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상세정보
Detail Information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 : 유쾌하고 신랄한 여자 장의사의 좋은 죽음 안내서
원서명
Smoke Gets in Your Eyes: And Other Lessons from the Crematory
저자
번역자
원저자
출판사
출판일
20200122
가격
₩ 18,000
ISBN
9791190403979
페이지
357 p.
판형
135 X 210 mm
커버
Book
책 소개
“우리는 모두 시체가 될 사람들인 것이다.”
화장터를 거닐며 죽음을 응시하다
“죽음과 시체들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들을 읽으면서 ‘죽음’을 구체적으로 감각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가 인문학적 지식과 경험을 동원해 독창하고 세밀한 방식으로
‘좋은 죽음’이라는 결론에 가닿는 과정을 따라가는 것은 굉장한 경험이 될 것이다.”
—김혼비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저자)
“나처럼 ‘죽음’ 언저리에서 일하는 저자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눈을 부릅뜬 채
직관한 이 죽음의 기록은 차라리 유쾌하고 신랄한 생존 증명서 같다.”
—김완(죽음 현장 특수청소부, 하드웍스 대표)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렇기에 죽음은 미리 준비해야 한다.
이 책을 통해 나 자신과 가족, 주변 사람들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기를 바란다.”
—심은이(한국의 첫 번째 여성 장례지도사, 『아름다운 배웅』 저자)
“장의사에 대해서 이렇게 생생한 정보를 접한 적이 없다.
죽음학과 관련해서 대단히 희귀한 책.”
—최준식(한국죽음학회 회장,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화장터를 거닐며 죽음을 응시하다
“죽음과 시체들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들을 읽으면서 ‘죽음’을 구체적으로 감각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가 인문학적 지식과 경험을 동원해 독창하고 세밀한 방식으로
‘좋은 죽음’이라는 결론에 가닿는 과정을 따라가는 것은 굉장한 경험이 될 것이다.”
—김혼비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저자)
“나처럼 ‘죽음’ 언저리에서 일하는 저자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눈을 부릅뜬 채
직관한 이 죽음의 기록은 차라리 유쾌하고 신랄한 생존 증명서 같다.”
—김완(죽음 현장 특수청소부, 하드웍스 대표)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렇기에 죽음은 미리 준비해야 한다.
이 책을 통해 나 자신과 가족, 주변 사람들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기를 바란다.”
—심은이(한국의 첫 번째 여성 장례지도사, 『아름다운 배웅』 저자)
“장의사에 대해서 이렇게 생생한 정보를 접한 적이 없다.
죽음학과 관련해서 대단히 희귀한 책.”
—최준식(한국죽음학회 회장,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목차
추천의 말 ― 죽음과 겨우 눈 맞추기까지 (김혼비)
저자의 말 ― 두려움을 응시하기
시신을 면도하며
시체 박스
쿵 소리
보이지 않는 죽음
점화 단추
핑크 칵테일
마녀와 아기들
직접 화장
자연스럽지 못한 자연스러움
죽음의 무도
에로스와 타나토스
부패
씻김
혼자 치른 참관 화장
길을 잃다
장의학교
운구차
죽음의 기술
돌아온 탕아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출처에 대하여
저자의 말 ― 두려움을 응시하기
시신을 면도하며
시체 박스
쿵 소리
보이지 않는 죽음
점화 단추
핑크 칵테일
마녀와 아기들
직접 화장
자연스럽지 못한 자연스러움
죽음의 무도
에로스와 타나토스
부패
씻김
혼자 치른 참관 화장
길을 잃다
장의학교
운구차
죽음의 기술
돌아온 탕아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출처에 대하여
본문발췌
˝이런 식으로 생각해봐. 엄마 배 속은 네가 아홉 달 동안 살던 곳이잖아. 이 세상에 너를 나오게 한 곳이잖아. 너의 기원이자...
고향이야. 거기다 투관침을 찔러? 그 몸을 침으로 뚫어? 자기가나온 곳을 망가뜨린다고? 정말 그렇게 하고 싶어?˝
˝피가 내 혈관 속을 돌아 그 밑에 깔린 부패한 시체들 위로 흐르고있는 지금 이 순간 나는 살아 있다. 있을 수도 있는 많은 내일을 품은 채로, 그렇다, 지금 세운 여러 계획들은 내가 죽고 나면 산산조 각 나버리거나 미완성으로 남을 수도 있다. 나는 육체적으로 어떻게 죽을지 선택할 수 없고, 오로지 정신적으로 어떻게 죽을지만 선 택할 수 있다. 죽음이 28세에 찾아오는 93세에 찾아오든, 나는 만족한 채 무(無)로 돌아가 스르르 미끄러져 죽기로 선택했다. 그래서내 몸을 이루는 원자가 나무들을 가린 바로 그 안개가 되도록 말이다. 죽음과 묘지의 정적은 형벌이 아니라 잘 살아낸 삶에 대한 보상인 것이다.˝
경제가 나쁠 때는 주요 도시에서 신원 미상의 시체들이 급증한다. 그들 모두가 노숙인이나 무연고자들은 아니더라도 그렇다. 아들이 어머니를 사랑할 순 있지만, 막상 집이 압류되고 타던 차가 압류되고 나면 어머니의 시신은 유물에서 짐으로 아주 빨리 변하고 마는 것이다.
