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상세정보
Detail Information
종의 기원 = The origin of species : 정유정 장편소설
원서명
The Good Son
저자
출판사
출판일
20160514
가격
₩ 16,800
ISBN
9788956609959
페이지
383 p.
판형
150 X 210 mm
커버
Book
책 소개
26년 동안 숨어 있던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왔다!
펴내는 작품마다 압도적인 서사와 폭발적인 이야기의 힘으로 많은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아온 작가 정유정의 장편소설 『종의 기원』. 전작 《28》 이후 3년 만에 펴낸 이 작품을 작가는 이렇게 정의한다. 평범했던 한 청년이 살인자로 태어나는 과정을 그린 ‘악인의 탄생기’라고. 이번 작품에서 작가는 미지의 세계가 아닌 인간, 그 내면 깊숙한 곳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지금껏 ‘악’에 대한 시선을 집요하게 유지해온 작가는 이번 작품에 이르러 ‘악’ 그 자체가 되어 놀라운 통찰력으로 ‘악’의 심연을 치밀하게 그려보인다. 영혼이 사라진 인간의 내면을 정밀하게 관찰하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며 그 누구도 온전히 보여주지 못했던 ‘악’의 속살을 보여주고자 한다. 가족여행에서 사고로 아버지와 한 살 터울의 형을 잃은 후 정신과 의사인 이모가 처방해준 정체불명의 약을 매일 거르지 않고 먹기 시작한 유진은 주목받는 수영선수로 활약하던 열여섯 살에 약을 끊고 경기에 출전했다가 그 대가로 경기 도중 첫 번째 발작을 일으키고 선수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한없이 몸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약과 늘 주눅 들게 하는 어머니의 철저한 규칙, 그리고 자신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듯한 기분 나쁜 이모의 감시 아래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없었던 유진은 가끔씩 약을 끊고 어머니 몰래 밤 외출을 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왔다. 이번에도 매일 먹어야 하는 약을 며칠간 끊은 상태였고, 그래서 전날 밤 ‘개병’이 도져 외출을 했었던 유진은 자리에 누워 곧 시작될 발작을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의 집에 양자로 들어와 형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해진의 전화를 받는다. 어젯밤부터 어머니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며 집에 별일 없는지 묻는 해진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난 유진은 피투성이인 방 안과, 마찬가지로 피범벅이 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다. 핏자국을 따라, 아파트 복층에 있는 자기 방에서 나와 계단을 지나 거실로 내려온 유진은 끔찍하게 살해된 어머니의 시신을 보게 되는데…….
등단작인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 속 정아의 아버지, 《내 심장을 쏴라》의 점박이, 《7년의 밤》의 오영제, 《28》의 박동해 등 작품에서 매번 다른 악인을 등장시키고 형상화시켜왔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던 저자는 이 작품에서 결국 스스로 ‘악’이 되었다.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상위 1퍼센트에 속하는 ‘순수 악인’인 유진을 그리기 위해 저자는 어린 시절부터 학습되어 온 도덕과 교육, 윤리적 세계관을 철저하게 깨나갔고, 내 안의 악이 어떤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가, 어떤 계기로 점화되고, 어떤 방식으로 진화해 가는지 상세하게 써내려갔다. 저자는 이를 통해 우리의 본성 안에 자리 잡은 그 ‘어두운 숲’을 똑바로 응시하고 이해하며 내면의 악, 타인의 악, 나아가 삶을 위협하는 포식자의 악에 제대로 대처해나가길 바라고 있다.
펴내는 작품마다 압도적인 서사와 폭발적인 이야기의 힘으로 많은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아온 작가 정유정의 장편소설 『종의 기원』. 전작 《28》 이후 3년 만에 펴낸 이 작품을 작가는 이렇게 정의한다. 평범했던 한 청년이 살인자로 태어나는 과정을 그린 ‘악인의 탄생기’라고. 이번 작품에서 작가는 미지의 세계가 아닌 인간, 그 내면 깊숙한 곳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지금껏 ‘악’에 대한 시선을 집요하게 유지해온 작가는 이번 작품에 이르러 ‘악’ 그 자체가 되어 놀라운 통찰력으로 ‘악’의 심연을 치밀하게 그려보인다. 영혼이 사라진 인간의 내면을 정밀하게 관찰하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며 그 누구도 온전히 보여주지 못했던 ‘악’의 속살을 보여주고자 한다. 가족여행에서 사고로 아버지와 한 살 터울의 형을 잃은 후 정신과 의사인 이모가 처방해준 정체불명의 약을 매일 거르지 않고 먹기 시작한 유진은 주목받는 수영선수로 활약하던 열여섯 살에 약을 끊고 경기에 출전했다가 그 대가로 경기 도중 첫 번째 발작을 일으키고 선수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한없이 몸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약과 늘 주눅 들게 하는 어머니의 철저한 규칙, 그리고 자신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듯한 기분 나쁜 이모의 감시 아래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없었던 유진은 가끔씩 약을 끊고 어머니 몰래 밤 외출을 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왔다. 이번에도 매일 먹어야 하는 약을 며칠간 끊은 상태였고, 그래서 전날 밤 ‘개병’이 도져 외출을 했었던 유진은 자리에 누워 곧 시작될 발작을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의 집에 양자로 들어와 형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해진의 전화를 받는다. 어젯밤부터 어머니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며 집에 별일 없는지 묻는 해진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난 유진은 피투성이인 방 안과, 마찬가지로 피범벅이 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다. 핏자국을 따라, 아파트 복층에 있는 자기 방에서 나와 계단을 지나 거실로 내려온 유진은 끔찍하게 살해된 어머니의 시신을 보게 되는데…….
