보다 오랜만에 '시인 안도현'을 만나 '안도현 시'를 읽는 반가움과 즐거움이 크다. 그의 시집을 기다려온 독자들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는 귀한 시집인 만큼 두께는 얇아도 내용은 아주 묵직하다.
목차
제1부_얼굴을 뵌 지 오래되었다
그릇
수치에 대하여
당하
연못을 들이다
꽃밭의 경계
편지
호미
배차적
안동
환한 사무실
삼례에서 전주까지
너머
시 창작 강의
고모
임홍교 여사 약전
제2부_핑계도 없이 와서 이마에 손을 얹는
경행(經行)
귀띔
익산미륵사지서탑금제사리봉안기(益山彌勒寺址西塔金製舍利奉安記)
무빙(霧氷)
우수(雨水)
울진 두붓집
묵란(墨蘭)
줄포만
줄포시외터미널
장마
진천에서
군인이 집으로 돌아간다면
자두나무가 치마를 벗었다
뒤척인다
키 작은 어른
제3부_작약작약 비를 맞네
식물도감
해설|김종훈
시인의 말
그릇
수치에 대하여
당하
연못을 들이다
꽃밭의 경계
편지
호미
배차적
안동
환한 사무실
삼례에서 전주까지
너머
시 창작 강의
고모
임홍교 여사 약전
제2부_핑계도 없이 와서 이마에 손을 얹는
경행(經行)
귀띔
익산미륵사지서탑금제사리봉안기(益山彌勒寺址西塔金製舍利奉安記)
무빙(霧氷)
우수(雨水)
울진 두붓집
묵란(墨蘭)
줄포만
줄포시외터미널
장마
진천에서
군인이 집으로 돌아간다면
자두나무가 치마를 벗었다
뒤척인다
키 작은 어른
제3부_작약작약 비를 맞네
식물도감
해설|김종훈
시인의 말
본문발췌
P.68
<식물도감>
사무치자
막막하게 사무치자
매화꽃 피는 것처럼 내리는 눈같이
(중략)
귀룽나무 꽃 질 때
나무 아래 물통을 갖다 놓으리
지는 꽃을 받아서
지는 꽃의 향기를 츠랑츠랑 엮으리.
(중략)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아둘 수 있게 되었다.
(중략)
이름에 메달릴 거 없다
알ㅇ도 꽃이고 몰라도 꽃이다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우수
안도현
그리운 게
없어서
노루귀꽃은 앞니가
시려
바라는 게
없어서
나는 귓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내소사 뒷산에
핑계도 없이
와서
이마에 손을 얹는
먼 물소리
시집<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중에서
P.77
*
천안에서 전주를 가려면
차령터널을 통과하면서부터
밤꽃냄새군대의 저지선을 돌파해야 한다
P.77
*
함박꽃 열리기 세 시간 전쯤의
꽃봉오리 주워 와서
빈 참이슬 병에 꽂아두었네
P.77
*
지리산 노고단 가서
물매화 보지 못했다면
하산하지 마시게
P.77
*
꽝꽝나무
그 작은 이파리마다
찰랑찰랑 자지러지는
P.79
*
철둑길 강아지풀
기차 타러 나왔다
박용래 시인의 마을까지 가는
기차가 끊겼다
P.79
*
갯메꽃처럼 바닷가에 살자
바닷물에 발은 담그지 말고
바닷물이 모래알 만지는 소리나 들으며 살자
P.79
*
참새떼가 찔레 덤불로 스며든다
P.79
*
수크령 묶어놓고
네 발목 걸리기를
기다린 적 있었지
나 열몇살 때
P.84
*
시누대 잎사귀는 빗방울 튕겨내는 솜씨가 다들 달라서
어스름이면 그리하여 잎사귀 아래로 다스리는 어둠의 농도도 제각각 달라서
P.84
*
산수국 헛꽃 들여다보면
누군가 남기고 싶지 않은 발자국 남겨놓은 거 같아서
발소리 가벼워질 때까지 가는 것 같아서
P.84
*
튀기 위해
끈질기게 붙어 있다
강아지풀
P.86
*
화암사 뒷산 단풍 나 혼자 못 보겠다
당신도 여기 와서 같이 죽자
P.86
*
바랭이풀은 몸에서 씨앗들 다 떼어낼 때까지 버텼다
서리 내리자 과감하게
무릎 꿇었다
P.86
*
백두산 천지 갔다가 구절초 씨앗 몇 받아 왔다
박성우 시인에게 주었더니
기어이 모종판에 묻었다 한다
P.86
*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일제히 고개 돌려 눈 내리는 걸 바라보는 억새들