P.13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경험이 책이나 글로 나와 있지만, 그럴 수 없는 단 하나의 소재가 있다면 ‘죽음의 순간‘, 말하자면 ‘죽음의 실체‘라는 것이었다. 세상에 필자들이 이렇게나 많지만 죽어본 필자는 없고, 고스트 라이어는 있지만 ‘고스트‘ 라이터는 없기 때문이다. 죽음 그 자체는 죽어보지 않은 자들의 상상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다.
-추천의 말
P.19
아주 작은 찰나가 허락된다면 꼭 이것만큼은 떠올리고 싶다. 지금 나는 빌린 원자들을 우주에 반납하는 거라고. 그렇다. 죽음이란 건 내가 있을 자리에 내 몸이 없을 거라는 의미가 아니다. 내 몸이 천천히 우주로 이동 중이라는 의미이다. 이 생각만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주는 말이 없다. 이 생각을 할 때면 나는 죽음과 조금 더 오래 눈을 맞출 수 있을 것만 같다.
-추천의 말 김혼비
P.69
추론하건대 죽음에 대한 우리의 병적인 두려움은 죽음을 어둡고 나쁜 운명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데서 오는 것 같다. 해결책은 ‘전통적‘인 장례의 모든 비상식적인 것들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P.92
루마니아 출신 철학자 에밀 시오랑은 자살이야말로 인간이 진실로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권리라고 말했다. 생은 모든 면에서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수 있고 ˝이 세상은 모든 것을 우리에게서 빼앗아갈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것을 막을 힘은 아무에게도 없다.˝
P.175
누군가를 자연스럽게 보이게 하기 위한 절차가 종종 몹시 ‘부자연스럽게‘ 보인다는 것은 장의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P.177
우리는 사람들이 영원히 처음처럼 남아 있기를 바란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한 지 수십 년 후에도 볼 빨간 케이트 윈슬렛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타이타닉‘의 하늘에서 만나면 그러할 것처럼 말이다.
P.179
사람들은 말한다. 돼지에게 입술연지를 발라놓아도 돼지는 여전히 돼지라고. 시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시신에 입술연지를 바르고서, 시신 분장 놀이를 하는 것이다.
P.183
죽음은 ‘알려져야‘한다. 어려운 정신적, 육체적, 정서적 과정으로서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하고 존중받아야 하며, 있는 그대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P.245
여러모로 여자들은 죽음의 자연스러운 벗이었다. 여자가 아기를 낳을 때마다 그 여자는 한 생을 창조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한 죽음을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했다.
P.69
죽음에 대한 우리의 병적인 두려움은 죽음을 어둡고 나쁜 운명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데서 오는 것 같다. 해결책은 ‘전통적’인 장례의 모든 비상식적인 것들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P.99
인간의 대단한 승리는, 우리 뇌가 수백 수천년간 진화하여 우리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일이다. 인간은 슬프게도 자의식이 있는 생물이다. 비록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을 부정할 창의적인 방법들을 찾으려고 하루 종일 움직인다 해도, 자신이 아무리 힘 세고 사랑받고 특별하다 느낀다 해도, 언젠가는 죽어서 썩을 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는 이 지상에서 우리 종의 귀중한 일부만이 공유하는 마음의 짐이다.
P.183
죽음은 알려져야 한다. 어려운 정신적, 육체적. 정서적 과정으로서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하고 존중받아야 하며, 있는 그대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P.228
홀로 내버려두면 인체는 썩고 부패하고 분해되어 영광스럽게 원래 나왔던 흙으로 돌아간다. 이 과정을 막기 위해 시신을 방부처리하고, 무거운 보호용 관을 사용하는 관습은, 불가피한 것을 모면해보려는 필사적 시도이며 우리가 명백하게 해체에 대한 공포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P.310
내가 볼 때 좋은 죽음이란, 지금까지 하던 일을 잘 정리하고, 전할 필요가 있는 좋고 나쁜 말을 전하고, 죽을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좋은 죽음이란 수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견딜 필요없이 죽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좋은 죽음이란 죽음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죽을 시간이 왔을 때 싸우지 않는다는 뜻이다.
P.17
어떤 특정한 방식을 ‘좋은 죽음‘이라고 정해놓는다면, 그와 다른 방식은 ‘나쁜 죽음‘이 되는 걸까. 각자 처한 문화적 가치관과 현실적 여건, 맥락이 다른데 합의된 특정한 방식을 정하는 게 가능할까. 특히 한 사람의 죽음에는그의 주변인들과, 죽음의 현장을 지키고 시체를 책임질 사람들이 연루된다.(아무도 연루되지 않는 죽음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죽음이 그들에게는 나쁜 죽음일 수 있다면 그건 좋은 죽음일까 니쁜 죽음일까.