등단작인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 속 정아의 아버지, 《내 심장을 쏴라》의 점박이, 《7년의 밤》의 오영제, 《28》의 박동해 등 작품에서 매번 다른 악인을 등장시키고 형상화시켜왔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던 저자는 이 작품에서 결국 스스로 ‘악’이 되었다.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상위 1퍼센트에 속하는 ‘순수 악인’인 유진을 그리기 위해 저자는 어린 시절부터 학습되어 온 도덕과 교육, 윤리적 세계관을 철저하게 깨나갔고, 내 안의 악이 어떤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가, 어떤 계기로 점화되고, 어떤 방식으로 진화해 가는지 상세하게 써내려갔다. 저자는 이를 통해 우리의 본성 안에 자리 잡은 그 ‘어두운 숲’을 똑바로 응시하고 이해하며 내면의 악, 타인의 악, 나아가 삶을 위협하는 포식자의 악에 제대로 대처해나가길 바라고 있다.
목차
프롤로그 · 7
1부 어둠 속의 부름 · 13
2부 나는 누구일까 · 101
3부 포식자 · 219
4부 종의 기원 · 289
에필로그 · 373
작가의 말 · 379
1부 어둠 속의 부름 · 13
2부 나는 누구일까 · 101
3부 포식자 · 219
4부 종의 기원 · 289
에필로그 · 373
작가의 말 · 379
본문발췌
세상이 사라졌다. 위장에서 요동치던 불길이 성욕처럼 아랫배로 방사됐다. 발화의 순간이었다. 감각의 대역폭이 무한대로 확장되는 마법의 순간이었다. 내 안의 눈으로 여자의 모든 것을 읽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전지의 순간이었다.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전능의 순간이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인류의 2~3퍼센트 가량이 사이코패스라고 한다.
소설의 주인공 유진은 그중에서도 상위 1퍼센트에 속하는, 정신의학자들 사이에선 `프레데터`라 부른다는 `순수 악인`이다. 포식자라..
˝춥고 무섭고 끔찍한 일이 12시 30분부터 새벽 2시 사이에 일어났다는 것. 문장 사이에는 어둠처럼 불길하고 심연처럼 불가해한 여백들이 놓여 있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나면 돌아갈 길이 없다.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부옇게 흐린 저 겨울 대기 속으로 계속 걸어가는 것 말고는.
- 본문 292쪽
˝행복한 이야기는 대부분 진실이 아니에요.˝
해진은 잠시 틈을 두었다가 대꾸했다.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려 해진을 봤다.
˝희망을 가진다고 절망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요. 세상은 사칙연산처럼 분명하지 않아요. 인간은 연산보다 더 복잡하니까요.˝
해진은 나와 시선을 맞대왔다. 그렇지?라고 묻는 눈이었으나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뭔 예기를 하는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다만 녀석의 덩치가 나보다 두어 뼘쯤 커 보였다. 나와 불과 한 살 차이였건만, 열 살쯤 차이가 나는 형 같았다. 심지어 어머니와 대등해 보이기까지 했다.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니?˝
어머니가 물었다. 해진은 다시 시간을 두었다가 대답했다.
˝그래도 한 번쯤 공평해지는 시점이 올 거라고 믿어요. 그러니까, 그러려고 애쓰면요.˝ - 67쪽
`규칙에는 예외가 있었고, 예외는 곧 규칙이 되었다.` - 68쪽
인간이 늘 `정답`을 선택하지 않는 건 그것이 불편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도덕의 눈금을 조금 낮추자 간단한 해결법이 보였다. - 135쪽
운명은 제 할 일을 잊는 법이 없다. 한쪽 눈을 감아줄 때도 있겠지만 그건 한 번 정도일 것이다. 올 것은 결국 오고, 벌어질 일은 끝내 벌어진다. 불시에 형을 집행하듯, 운명이 내게 자객을 보낸 것이었다. 그것도 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 139쪽
누가 그랬던가. ˝인간은 생의 1/3을 몽상하는 데 쓰고, 꿈을 꿀 때에는 깨어 있을 때 감춰두었던 전혀 다른 삶을 살며, 마음의 극장에서는 헛되고 폭력적이고 지저분한 온갖 소망이 실현된다˝고. - 272쪽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존하는 법과 더불어 기다리는 법을 배운다. 먹는 법과 먹을 수 있을 때까지 굶는 법을 동시에 터득하는 것이다. 오로지 인간만 굶는 법을 배우지 못한 생물이었다. 오만 가지 것을 먹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먹으며, 매일 매 순간 먹는 이야기에 열광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먹을 것을 향한 저 광기는 포식포르노와 딱히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이 지상의 생명체 중 자기 욕망에 대해 가장 참을성이 없는 종이었다. - 275쪽
나는 숨을 멈췄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분노가 와르르 무너졌다. 나를 지배하던 충동이 일순간에 가라앉았다. 핏줄의 저주에 걸려든 순간이었다. 내가 얼마나 아이를 사랑하는지 새삼스레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결코 용서하지 못하리라는 걸 예감한 순간이었다. 평생토록 죄책감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리라고 생각하던 순간이며, 내가 누구인지 자각하던 순간이기도 했다. - 308쪽
˝나는 죽음에 대해 그런 식으로 낭만적인 치장을 하는 게 싫어.˝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해진이 불쑥 말을 꺼냈다. 아마 광명역을 막 통과한 후였을 것이다. 나는 껌껌한 차창에 시선을 대고 있다가 멍하니 물었다.