P.88
*
복수초에게도
설산이 있었지
P.88
*
이름에 매달릴 거 없다
알아도 꽃이고 몰라도 꽃이다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식물도감>
사무치자
막막하게 사무치자
매화꽃 피는 것처럼 내리는 눈같이
(중략)
귀룽나무 꽃 질 때
나무 아래 물통을 갖다 놓으리
지는 꽃을 받아서
지는 꽃의 향기를 츠랑츠랑 엮으리.
(중략)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아둘 수 있게 되었다.
(중략)
이름에 메달릴 거 없다
알ㅇ도 꽃이고 몰라도 꽃이다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우수
안도현
그리운 게
없어서
노루귀꽃은 앞니가
시려
바라는 게
없어서
나는 귓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내소사 뒷산에
핑계도 없이
와서
이마에 손을 얹는
먼 물소리
시집<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중에서
P.77
*
천안에서 전주를 가려면
차령터널을 통과하면서부터
밤꽃냄새군대의 저지선을 돌파해야 한다
P.77
*
함박꽃 열리기 세 시간 전쯤의
꽃봉오리 주워 와서
빈 참이슬 병에 꽂아두었네
P.77
*
지리산 노고단 가서
물매화 보지 못했다면
하산하지 마시게
P.77
*
꽝꽝나무
그 작은 이파리마다
찰랑찰랑 자지러지는
P.79
*
철둑길 강아지풀
기차 타러 나왔다
박용래 시인의 마을까지 가는
기차가 끊겼다
P.79
*
갯메꽃처럼 바닷가에 살자
바닷물에 발은 담그지 말고
바닷물이 모래알 만지는 소리나 들으며 살자
P.79
*
참새떼가 찔레 덤불로 스며든다
P.79
*
수크령 묶어놓고
네 발목 걸리기를
기다린 적 있었지
나 열몇살 때
P.84
*
시누대 잎사귀는 빗방울 튕겨내는 솜씨가 다들 달라서
어스름이면 그리하여 잎사귀 아래로 다스리는 어둠의 농도도 제각각 달라서
P.84
*
산수국 헛꽃 들여다보면
누군가 남기고 싶지 않은 발자국 남겨놓은 거 같아서
발소리 가벼워질 때까지 가는 것 같아서
P.84
*
튀기 위해
끈질기게 붙어 있다
강아지풀
P.86
*
화암사 뒷산 단풍 나 혼자 못 보겠다
당신도 여기 와서 같이 죽자
P.86
*
바랭이풀은 몸에서 씨앗들 다 떼어낼 때까지 버텼다
서리 내리자 과감하게
무릎 꿇었다
P.86
*
백두산 천지 갔다가 구절초 씨앗 몇 받아 왔다
박성우 시인에게 주었더니
기어이 모종판에 묻었다 한다
P.86
*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일제히 고개 돌려 눈 내리는 걸 바라보는 억새들
P.88
*
복수초에게도
설산이 있었지
P.88
*
이름에 매달릴 거 없다
알아도 꽃이고 몰라도 꽃이다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저자소개
1961년 경상북도 예천에서 태어났습니다. 198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습니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비롯해 11권의 시집을 냈습니다.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 [냠냠], [기러기는 차갑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몰라] 등의 동시집과 다수의 동화를 쓰기도 했으며, 100쇄를 넘긴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는 15개국의 언어로 해외에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소월시문학상, 백석문학상, 석정시문학상 등을 받았습니다. 현재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수상 : 2012년 임화문학예술상, 2009년 백석문학상, 2007년 윤동주문학상, 2005년 김준성문학상(21세기문학상, 이수문학상), 2001년 노작문학상, 1998년 소월시문학상,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SNS : //twitter.com/koreadolphins