고향이야. 거기다 투관침을 찔러? 그 몸을 침으로 뚫어? 자기가나온 곳을 망가뜨린다고? 정말 그렇게 하고 싶어?˝
˝피가 내 혈관 속을 돌아 그 밑에 깔린 부패한 시체들 위로 흐르고있는 지금 이 순간 나는 살아 있다. 있을 수도 있는 많은 내일을 품은 채로, 그렇다, 지금 세운 여러 계획들은 내가 죽고 나면 산산조 각 나버리거나 미완성으로 남을 수도 있다. 나는 육체적으로 어떻게 죽을지 선택할 수 없고, 오로지 정신적으로 어떻게 죽을지만 선 택할 수 있다. 죽음이 28세에 찾아오는 93세에 찾아오든, 나는 만족한 채 무(無)로 돌아가 스르르 미끄러져 죽기로 선택했다. 그래서내 몸을 이루는 원자가 나무들을 가린 바로 그 안개가 되도록 말이다. 죽음과 묘지의 정적은 형벌이 아니라 잘 살아낸 삶에 대한 보상인 것이다.˝
경제가 나쁠 때는 주요 도시에서 신원 미상의 시체들이 급증한다. 그들 모두가 노숙인이나 무연고자들은 아니더라도 그렇다. 아들이 어머니를 사랑할 순 있지만, 막상 집이 압류되고 타던 차가 압류되고 나면 어머니의 시신은 유물에서 짐으로 아주 빨리 변하고 마는 것이다.
P.13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경험이 책이나 글로 나와 있지만, 그럴 수 없는 단 하나의 소재가 있다면 ‘죽음의 순간‘, 말하자면 ‘죽음의 실체‘라는 것이었다. 세상에 필자들이 이렇게나 많지만 죽어본 필자는 없고, 고스트 라이어는 있지만 ‘고스트‘ 라이터는 없기 때문이다. 죽음 그 자체는 죽어보지 않은 자들의 상상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다.
-추천의 말
P.19
아주 작은 찰나가 허락된다면 꼭 이것만큼은 떠올리고 싶다. 지금 나는 빌린 원자들을 우주에 반납하는 거라고. 그렇다. 죽음이란 건 내가 있을 자리에 내 몸이 없을 거라는 의미가 아니다. 내 몸이 천천히 우주로 이동 중이라는 의미이다. 이 생각만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주는 말이 없다. 이 생각을 할 때면 나는 죽음과 조금 더 오래 눈을 맞출 수 있을 것만 같다.
-추천의 말 김혼비
P.69
추론하건대 죽음에 대한 우리의 병적인 두려움은 죽음을 어둡고 나쁜 운명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데서 오는 것 같다. 해결책은 ‘전통적‘인 장례의 모든 비상식적인 것들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P.92
루마니아 출신 철학자 에밀 시오랑은 자살이야말로 인간이 진실로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권리라고 말했다. 생은 모든 면에서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수 있고 ˝이 세상은 모든 것을 우리에게서 빼앗아갈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것을 막을 힘은 아무에게도 없다.˝
P.175
누군가를 자연스럽게 보이게 하기 위한 절차가 종종 몹시 ‘부자연스럽게‘ 보인다는 것은 장의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P.177
우리는 사람들이 영원히 처음처럼 남아 있기를 바란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한 지 수십 년 후에도 볼 빨간 케이트 윈슬렛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타이타닉‘의 하늘에서 만나면 그러할 것처럼 말이다.
P.179
사람들은 말한다. 돼지에게 입술연지를 발라놓아도 돼지는 여전히 돼지라고. 시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시신에 입술연지를 바르고서, 시신 분장 놀이를 하는 것이다.
P.183
죽음은 ‘알려져야‘한다. 어려운 정신적, 육체적, 정서적 과정으로서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하고 존중받아야 하며, 있는 그대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P.245
여러모로 여자들은 죽음의 자연스러운 벗이었다. 여자가 아기를 낳을 때마다 그 여자는 한 생을 창조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한 죽음을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했다.
P.69
죽음에 대한 우리의 병적인 두려움은 죽음을 어둡고 나쁜 운명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데서 오는 것 같다. 해결책은 ‘전통적’인 장례의 모든 비상식적인 것들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P.99
인간의 대단한 승리는, 우리 뇌가 수백 수천년간 진화하여 우리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일이다. 인간은 슬프게도 자의식이 있는 생물이다. 비록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을 부정할 창의적인 방법들을 찾으려고 하루 종일 움직인다 해도, 자신이 아무리 힘 세고 사랑받고 특별하다 느낀다 해도, 언젠가는 죽어서 썩을 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는 이 지상에서 우리 종의 귀중한 일부만이 공유하는 마음의 짐이다.
P.183
죽음은 알려져야 한다. 어려운 정신적, 육체적. 정서적 과정으로서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하고 존중받아야 하며, 있는 그대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P.228
홀로 내버려두면 인체는 썩고 부패하고 분해되어 영광스럽게 원래 나왔던 흙으로 돌아간다. 이 과정을 막기 위해 시신을 방부처리하고, 무거운 보호용 관을 사용하는 관습은, 불가피한 것을 모면해보려는 필사적 시도이며 우리가 명백하게 해체에 대한 공포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P.310
내가 볼 때 좋은 죽음이란, 지금까지 하던 일을 잘 정리하고, 전할 필요가 있는 좋고 나쁜 말을 전하고, 죽을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좋은 죽음이란 수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견딜 필요없이 죽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좋은 죽음이란 죽음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죽을 시간이 왔을 때 싸우지 않는다는 뜻이다.