˝왜?˝
˝수류탄에 초콜릿을 바르는 꼴이니까.˝
˝수류탄을 쥐고 있다고 꼭 진지해야 할 필요는 없잖아.˝ - 330쪽
˝어떤 책에서 본 얘긴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데는 세 가지 방식이 있대. 하나는 억압이야. 죽음이 다가온다는 걸 잊어버리고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양 행동하는 거. 우리는 대부분 이렇게 살아. 두 번째는 항상 죽음을 마음에 새겨놓고 잊지 않는 거야. 오늘을 생애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할 때 삶은 가장 큰 축복이라는 거지. 세 번째는 수용이래. 죽음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대. 모든 것을 잃을 처지에 놓여도 초월적인 평정을 얻는다는 거야. 이 세 가지 전략의 공통점이 뭔 줄 알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대답은커녕 생각하는 시늉조차 하기 싫었다. 그런 이상한 문제로 고민하는 것보다 그냥 죽어버리는 게 쉽고 편할 것 같았다. 해진은 스스로 대답했다.
˝모두 거짓말이라는 거야. 셋 다 치장된 두려움에 지나지 않아.˝
˝그럼 뭐가 진실인데?˝
˝두려움이겠지. 그게 가장 정직한 감정이니까.˝ - 330, 331쪽
진화심리학자인 데이비드 버스는 그의 저서 <이웃집 살인마(The Murderer Next Door)>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주장을 펼쳤다. 인간은 악하게 태어난 것도, 선하게 태어난 것도 아니다. 인간은 생존하도록 태어났다.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는 진화과정에 적응해야 했고, 선이나 악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었기에 선과 악이 공진화했으며, 그들에게 살인은 진화적 성공(유전자 번식의 성공), 즉 경쟁자를 제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이 무자비한 `적응구조`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우리의 조상이다.
그에 따르면, 악은 우리 유전자에 내재된 어두운 본성이다. 그리고 악인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누구나`일 수 있다. - 379쪽
처음 소설을 시작할 때, 나는 내가 작가로서 충분히 자유롭게 사고한다고 믿었다. 두 번째 다시 쓸 때까지도 그렇다고 우겼다. 세 번째로 다시 쓸 때에야 비로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인 `나`가 어린 시절부터 학습돼온 도덕과 교육, 윤리적 세계관을 깨버리지 못했다는 걸. 주인공인 `나`는 그런 것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맹수`인데. 더 나쁜 건, 그 틀이 깨지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선대의 작가들, 스승으로 삼았던 작가들을 통해, 작가는 자기 이름을 걸고 글을 쓰는 한 두려움과 타협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배웠으면서도. - 382쪽
이제 내가 왜 인간의 `악`에 관심을 갖는지에 대해 대답할 차례다. 평범한 비둘기라 믿는 우리의 본성 안에도 매의 `어두운 숲`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똑바로 응시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 내면의 악, 타인의 악, 나아가 삶을 위협하는 포식자의 악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 - 383쪽
˝행복한 이야기는 대부분 진실이 아니에요˝ (P67)
너라면 골이 흔들리고, 귓속에 마이크가 삑삑거리고, 몸이 병든 닭처럼 무기력해지는 고통을 16년씩 견뎌낸 포상으로, 며칠간의 화창한 휴가 정도는 받고 싶지 않겠느냐고, 그때마다 이런 식으로 인생을 초토화 시킨다면 누군들 미치지 않겠느냐고. (P144)
˝도덕적이고 고결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깊은 무의식 속에서는 금지된 행위에 대한 환상, 잔인한 욕망과 원초적 폭력성에 대한 환상이 숨어있다. 사악한 인간과 보통 인간의 차이는 음침한 욕망을 행동에 옮기는지, 아닌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P380)
ㅡp.378
메일을 닫고 PC방을 나왔다. 잘 곳을 찾아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도로는 한적하고, 12월의 밤은 스산하고, 바다는 부옇게 젖어 있었다. 저 앞 흐릿한 안개 속에선 누군가 걸어가고 있었다. 자박자박 발소리가 들려왔다. 짠 바람을 타고 피 냄새가 훅, 밀려왔다.