서평
“버릴 수 없는 내 허물이 나라는 그릇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동안 금이 가 있었는데 나는 멀쩡한 것처럼 행세했다”
절필의 시간을 벼려, 8년 만에 펴내는 안도현 신작 시집
중년을 지나며 바야흐로 귀향길에 오른 안도현 문학의 새 발걸음
‘시인 안도현’이 돌아왔다. 안도현 시인이 신작시집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를 펴냈다. “절필이라는 긴 침묵 시위”(도종환)를 끝내고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 지 4년, 시집으로는 [북향](문학동네 2012) 이후 8년 만에 펴내는 열한번째 시집이다. 4년간의 절필이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었음에도 시심(詩心)의 붓이 무뎌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깊어졌다. 세상을 늘 새롭게 바라보는 “남다른 시선”과 그동안 겪어온 “인생살이의 깊이와 넓이”(염무웅, 추천사)가 오롯이 담긴 정결한 시편들이 가슴을 깊이 울린다. 무엇보다 오랜만에 ‘시인 안도현’을 만나 ‘안도현 시’를 읽는 반가움과 즐거움이 크다. 그의 시집을 기다려온 독자들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는 귀한 시집인 만큼 두께는 얇아도 내용은 아주 묵직하다.
2013년 절필을 선언했던 시인은 2017년 월간 [시인동네] 5월호에 신작시 「그릇」과 「뒤척인다」를 발표하며 창작활동을 재개했다. 스스로 내린 금시령(禁詩令)을 풀고 4년 만에 발표한 것인 만큼 이 두편의 시는 자못 의미심장하다(시인은 당시 “며칠 동안 뒤척이며 시를 생각하고 시를 공부하는 마음으로” 썼다고 SNS에 글을 쓰기도 했다). “그동안 금이 가 있었는데 나는 멀쩡한 것처럼 행세”(「그릇」)했던 허물을 돌이켜보고, “비유마저 덧없는, 참담한 광기의 시절”(산문집 [그런 일])을 ‘뒤척이고 부스럭거리고 구겨지며’ 울음 같은 침묵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던 번민의 시간을 견뎌온 막막한 심정이 절절하게 와 닿는다.
시인은 이제 “한가한 비유의 시절”을 넘어 “아직 쓰지 못한 것들의 목록”(「너머」)을 적어나간다. 그리고 “이제 좀 고독해져도 좋겠다는 생각”(「시 창작 강의」)에 이르러 저 ‘너머’의 세상에 자신을 풀어놓으며 삶과 시의 경계에서 내면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다. 시인은 또 약전이나 약력의 형식을 빌려 “폐허가 온전한 거처”(「안동」)였을 하찮은 존재들의 가련한 생애와 소소한 일상에 깃든 ‘시적 힘’을 언어로 되살려낸다. 한편, 「식물도감」이라는 독특한 제목을 단 3부의 촌철살인과도 같은 짧은 시들은 자연현상을 관찰하는 예리한 감각과 섬세한 시선의 식물적 상상력이 돋보인다. “귀신같은 예감”(염무웅, 추천사)으로 “허공의 물기가 한밤중 순식간에 나뭇가지에 맺혀 꽃을 피우는”(「무빙(霧氷)」) 경이로움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자연의 섭리와 삶의 비의를 찾아내는 통찰력이 놀랍고 감탄스럽다.