P.17
어떤 특정한 방식을 ‘좋은 죽음‘이라고 정해놓는다면, 그와 다른 방식은 ‘나쁜 죽음‘이 되는 걸까. 각자 처한 문화적 가치관과 현실적 여건, 맥락이 다른데 합의된 특정한 방식을 정하는 게 가능할까. 특히 한 사람의 죽음에는그의 주변인들과, 죽음의 현장을 지키고 시체를 책임질 사람들이 연루된다.(아무도 연루되지 않는 죽음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죽음이 그들에게는 나쁜 죽음일 수 있다면 그건 좋은 죽음일까 니쁜 죽음일까.
저자소개
현재 로스앤젤레스에서 장의사로 일하고 있다. 어릴 적 쇼핑몰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어린아이의 추락사를 목격한 후 죽음이라는 주제에 사로잡혔다. 시카고 대학교에서 중세사를 전공하며, 죽음을 둘러싼 역사와 문화에 대해 공부했다. 졸업 후 샌프란시스코의 한 화장터 업체에서 하루에 수십 구씩 시체를 태워가며 현대 장례 문화의 최전방에서 일했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미국의 획일화된 장례 문화에 문제를 제기하며 새로운 장례 문화를 개척해나가고 있다. 죽음을 부정하는 문화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준비할 수 있도록 책과 강연, 유튜브 「장의사에게 물어보세요」 를 통해 죽음에 대한 담론을 친숙하게 풀어놓는다.
이 책을 비롯해 서로 다른 문화권의 죽음 의례를 탐방한 『좋은 시체가 되고 싶어』(근간) 등을 썼다. 현재 죽음에 대한 대안적인 문화를 탐구하는 장례업 전문가, 연구자, 예술가 들의 집단인 '좋은 죽음
교단'을 운영하고 있다.
이 책을 비롯해 서로 다른 문화권의 죽음 의례를 탐방한 『좋은 시체가 되고 싶어』(근간) 등을 썼다. 현재 죽음에 대한 대안적인 문화를 탐구하는 장례업 전문가, 연구자, 예술가 들의 집단인 '좋은 죽음
교단'을 운영하고 있다.
역자소개
서울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3대학교에서 불문학 석사와 박사 과정을 마쳤다. 여러 출판사에서 해외 도서 기획과 저작권 분야를 맡아 일했으며, 출판 기획·번역 네트워크 ‘사이에’를 만들어 해외 도서 번역에 힘쓰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D에게 보낸 편지』, 『티베트 스님의 노 프라블럼』, 『잘 죽는다는 것』, 『분노하라』, 『인간이라는 직업』 등 다수가 있다.
서평
“우리는 모두 시체가 될 사람들인 것이다.”
화장터를 거닐며 죽음을 응시하다
“죽음과 시체들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들을 읽으면서 ‘죽음’을 구체적으로 감각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가 인문학적 지식과 경험을 동원해 독창하고 세밀한 방식으로
‘좋은 죽음’이라는 결론에 가닿는 과정을 따라가는 것은 굉장한 경험이 될 것이다.”
김혼비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저자)
“나처럼 ‘죽음’ 언저리에서 일하는 저자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눈을 부릅뜬 채
직관한 이 죽음의 기록은 차라리 유쾌하고 신랄한 생존 증명서 같다.”
―—김완(죽음 현장 특수청소부, 하드웍스 대표)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렇기에 죽음은 미리 준비해야 한다.
이 책을 통해 나 자신과 가족, 주변 사람들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기를 바란다.”
—심은이(한국의 첫 번째 여성 장례지도사, [아름다운 배웅] 저자)
“장의사에 대해서 이렇게 생생한 정보를 접한 적이 없다.
죽음학과 관련해서 대단히 희귀한 책.”
—최준식(한국죽음학회 회장,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북페이지] 2014년 최고의 책 선정
세계적인 유튜브 스타이자 여성 장의사
케이틀린 도티가 전하는 죽음을 대면하는 법
우리는 죽음을 마주하기 어려운 사회에 살고 있다. 시신을 직접 본 적이 있는가? 죽어가는 사람의 곁을 지켜본 적은? 늙고 병든 몸이 요양원과 병원을 거쳐 시체가 되고, 영안실, 장례식장, 무덤과 화장터에 이르러 해체되는 과정은 모두 일상과 유리되어 있다. 다들 죽음에 관한 것은 멀리 하지만, 젊음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애쓴다. 운동과 식이요법, 기능성 식품을 부지런히 챙기는 것은 죽음을 하루라도 늦추기 위함이다.