ᆞ마지막 문단이다. 이 장면이 이 책 중 가장 무서웠다.
결국 포식자가 살아남았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인류의 2~3퍼센트 가량이 사이코패스라고 한다.
소설의 주인공 유진은 그중에서도 상위 1퍼센트에 속하는, 정신의학자들 사이에선 `프레데터`라 부른다는 `순수 악인`이다. 포식자라..
˝춥고 무섭고 끔찍한 일이 12시 30분부터 새벽 2시 사이에 일어났다는 것. 문장 사이에는 어둠처럼 불길하고 심연처럼 불가해한 여백들이 놓여 있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나면 돌아갈 길이 없다.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부옇게 흐린 저 겨울 대기 속으로 계속 걸어가는 것 말고는.
- 본문 292쪽
˝행복한 이야기는 대부분 진실이 아니에요.˝
해진은 잠시 틈을 두었다가 대꾸했다.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려 해진을 봤다.
˝희망을 가진다고 절망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요. 세상은 사칙연산처럼 분명하지 않아요. 인간은 연산보다 더 복잡하니까요.˝
해진은 나와 시선을 맞대왔다. 그렇지?라고 묻는 눈이었으나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뭔 예기를 하는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다만 녀석의 덩치가 나보다 두어 뼘쯤 커 보였다. 나와 불과 한 살 차이였건만, 열 살쯤 차이가 나는 형 같았다. 심지어 어머니와 대등해 보이기까지 했다.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니?˝
어머니가 물었다. 해진은 다시 시간을 두었다가 대답했다.
˝그래도 한 번쯤 공평해지는 시점이 올 거라고 믿어요. 그러니까, 그러려고 애쓰면요.˝ - 67쪽
`규칙에는 예외가 있었고, 예외는 곧 규칙이 되었다.` - 68쪽
인간이 늘 `정답`을 선택하지 않는 건 그것이 불편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도덕의 눈금을 조금 낮추자 간단한 해결법이 보였다. - 135쪽
운명은 제 할 일을 잊는 법이 없다. 한쪽 눈을 감아줄 때도 있겠지만 그건 한 번 정도일 것이다. 올 것은 결국 오고, 벌어질 일은 끝내 벌어진다. 불시에 형을 집행하듯, 운명이 내게 자객을 보낸 것이었다. 그것도 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 139쪽
누가 그랬던가. ˝인간은 생의 1/3을 몽상하는 데 쓰고, 꿈을 꿀 때에는 깨어 있을 때 감춰두었던 전혀 다른 삶을 살며, 마음의 극장에서는 헛되고 폭력적이고 지저분한 온갖 소망이 실현된다˝고. - 272쪽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존하는 법과 더불어 기다리는 법을 배운다. 먹는 법과 먹을 수 있을 때까지 굶는 법을 동시에 터득하는 것이다. 오로지 인간만 굶는 법을 배우지 못한 생물이었다. 오만 가지 것을 먹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먹으며, 매일 매 순간 먹는 이야기에 열광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먹을 것을 향한 저 광기는 포식포르노와 딱히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이 지상의 생명체 중 자기 욕망에 대해 가장 참을성이 없는 종이었다. - 275쪽
나는 숨을 멈췄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분노가 와르르 무너졌다. 나를 지배하던 충동이 일순간에 가라앉았다. 핏줄의 저주에 걸려든 순간이었다. 내가 얼마나 아이를 사랑하는지 새삼스레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결코 용서하지 못하리라는 걸 예감한 순간이었다. 평생토록 죄책감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리라고 생각하던 순간이며, 내가 누구인지 자각하던 순간이기도 했다. - 308쪽
˝나는 죽음에 대해 그런 식으로 낭만적인 치장을 하는 게 싫어.˝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해진이 불쑥 말을 꺼냈다. 아마 광명역을 막 통과한 후였을 것이다. 나는 껌껌한 차창에 시선을 대고 있다가 멍하니 물었다.
˝왜?˝
˝수류탄에 초콜릿을 바르는 꼴이니까.˝
˝수류탄을 쥐고 있다고 꼭 진지해야 할 필요는 없잖아.˝ - 330쪽
˝어떤 책에서 본 얘긴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데는 세 가지 방식이 있대. 하나는 억압이야. 죽음이 다가온다는 걸 잊어버리고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양 행동하는 거. 우리는 대부분 이렇게 살아. 두 번째는 항상 죽음을 마음에 새겨놓고 잊지 않는 거야. 오늘을 생애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할 때 삶은 가장 큰 축복이라는 거지. 세 번째는 수용이래. 죽음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대. 모든 것을 잃을 처지에 놓여도 초월적인 평정을 얻는다는 거야. 이 세 가지 전략의 공통점이 뭔 줄 알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대답은커녕 생각하는 시늉조차 하기 싫었다. 그런 이상한 문제로 고민하는 것보다 그냥 죽어버리는 게 쉽고 편할 것 같았다. 해진은 스스로 대답했다.