안도현 시인은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문학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춘 시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가 한국 서정 시단을 대표하는 시인이라는 점에는 어느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8년 만에 시집을 펴내면서 시인은 “대체로 무지몽매한 자일수록 시로 무엇을 말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인다”며 자신을 한껏 낮추면서 “갈수록 내가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시인의 말)고 털어놓는다. 그러나 시인은 시력 36년의 연륜을 거쳐 “자신을 녹이거나 오그려 겸손하게 내면을 다스”(「호미」)려왔다. 그가 아니라면 누가 이 쓸쓸한 시대에 시를 쓸 것이며, “펼친 꽃잎/접기 아까워” 작약이 “종일 작약작약 비를 맞”(「식물도감」)는 소리를 들려줄 것인가.
[연어]의 주인공 은빛연어가 모천(母川)으로 회귀하듯 시인은 40년의 타향살이를 접고 고향 경북 예천으로 돌아왔다.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 「낙동강」의 무대이자 유년기의 젖줄과도 같았던 내성천 자락에 새 터전을 마련했다. 이곳에서 시인은 연못을 들이고 돌담을 쌓고 꽃밭을 일군다. 그러나 시인에게 귀향은 “세상의 풍문에 귀를 닫고”(「연못을 들이다」) 한가로이 음풍농월의 삶에 안주하려는 정착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처럼 보인다. 시인은 “내 안에 당신을 들이”고 “당신의 숨소리를 받아 내 호흡으로 삼”(「연못을 들이다」)아 겸손한 마음으로 시의 텃밭을 일구며 “노루귀만큼만 물을 마시고/노루귀만큼만 똥을 싸고/노루귀만큼만 돈을 벌”(「식물도감」)어도 행복한 세상을 느릿느릿 가꾸어갈 것이다. 그리고 더욱 치열하게 시를 쓰고 또 쓸 것이다. ‘시인 안도현’과 ‘자연인 안도현’이 어우러진 새 시집 곳곳에는 시심을 다시 가다듬고 정성스레 쌓아올린 돌담 사이로 다사로운 햇살이 스며든다. 평화롭다. “중년을 지나며 바야흐로 귀향길에 오른 안도현 문학의 새 발걸음에 괄목(刮目)의 기대를 보낸다.”(염무웅, 추천사)
그동안 금이 가 있었는데 나는 멀쩡한 것처럼 행세했다”
절필의 시간을 벼려, 8년 만에 펴내는 안도현 신작 시집
중년을 지나며 바야흐로 귀향길에 오른 안도현 문학의 새 발걸음
‘시인 안도현’이 돌아왔다. 안도현 시인이 신작시집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를 펴냈다. “절필이라는 긴 침묵 시위”(도종환)를 끝내고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 지 4년, 시집으로는 [북향](문학동네 2012) 이후 8년 만에 펴내는 열한번째 시집이다. 4년간의 절필이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었음에도 시심(詩心)의 붓이 무뎌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깊어졌다. 세상을 늘 새롭게 바라보는 “남다른 시선”과 그동안 겪어온 “인생살이의 깊이와 넓이”(염무웅, 추천사)가 오롯이 담긴 정결한 시편들이 가슴을 깊이 울린다. 무엇보다 오랜만에 ‘시인 안도현’을 만나 ‘안도현 시’를 읽는 반가움과 즐거움이 크다. 그의 시집을 기다려온 독자들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는 귀한 시집인 만큼 두께는 얇아도 내용은 아주 묵직하다.