이런 문화에서는 무방비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할 가능성이 높다. 그때가 되면 내가 원하는 나의 죽음은 어떤 형태이며,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추모해야 할지 충분히 숙고할 새도 없이, 장례업계의 표준화된 프로세스를 따라가기에도 벅찬 상황에 놓이게 된다. 결국 죽음을 회피하는 것은 삶을 주체적으로 마무리할 권한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죽음을 직시할 것을 권하며, 저자는 특유의 유머러스하면서도 신랄한 어조로 독자를 시체들의 공간으로 초대한다.
이 책에는 저자가 20대에 여성 장의사로서 장례업계에서 6년간 경험한 것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시체 한 구 한 구에 얽힌 흥미진진한 에피소드와 함께, 시신을 운반하고 화장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저자와 함께 재로 가득한 화장장을 거니는 듯한 간접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문장 곳곳에 위트가 가득하지만 그 톤은 결코 가볍지 않다. 시카고 대학에서 중세사를 전공한 저자는 역사와 종교, 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죽음을 다양한 맥락에서 사유한다. 백만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브 채널 「장의사에게 무엇이든 물어보세요」의 운영자이기도 한 그는 유쾌하고도 깊이 있는 글쓰기로, 죽음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전한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죽음을 가장자리로 밀어내고, 시신을 강철 문 뒤에 두고, 환자와 죽어가는 사람들을 병실에 몰아넣는다. 죽음을 너무나 잘 숨기는 바람에, 우리가 죽지 않는 첫 세대라고 거의 믿어도 될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며 우리도 그 사실을 안다. 위대한 문화인류학자 어니스트 베커는 이렇게 말했다. “죽음에 대한 생각과 두려움은 다른 무엇보다도 인간이라는 동물을 따라다닌다.” 죽음이 두려워서 우리는 대성당을 세우고, 아이를 낳고, 전쟁을 선포하며, 새벽 3시에 고양이 동영상을 본다. 죽음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가진 모든 창의적, 파괴적 충동의 원동력이 된다. 죽음을 가까이에서 이해할수록, 우리 자신을 좀 더 이해하게 된다.(21)
시신들은 산 사람으로 하여금 현실에 매여 있게 한다. 웨스트윈드에서 일하기 전까지, 나는 상대적으로 시신을 못 본 삶을 살아왔다. 이제 나는 화장장 냉장고에 쌓인 시신들을 수십 구씩 다룬다. 시신들을 대하다 보면, 나 자신의 죽음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대면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기술이 우리의 선장이 되었다 해도, 그 배 밖으로 닻을 내려 우리를 끌어내리는 데는 단 한 구의 시신이면 충분하다. 아무리 영광스럽게 포장해도 시체는 우리가 먹고 싸고 끝내 죽을 수밖에 없는 동물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려준다. 우리는 모두 앞으로 시신이 될 사람들인 것이다.(240)
움직여주지 않으면 환자는 아직 살아 있어도 산 채로 자신의 괴사한 조직에 먹혀 그야말로 부패하기 시작한다. 웨스트윈드의 화장 준비실에 들어왔던 특이한 시체를 나는 평생 기억할 것이다. 아흔 살 먹은 흑인 할머니였는데, 자리보전하는 환자들이 칙칙한 우리 같은 곳에 누워 공허하게 벽만 응시하는, 그런 낙후된 양로원에서 가져온 시체였다. 그녀의 등을 씻기려고 돌려 눕히자, 등 아래쪽에 축구공만한 크기의, 섬뜩하게 놀라운 것이 나 있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상처가 곪아 있었던 것이다. 그건 곪아 터지려 하는 지옥의 쩍 벌어진 아가리와 비슷했다. 그런 상처를 보면 우리의 암울한 미래가 보이는 듯했다.(313)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미리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면, 사전의료의향서나 DNR(Do Not Resuscitate, 심폐소생술 금지)이라는 지시와 장례 계획을 통해 확실한 의사표시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러한 미래에, 그리고 이런 미래를 지닌 암울한 현재에 직접 힘을 보태주는 셈이다.(317)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랑하는 누군가가 죽었을 때 충격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건 “왜 사람들은 죽는가?”, “이런 일이 어째서 나한테 일어나는가?” 같은 더 큰 실존적 물음의 짐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슬픔에 초점을 맞출 수 있을 거라는 뜻이다. 죽음이란 당신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죽음을 부정하는 문화는 잘 죽는 데 장애물이 된다.(323~324)
이러한 부정은 여러 형태를 띤다. 젊음에 대한 집착, 몸이 자연스레 노화하는 것이 괴상한 것이라는 생각을 파는 사람들이 굳이 쓰라고 강요하는 크림과 화학물질과 각종 해독 식이요법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어린이 500만 명 중에 310만 명이 굶주려 죽는데, 우리는 노화방지 상품을 만드느라 1년에 1000억 달러 이상을 쓰고 있다. 죽음에 대한 부정은 우리의 기술과 건축에서도 나타난다. 이는 우리가 도로에 치여 죽는 동물들보다는 맥북의 매끈한 선과 더 비슷한 점이 많다는 환상을 만들어낸다.(235)