˝모두 거짓말이라는 거야. 셋 다 치장된 두려움에 지나지 않아.˝
˝그럼 뭐가 진실인데?˝
˝두려움이겠지. 그게 가장 정직한 감정이니까.˝ - 330, 331쪽
진화심리학자인 데이비드 버스는 그의 저서 <이웃집 살인마(The Murderer Next Door)>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주장을 펼쳤다. 인간은 악하게 태어난 것도, 선하게 태어난 것도 아니다. 인간은 생존하도록 태어났다.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는 진화과정에 적응해야 했고, 선이나 악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었기에 선과 악이 공진화했으며, 그들에게 살인은 진화적 성공(유전자 번식의 성공), 즉 경쟁자를 제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이 무자비한 `적응구조`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우리의 조상이다.
그에 따르면, 악은 우리 유전자에 내재된 어두운 본성이다. 그리고 악인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누구나`일 수 있다. - 379쪽
처음 소설을 시작할 때, 나는 내가 작가로서 충분히 자유롭게 사고한다고 믿었다. 두 번째 다시 쓸 때까지도 그렇다고 우겼다. 세 번째로 다시 쓸 때에야 비로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인 `나`가 어린 시절부터 학습돼온 도덕과 교육, 윤리적 세계관을 깨버리지 못했다는 걸. 주인공인 `나`는 그런 것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맹수`인데. 더 나쁜 건, 그 틀이 깨지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선대의 작가들, 스승으로 삼았던 작가들을 통해, 작가는 자기 이름을 걸고 글을 쓰는 한 두려움과 타협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배웠으면서도. - 382쪽
이제 내가 왜 인간의 `악`에 관심을 갖는지에 대해 대답할 차례다. 평범한 비둘기라 믿는 우리의 본성 안에도 매의 `어두운 숲`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똑바로 응시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 내면의 악, 타인의 악, 나아가 삶을 위협하는 포식자의 악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 - 383쪽
˝행복한 이야기는 대부분 진실이 아니에요˝ (P67)
너라면 골이 흔들리고, 귓속에 마이크가 삑삑거리고, 몸이 병든 닭처럼 무기력해지는 고통을 16년씩 견뎌낸 포상으로, 며칠간의 화창한 휴가 정도는 받고 싶지 않겠느냐고, 그때마다 이런 식으로 인생을 초토화 시킨다면 누군들 미치지 않겠느냐고. (P144)
˝도덕적이고 고결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깊은 무의식 속에서는 금지된 행위에 대한 환상, 잔인한 욕망과 원초적 폭력성에 대한 환상이 숨어있다. 사악한 인간과 보통 인간의 차이는 음침한 욕망을 행동에 옮기는지, 아닌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P380)
ㅡp.378
메일을 닫고 PC방을 나왔다. 잘 곳을 찾아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도로는 한적하고, 12월의 밤은 스산하고, 바다는 부옇게 젖어 있었다. 저 앞 흐릿한 안개 속에선 누군가 걸어가고 있었다. 자박자박 발소리가 들려왔다. 짠 바람을 타고 피 냄새가 훅, 밀려왔다.
ᆞ마지막 문단이다. 이 장면이 이 책 중 가장 무서웠다.
결국 포식자가 살아남았다.
저자소개
정유정
저자 정유정은 장편소설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로 제1회 세계청소년문학상을, 《내 심장을 쏴라》로 제5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했다. 장편소설 《7년의 밤》과 《28》은 주요 언론과 서점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며 큰 화제를 모았고, 프랑스, 독일, 중국, 대만, 베트남 등 해외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판되면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외에도 에세이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을 출간하였다.
저자 정유정은 장편소설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로 제1회 세계청소년문학상을, 《내 심장을 쏴라》로 제5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했다. 장편소설 《7년의 밤》과 《28》은 주요 언론과 서점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며 큰 화제를 모았고, 프랑스, 독일, 중국, 대만, 베트남 등 해외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판되면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외에도 에세이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을 출간하였다.
서평
언론ㆍ서점ㆍ출판인이 선정한 올해의 책
독자들이 뽑은 올해의 한국소설 1위
악惡은 어떻게 존재하고 점화되는가
심연에서 건져 올린 인간 본성의 ‘어두운 숲’
펴내는 작품마다 압도적인 서사와 폭발적인 이야기의 힘으로 많은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아온 정유정이 전작 《28》 이후 3년 만에 선보인 장편소설. 새로운 작품을 내놓을 때마다 다음 작품을 기다리게 하는 작가이기에 이번 신작을 향한 독자들의 기대는 그 시간만큼 높았고, 출간과 동시에 전 서점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오르며 열광적인 지지와 호평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동아일보》와 《문화일보》 선정 올해의 책 1위, 《조선일보》 선정 올해의 책 2위, 각 서점과 출판인 선정 올해의 책, 독자들이 선정한 올해의 한국소설 1위에 올랐다
작품 안에서 늘 허를 찌르는 반전을 선사했던 작가답게, 이번 작품에서 정유정의 상상력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빛을 발한다. 미지의 세계가 아닌 인간, 그 내면 깊숙한 곳으로 독자들을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껏 ‘악’에 대한 시선을 집요하게 유지해온 작가는 이번 신작 《종의 기원》에 이르러 ‘악’ 그 자체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정유정만의 독보적인 스타일로 ‘악’에 대한 한층 더 세련되고 깊이 있는 통찰을 선보인다.