2013년 절필을 선언했던 시인은 2017년 월간 [시인동네] 5월호에 신작시 「그릇」과 「뒤척인다」를 발표하며 창작활동을 재개했다. 스스로 내린 금시령(禁詩令)을 풀고 4년 만에 발표한 것인 만큼 이 두편의 시는 자못 의미심장하다(시인은 당시 “며칠 동안 뒤척이며 시를 생각하고 시를 공부하는 마음으로” 썼다고 SNS에 글을 쓰기도 했다). “그동안 금이 가 있었는데 나는 멀쩡한 것처럼 행세”(「그릇」)했던 허물을 돌이켜보고, “비유마저 덧없는, 참담한 광기의 시절”(산문집 [그런 일])을 ‘뒤척이고 부스럭거리고 구겨지며’ 울음 같은 침묵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던 번민의 시간을 견뎌온 막막한 심정이 절절하게 와 닿는다.
시인은 이제 “한가한 비유의 시절”을 넘어 “아직 쓰지 못한 것들의 목록”(「너머」)을 적어나간다. 그리고 “이제 좀 고독해져도 좋겠다는 생각”(「시 창작 강의」)에 이르러 저 ‘너머’의 세상에 자신을 풀어놓으며 삶과 시의 경계에서 내면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다. 시인은 또 약전이나 약력의 형식을 빌려 “폐허가 온전한 거처”(「안동」)였을 하찮은 존재들의 가련한 생애와 소소한 일상에 깃든 ‘시적 힘’을 언어로 되살려낸다. 한편, 「식물도감」이라는 독특한 제목을 단 3부의 촌철살인과도 같은 짧은 시들은 자연현상을 관찰하는 예리한 감각과 섬세한 시선의 식물적 상상력이 돋보인다. “귀신같은 예감”(염무웅, 추천사)으로 “허공의 물기가 한밤중 순식간에 나뭇가지에 맺혀 꽃을 피우는”(「무빙(霧氷)」) 경이로움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자연의 섭리와 삶의 비의를 찾아내는 통찰력이 놀랍고 감탄스럽다.
안도현 시인은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문학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춘 시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가 한국 서정 시단을 대표하는 시인이라는 점에는 어느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8년 만에 시집을 펴내면서 시인은 “대체로 무지몽매한 자일수록 시로 무엇을 말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인다”며 자신을 한껏 낮추면서 “갈수록 내가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시인의 말)고 털어놓는다. 그러나 시인은 시력 36년의 연륜을 거쳐 “자신을 녹이거나 오그려 겸손하게 내면을 다스”(「호미」)려왔다. 그가 아니라면 누가 이 쓸쓸한 시대에 시를 쓸 것이며, “펼친 꽃잎/접기 아까워” 작약이 “종일 작약작약 비를 맞”(「식물도감」)는 소리를 들려줄 것인가.
[연어]의 주인공 은빛연어가 모천(母川)으로 회귀하듯 시인은 40년의 타향살이를 접고 고향 경북 예천으로 돌아왔다.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 「낙동강」의 무대이자 유년기의 젖줄과도 같았던 내성천 자락에 새 터전을 마련했다. 이곳에서 시인은 연못을 들이고 돌담을 쌓고 꽃밭을 일군다. 그러나 시인에게 귀향은 “세상의 풍문에 귀를 닫고”(「연못을 들이다」) 한가로이 음풍농월의 삶에 안주하려는 정착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처럼 보인다. 시인은 “내 안에 당신을 들이”고 “당신의 숨소리를 받아 내 호흡으로 삼”(「연못을 들이다」)아 겸손한 마음으로 시의 텃밭을 일구며 “노루귀만큼만 물을 마시고/노루귀만큼만 똥을 싸고/노루귀만큼만 돈을 벌”(「식물도감」)어도 행복한 세상을 느릿느릿 가꾸어갈 것이다. 그리고 더욱 치열하게 시를 쓰고 또 쓸 것이다. ‘시인 안도현’과 ‘자연인 안도현’이 어우러진 새 시집 곳곳에는 시심을 다시 가다듬고 정성스레 쌓아올린 돌담 사이로 다사로운 햇살이 스며든다. 평화롭다. “중년을 지나며 바야흐로 귀향길에 오른 안도현 문학의 새 발걸음에 괄목(刮目)의 기대를 보낸다.”(염무웅, 추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