역사적으로, 죽음 의례는 말할 것도 없이 종교적 신앙과 결부되어 왔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점 더 세속적으로 변해간다. 미국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종교는 ‘무교’로, 미국 인구의 약 20퍼센트를 차지한다. 자신이 강한 종교적 신념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한때 강력했던 죽음 의례가 요즘은 편의 위주로 바뀌었고 그 의미가 덜해졌다고 느낀다. 이런 시대에 현대 생활에 관한 의례를 만들어내는 창조성에는 한계가 없다. 자유는 짜릿하지만 또한 짐이기도 하다. 우리는 죽는다는 사실과 무관하게는 살 수가 없으며, 죽음을 마주하는 세속적 방법을 계발하는 것은 매년 더 중요해질 것이다.(301)
우리 사회에서 구할 수 있는 ‘죽음의 기술’에 대한 교과서는 없다.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 그 책을 쓰기로 했다. 종교인만 읽으라는 것이 아니라 점점 그 수가 늘어나는 무신론자들, 불가지론자들, 그리고 막연히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내가 볼 때 좋은 죽음이란, 지금까지 하던 일을 잘 정리하고, 전할 필요가 있는 좋고 나쁜 말을 전하고, 죽을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좋은 죽음이란 수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견딜 필요 없이 죽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좋은 죽음이란 죽음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죽을 시간이 왔을 때 싸우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좋은 죽음이지만, 전설적인 정신분석가 칼 융의 말대로 “내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이야기를 들어봤자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인간이 죽음과 맺는 관계는 오직 그 사람만의 것이다.(310)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치유하는 화장터 르포
이 책은 저자가 화장장에 취직해 시체를 면도하던 출근 첫날부터 시작된다. 두 눈을 부릅뜬 시체만 봐도 기겁하던 그였지만, 점차 시신과 죽음에 친숙해지는 과정을 그린다. 그는 어제 죽은 시신부터 부패한 시신까지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시체 박스를 확인하고, 화장로에서 삐져나온 재를 들이마시고, 인간의 지방이 녹아내린 기름을 뒤집어쓰기도 하며, 시체를 둘러싼 온갖 에피소드를 유머러스하게 들려준다. 또한 시체 운구부터 씻김, 화장, 분쇄에 이르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화장장 르포를 완성한다.
20대 여성으로서 장의사라는 직업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가 이토록 죽음에 천착하는 것은 어린 시절 목격한 죽음 때문이다. 우연히 쇼핑몰에서 추락사한 아기를 보고 당시 여덟 살이었던 그는 큰 충격에 빠진다. 죽음을 부정하는 문화 안에서 어떤 설명도, 위로도 들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죽음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 시작되었다. 대학에서 중세사를 전공한 것도 죽음을 학문적으로 가까이 접하고자 했던 욕망의 결과물이었다. 졸업 후 그는 화장터에서 일하며, 이 경험을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스스로 치유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는다. 저자는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일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죽음에 대한 침묵을 깨고 나와 이 경험을 기록한다.
때때로 나는 죽음에 직접 맞닥뜨리는 체험을 했더라면 내 어린 시절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생각해본다. 죽음이 있는 곳에 앉아 있으면서, 죽음과 악수를 한다. 죽음이 내 일거수일투족에 영향을 미치며 내게 “너는 언젠가 벌레에게 먹힐 몸이야.”라고 귀에 속삭인다. 그리고 우리는 친한 벗이 될 거라는 말을 듣는다. 그랬다면 죽음은 쭉 나의 친구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정말이지 나 같은 방년의 아가씨가 웨스트윈드처럼 섬뜩하고 오래된 화장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건 과연 어떤 의미일까? 진실은, 내가 이 직업을 옛날에 여덟 살 먹은 나에게 일어났던 일을 치유하기 위한 방도로 본다는 것이다. 소녀 시절 나는 밤이면 공포에 질려 담요를 덮고 쪼그려 앉은 채, 죽음이 나를 볼 수 없다면 데려갈 수도 없다고 믿었다.(68~69)
나의 하루는 오전 8시 30분에 웨스트윈드의 두 ‘레토르트(화장로를 가리키는 업계 은어)’를 켜면서 시작된다.……레토르트의 벽돌 방 안의 온도가 화씨 1500도(섭씨 816도)에 이르면 화장로는 첫 번째 시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이다. 아침마다 마이크는 캘리포니아주에서 발급된 화장허가서 여러 장을 내 책상 위에 쌓아놓고는, 오늘 화장할 사람은 누군지 내게 알려 준다. 허가서 두 장을 추린 다음 나는 내가 화장할 시신들을 ‘냉장 트럭’에서 찾아와야 한다. 냉장 트럭이란 시신들이 화장될 때까지 대기하는, 담당자가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시신 냉장고를 말한다. 차가운 바람이 나오는 냉장고 속을 뚫고 들어가 나는 첩첩이 쌓인 시체 박스(고인의 이름, 죽은 날짜가 적힌 상자)에 인사했다. 냉장 트럭에서는 얼음에 재운 시체 냄새가 난다.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잊을 수 없는 냄새다.(41~42)