등단작인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에선 정아의 아버지로, 《내 심장을 쏴라》에선 점박이로, 《7년의 밤》에서는 오영제로, 《28》에서는 박동해로. 매번 다른 악인을 등장시키고 형상화시켰으나 만족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목이 마르고 답답했다. 그들이 늘 ‘그’였기 때문이다. 외부자의 눈으로 그려 보이는 데 한계가 있었던 탓이다. 결국 ‘나’라야 했다. 객체가 아닌 주체여야 했다. 우리의 본성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을 ‘어두운 숲’을 안으로부터 뒤집어 보여줄 수 있으려면. 내 안의 악이 어떤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가, 어떤 계기로 점화되고, 어떤 방식으로 진화해 가는지 그려 보이려면. _‘작가의 말’에서
집 안에서 ‘누군가’에게 살해된 어머니를 발견하는 것이 사건의 시작이고, 그 ‘누군가’를 밝히면서 드러나는 진실이 이야기의 주를 이룬다. 과거의 이야기를 빼고 나면 ‘사흘(3일)’이라는 짧은 시간이 흐를 뿐이지만, 독자들은 아주 낯설고도 특별한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바로 그 누구도 온전히 보여주지 못했던 ‘악’의 속살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가 놀라운 통찰력으로 ‘악’의 심연을 치밀하게 그리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실 악은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장 끔찍한 것은 밖이 아니라 여기, 바로 우리 안에 있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빠른 호흡과 거침없는 문장, 앞뒤로 꽉 짜인 이야기 구조가 발휘하는 특유의 속도감과 흡인력은 여전하다. 다만 서사의 규모를 대폭 줄이는 대신 1분1초도 헛되게 쓰지 않는 정확하고 치밀한 묘사로 밀도감과 긴장감을 증폭시켰고,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한층 더 깊어졌다. 독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면서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한 단계 더 성장한 작가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나는 마침내 내 인생 최고의 적을 만났다.
그가 바로 나다!”
주인공 유진은 피 냄새에 잠에서 깬다. 발작이 시작되기 전 그에겐 늘 피비린내가 먼저 찾아온다. 유진은 매일 먹어야 하는 ‘약’을 며칠간 끊은 상태였고, 늘 그랬듯이 약을 끊자 기운이 넘쳤고, 그래서 전날 밤 ‘개병’이 도져 외출을 했었다. 유진이 곧 시작될 발작을 기다리며 누워 있을 때, 해진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10년 전 자신의 집에 양자로 들어와 형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해진은, 어젯밤부터 어머니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며 집에 별일 없는지 묻는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진은 피투성이인 방 안과, 마찬가지로 피범벅이 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다. 핏자국을 따라, 아파트 복층에 있는 자기 방에서 나와 계단을 지나 거실로 내려온 유진은 끔찍하게 살해된 어머니의 시신을 보게 된다.
비로소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경험해보지 않았던 것, 스스로 부른 재앙, 발작전구증세였다. 운명은 제 할 일을 잊는 법이 없다. 한쪽 눈을 감아줄 때도 있겠지만 그건 한 번 정도일 것이다. 올 것은 결국 오고, 벌어질 일은 끝내 벌어진다. 불시에 형을 집행하듯, 운명이 내게 자객을 보낸 것이었다. 그것도 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_ 본문 139쪽
16년 전, 열 살의 유진은 가족여행에서 사고로 아버지와 한 살 터울의 형을 잃었다. 그리고 몇 달 후부터 정신과 의사인 이모가 처방해준 정체불명의 약을 매일 거르지 않고 먹기 시작했다. 주목받는 수영선수였던 열여섯 살의 유진은 약을 끊고 경기에 출전했다가 그 대가로 경기 도중 첫 번째 발작을 일으키게 되고, 어머니는 유진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수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한없이 몸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약과 늘 주눅 들게 하는 어머니의 철저한 규칙, 그리고 자신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듯한 기분 나쁜 이모의 감시 아래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없었던 유진은 가끔씩 약을 끊고 어머니 몰래 밤 외출을 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왔다. 그런데 지난밤 외출 후에는 집에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어머니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하나씩 발견되는 단서들을 따라 지난밤의 기억들을 확인해나가던 유진 앞에, 시간을 거슬러 망각에 가려졌던 끔찍한 진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내 몸은 소리를 죽이기 시작했다. 숨 쉬듯 욱신대던 뒤통수가 평온을 되찾았다. 숨소리는 목 밑으로 잦아들고, 갈비뼈 안에선 심장이 느리게 뛰었다. 배 속에서 공처럼 구르던 긴장이 사라졌다. 오감이 날을 세웠다. 몇 미터 거리가 있는데도, 겁먹은 것의 축축하고 거친 숨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세상이 엎드리는 기분이었다. 모든 것들이 길을 열고 대기하는 느낌이었다.