마티네즈 씨가 안전하게 냉장 트럭 밖으로 나오자, 이제는 시체 박스를 열어야 할 시간이었다. 내가 발견한 바로는, 이것이 내 직업에서 가장 좋은 부분이었다.…… 박스를 열 때마다 집에서 호스피스 서비스를 받다가 평화롭게 죽음을 맞은 95세 할머니부터, 홈디포 가게 뒤의 쓰레기통에서 8일간 부패된 뒤에 찾아낸 30세 청년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발견할 수 있다. 한 구 한 구가 새로운 모험이다.(45)
만약 박스에서 찾아낸 시체에 범상치 않은 면이 있다면(파드마의 얼굴에 난 곰팡이를 생각해보라.), 나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살금살금 탐사 취재를 해나갔다. 전자 사망등록 체계와 검시관의 수정안, 사망확인서 같은 필수 행정 서류에는 그 사람의 삶과, 더 중요하게는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해 더 많은 정보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삶과 작별하여 내가 있는 화장장으로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45)
아무 처리도 하지 않은 죽은 사람의 얼굴은 끔찍해 보인다. 어쨌든 우리가 가진 매우 협소한 문화적 기대로 봤을 때 그렇다는 얘기다. 그들의 지친 두 눈은 흐리멍덩하게 허공을 응시한다. 입은 에드바르트 뭉크의 그림 「절규」에 나오는 것처럼 쫙 벌어져 있다.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다. 이런 이미지는 정상적인 생물학적 죽음의 과정을 반영하지만, 가족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가격표에 쓰여 있듯이, 장의업체라면 어디서나 보통 ‘모양을 만드는’ 비용으로 175~500달러를 가족에게 청구한다. 그래서 시신들은 ‘평화롭고’ ‘자연스럽고’ ‘편히 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172)
한번은 화장로를 쓸어내는 동안 뜨거운 뼛조각 하나가 튀어올랐다. 나는 우연히 그걸 밟았는데, 신고 있던 장화의 고무바닥의 깊숙한 곳까지 타서 구멍이 났다. “이런 제길!” 난 소리쳤고, 나도 모르게 무릎을 홱 움직여 그 뼈를 화장로 저편까지 포물선 모양으로 높이 차 보내버렸다. 뼈는 시체 운반용 들것이 줄 지어 있는 곳 어딘가에 착지했다. 5분 뒤 두 손과 양 무릎으로 기어 다니면서 나는 그 숯덩이를 찾아 장화에 뼈 모양으로 난 구멍과 맞는지 그 조각을 맞춰보았다. 당신도 언젠가는 산산조각 날 것이다.(195)
엔쿄 패트 오하라는 9・11 사태 당시 뉴욕시 선불교 센터의 수장이었다. 그는 세계무역 센터의 고층 건물들이 혼돈의 비명과 요란한 소리 속에 무너졌을 때 “그 냄새는 몇 주 동안 빠지지 않았고, 마치 우리가 숨 쉴 때 사람들을 들이마시는 것같이 느꼈다.”라며 “그건 사람을 포함한 모든 것을 해체시킨 온갖 것들의 냄새였다. 사람들과 전기로 된 것들과 돌덩이와 유리와 모든 것.”이라고 말했다.……오하라는 사람들에게 이 이미지에서 도망치지 말라고 말한다. 이것은 항상 일어나는 일이지만 보이지 않았을 뿐이며, 지금 처음으로 그것을 보고, 냄새 맡고, 느끼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인정하라고 그는 조언한다. 웨스트윈드에서 나는 처음인 듯 느낀 것을 보고, 냄새 맡고, 느끼고, 경험하고 있었다. 이런 유형의 직면은 현실과 관계 맺는 일이었다. 그건 아주 소중했고, 나는 죽음을 직면하는 데 빠르게 중독되어 갔다.(49)
오늘날의 죽음 의례, 이대로 괜찮은가?
저자는 상업주의로 물든 장의업계의 이면을 낱낱이 보여준다. 시신에 울긋불긋한 메이크업을 하고, 1급 발암물질로 시신을 방부처리하며, 고가의 관을 권하는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죽음 의례가 실은 몇십 년밖에 되지 않았음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뒷받침한다. 시신에 방부처리를 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미국의 남북전쟁 이후의 일이며, 중세 유럽의 교회에서는 부패하는 시신의 냄새 속에서 예배를 보는 일도 흔했다. 또한 일본, 중국, 인도, 티베트, 이슬람, 브라질 원주민 등 다양한 문화권의 죽음 의례를 들여다봄으로써 다른 선택지도 가능함을 시사한다. 이에 대해서는 저자의 두 번째 책 [좋은 시체가 되고 싶어(근간)]에서 보다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속한 문화에서 당연시하는 죽음 의례는 과연 최선의 것인가? 좋은 죽음이란 무엇일까? 현대인은 죽음과 어떤 상호작용을 해야 하는가? 저자는 종교가 약화되고 무신론자가 늘어나는 지금이, 죽음을 적극적으로 사유해야 할 적기라고 본다. 금기 없이 개인과 공동체뿐만 아니라, 자연과 우주 차원에서 그 의미를 폭넓게 고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삶이 “우주의 대출 프로그램에서 몸을 이루는 원자들을 부여”받은 것이라 보고, 이 원자를 돌려주는 과정으로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시신이 부패해 땅으로 돌아가기 쉽도록 ‘자연 매장’하기로 결심한다. 그에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죽음은 삶의 연장선상에서 널리 함께 의논해야 할 공동의 화두이다.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을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환기하며, 죽음을 대면하고 스스로 질문을 던지도록 돕는다.