_ 본문 283쪽
“운명은 제 할 일을 잊는 법이 없다……
올 것은 결국 오고, 벌어질 일은 끝내 벌어진다”
정유정은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의 말로 ‘작가의 말’을 시작한다. ‘살인’은 인간이 경쟁자를 제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고, 이 무자비한 ‘적응구조’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이다. ‘악은 우리 유전자에 내재된 어두운 본성이며, 악인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누구나일 수 있다’는 데이비드 버스의 논리는 살인과 악, 나아가 인간을 바라보는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가 된다.
사이코패스로 분류되는 이들이 저지르는 끔찍한 사건을 우리는 뉴스를 통해 종종 접하곤 한다. 우리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 그들의 모습에서 작가는 인간 본성의 어둠을 포착하고 거침없이 묘사해 나간다. 어린 시절부터 학습돼 온 도덕과 교육, 윤리적 세계관을 철저하게 깨나감으로써 비로소 평범했던 한 청년이 살인자로 태어나는 과정을 그린 ‘악인의 탄생기’를 완성시킨 것이다.
폭풍을 피할 항구 같은 건 없다. 도착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폭풍의 시간은 암흑의 시간이고, 나는 무방비상태로 거기에 던져진다. 널리 알려진 대로, 과정을 기억하지도 못한다. 의식이 스스로 깨어날 때까지 길고도 깊은 잠을 잔다. _ 본문 283쪽
작가는 우리의 본성 안에 숨은 ‘어두운 숲’을 똑바로 응시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 내면의 악, 타인의 악, 나아가 삶을 위협하는 포식자의 악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종의 기원》의 이야기가 그 어떤 낯선 세계의 이야기보다 낯설면서도 우리를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게 하고, 다양한 해석의 결로 저마다의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독자들이 뽑은 올해의 한국소설 1위
악惡은 어떻게 존재하고 점화되는가
심연에서 건져 올린 인간 본성의 ‘어두운 숲’
펴내는 작품마다 압도적인 서사와 폭발적인 이야기의 힘으로 많은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아온 정유정이 전작 《28》 이후 3년 만에 선보인 장편소설. 새로운 작품을 내놓을 때마다 다음 작품을 기다리게 하는 작가이기에 이번 신작을 향한 독자들의 기대는 그 시간만큼 높았고, 출간과 동시에 전 서점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오르며 열광적인 지지와 호평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동아일보》와 《문화일보》 선정 올해의 책 1위, 《조선일보》 선정 올해의 책 2위, 각 서점과 출판인 선정 올해의 책, 독자들이 선정한 올해의 한국소설 1위에 올랐다
작품 안에서 늘 허를 찌르는 반전을 선사했던 작가답게, 이번 작품에서 정유정의 상상력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빛을 발한다. 미지의 세계가 아닌 인간, 그 내면 깊숙한 곳으로 독자들을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껏 ‘악’에 대한 시선을 집요하게 유지해온 작가는 이번 신작 《종의 기원》에 이르러 ‘악’ 그 자체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정유정만의 독보적인 스타일로 ‘악’에 대한 한층 더 세련되고 깊이 있는 통찰을 선보인다.
등단작인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에선 정아의 아버지로, 《내 심장을 쏴라》에선 점박이로, 《7년의 밤》에서는 오영제로, 《28》에서는 박동해로. 매번 다른 악인을 등장시키고 형상화시켰으나 만족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목이 마르고 답답했다. 그들이 늘 ‘그’였기 때문이다. 외부자의 눈으로 그려 보이는 데 한계가 있었던 탓이다. 결국 ‘나’라야 했다. 객체가 아닌 주체여야 했다. 우리의 본성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을 ‘어두운 숲’을 안으로부터 뒤집어 보여줄 수 있으려면. 내 안의 악이 어떤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가, 어떤 계기로 점화되고, 어떤 방식으로 진화해 가는지 그려 보이려면. _‘작가의 말’에서
집 안에서 ‘누군가’에게 살해된 어머니를 발견하는 것이 사건의 시작이고, 그 ‘누군가’를 밝히면서 드러나는 진실이 이야기의 주를 이룬다. 과거의 이야기를 빼고 나면 ‘사흘(3일)’이라는 짧은 시간이 흐를 뿐이지만, 독자들은 아주 낯설고도 특별한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바로 그 누구도 온전히 보여주지 못했던 ‘악’의 속살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가 놀라운 통찰력으로 ‘악’의 심연을 치밀하게 그리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실 악은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장 끔찍한 것은 밖이 아니라 여기, 바로 우리 안에 있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빠른 호흡과 거침없는 문장, 앞뒤로 꽉 짜인 이야기 구조가 발휘하는 특유의 속도감과 흡인력은 여전하다. 다만 서사의 규모를 대폭 줄이는 대신 1분1초도 헛되게 쓰지 않는 정확하고 치밀한 묘사로 밀도감과 긴장감을 증폭시켰고,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한층 더 깊어졌다. 독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면서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한 단계 더 성장한 작가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나는 마침내 내 인생 최고의 적을 만났다.
그가 바로 나다!”
주인공 유진은 피 냄새에 잠에서 깬다. 발작이 시작되기 전 그에겐 늘 피비린내가 먼저 찾아온다. 유진은 매일 먹어야 하는 ‘약’을 며칠간 끊은 상태였고, 늘 그랬듯이 약을 끊자 기운이 넘쳤고, 그래서 전날 밤 ‘개병’이 도져 외출을 했었다. 유진이 곧 시작될 발작을 기다리며 누워 있을 때, 해진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10년 전 자신의 집에 양자로 들어와 형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해진은, 어젯밤부터 어머니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며 집에 별일 없는지 묻는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진은 피투성이인 방 안과, 마찬가지로 피범벅이 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다. 핏자국을 따라, 아파트 복층에 있는 자기 방에서 나와 계단을 지나 거실로 내려온 유진은 끔찍하게 살해된 어머니의 시신을 보게 된다.
비로소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경험해보지 않았던 것, 스스로 부른 재앙, 발작전구증세였다. 운명은 제 할 일을 잊는 법이 없다. 한쪽 눈을 감아줄 때도 있겠지만 그건 한 번 정도일 것이다. 올 것은 결국 오고, 벌어질 일은 끝내 벌어진다. 불시에 형을 집행하듯, 운명이 내게 자객을 보낸 것이었다. 그것도 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_ 본문 139쪽
16년 전, 열 살의 유진은 가족여행에서 사고로 아버지와 한 살 터울의 형을 잃었다. 그리고 몇 달 후부터 정신과 의사인 이모가 처방해준 정체불명의 약을 매일 거르지 않고 먹기 시작했다. 주목받는 수영선수였던 열여섯 살의 유진은 약을 끊고 경기에 출전했다가 그 대가로 경기 도중 첫 번째 발작을 일으키게 되고, 어머니는 유진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수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한없이 몸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약과 늘 주눅 들게 하는 어머니의 철저한 규칙, 그리고 자신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듯한 기분 나쁜 이모의 감시 아래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없었던 유진은 가끔씩 약을 끊고 어머니 몰래 밤 외출을 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왔다. 그런데 지난밤 외출 후에는 집에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어머니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하나씩 발견되는 단서들을 따라 지난밤의 기억들을 확인해나가던 유진 앞에, 시간을 거슬러 망각에 가려졌던 끔찍한 진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내 몸은 소리를 죽이기 시작했다. 숨 쉬듯 욱신대던 뒤통수가 평온을 되찾았다. 숨소리는 목 밑으로 잦아들고, 갈비뼈 안에선 심장이 느리게 뛰었다. 배 속에서 공처럼 구르던 긴장이 사라졌다. 오감이 날을 세웠다. 몇 미터 거리가 있는데도, 겁먹은 것의 축축하고 거친 숨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세상이 엎드리는 기분이었다. 모든 것들이 길을 열고 대기하는 느낌이었다.
_ 본문 283쪽
“운명은 제 할 일을 잊는 법이 없다……
올 것은 결국 오고, 벌어질 일은 끝내 벌어진다”
정유정은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의 말로 ‘작가의 말’을 시작한다. ‘살인’은 인간이 경쟁자를 제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고, 이 무자비한 ‘적응구조’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이다. ‘악은 우리 유전자에 내재된 어두운 본성이며, 악인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누구나일 수 있다’는 데이비드 버스의 논리는 살인과 악, 나아가 인간을 바라보는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가 된다.
사이코패스로 분류되는 이들이 저지르는 끔찍한 사건을 우리는 뉴스를 통해 종종 접하곤 한다. 우리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 그들의 모습에서 작가는 인간 본성의 어둠을 포착하고 거침없이 묘사해 나간다. 어린 시절부터 학습돼 온 도덕과 교육, 윤리적 세계관을 철저하게 깨나감으로써 비로소 평범했던 한 청년이 살인자로 태어나는 과정을 그린 ‘악인의 탄생기’를 완성시킨 것이다.
폭풍을 피할 항구 같은 건 없다. 도착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폭풍의 시간은 암흑의 시간이고, 나는 무방비상태로 거기에 던져진다. 널리 알려진 대로, 과정을 기억하지도 못한다. 의식이 스스로 깨어날 때까지 길고도 깊은 잠을 잔다. _ 본문 283쪽
작가는 우리의 본성 안에 숨은 ‘어두운 숲’을 똑바로 응시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 내면의 악, 타인의 악, 나아가 삶을 위협하는 포식자의 악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종의 기원》의 이야기가 그 어떤 낯선 세계의 이야기보다 낯설면서도 우리를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게 하고, 다양한 해석의 결로 저마다의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