홀로 내버려두면 인체는 썩고 부패하고 분해되어 영광스럽게 원래 나왔던 흙으로 돌아간다. 이 과정을 막기 위해 시신을 방부처리하고, 무거운 보호용 관을 사용하는 관습은, 불가피한 것을 모면해보려는 필사적 시도이며 우리가 명백하게 해체에 대한 공포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죽음 산업은 관과 시체가 ‘자연스러워’ 보이는 데 도움을 준다는 명목하에 방부처리를 광고하지만, 미국의 현재 죽음 관습은 곰과 코끼리 같은 커다란 동물들에게 작고 귀여운 옷을 입혀 춤추게 하는 것, 또는 에펠탑 복사본을 세우는 것, 그리고 베네치아의 운하가 사람 살기 힘든 미국 사막 한가운데 있는 것만큼이나 부자연스러운 일이다.(228)
장의업이 대중을 속여 가로채고 있었던 것은 돈보다는 ‘죽음’ 자체였다. 그러니까 죽음과의 실제적인 상호작용을 하고 죽는다는 사실을 대면할 기회를 우리는 박탈당한 것이다.(169)
웨스트윈드에서 부패란 무대 뒤에서조차 드문 일이다. 현대의 세속적 죽음의 해묵은 창고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음과 같다. 우리 고객 대부분은 요양원이나 병원처럼 의학적인 환경에서 죽는다. 그리고 냉동은 아니지만 섭씨 4.4도 이하의 일정 온도를 유지하는 장의사의 냉장고로 이송된다. 주에서 발급되는 적절한 허가서가 작성되는 동안 시체들이 냉장고 안에서 며칠간 머물러야 하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시신들은 부패해서 냄새를 풍기는 단계에 접어들기 한참 전에 화장된다.(232)
서구 문화가 늘 이렇게 해체를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 부패와 우리의 관계는 옛날에는 전반적으로 친밀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성장하면서, 점점 더 많은 신자들이 교회 내부와 주변에 묻혀 성인과 가까이 있는 덕을 보겠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매장 관습은 로마부터 비잔티움까지 제국 전역에, 그리고 지금의 영국과 프랑스 땅까지 퍼졌다. 이렇게 시신들이 매장된 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도시들이 발달했다. 수요는 점점 많아졌고 교회는 이를 공급했다. 물론 유료였다.(228~230)
가장 부유한 교회의 후원자들일수록 성인에 가장 가까운, 가장 좋은 자리를 원했다. 만약 교회 안에 시신을 묻을 만한 크기의 호젓한 땅이 있다면, 그 안에 시체가 묻혀 있을 게 확실했다. 과장이 아니라, 여기저기 어디에나 시체들이 있었다. 사람들이 특히 선호하는 위치는 애프스 주위의 반원과 입구 현관이다. 그 핵심적인 위치 너머에 무한 경쟁이 있었다. 시신들은 복도의 판때기 밑이나 지붕 굴뚝, 처마 밑에 안치되거나, 심지어 벽 속에 차곡차곡 쌓이기도 했다. 교회의 출석자 수는 살아 있는 교구민 수를 넘어선, 벽 속의 시신들까지 의미했다.(231)
[죽음 앞의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1000년간의 서양의 죽음에 대해 훌륭하고 광범위한 저서를 쓴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는 “죽은 자는 무서움을 자아내기를 완전히 중단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러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아리에스가 과장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중세의 유럽인들이 죽음을 두려워했다고 해도 그들은 죽음을 받아들였다. 성인들의 주변에 있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숭고함 덕분이다. 이들의 존재는 부적절한 풍경과 냄새와 함께 살아가는 것의 결함을 압도할 만큼 컸다.(231)
티베트 고산 지대에서는 땅에 바위가 너무 많아 매장을 하지 못하는 데다 나무마저 드물어 화장에 필요한 장작을 만들 수 없다. 티베트인들은 망자를 처리하는 색다른 방식을 발달시켰다. 직업적인 로규빠(시신을 부수는 사람)가 시신에서 살을 잘게 자르고, 남은 뼈는 보리 가루와 야크 버터와 함께 빻는다. 시체는 높고 평평한 바위 위에 놓아두어 독수리들이 먹도록 한다. 새들이 날아 들어 그 시체를 파먹고 하늘로 날아올라 사방팔방으로 실어 나른다. 이렇게 남은 살을 다른 짐승들이 먹도록 놔두는 것은 시체를 처리하는 너그러운 방식이다.(130)
문화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충격적이고 우리의 개인적인 의미망에 도전하는 힘을 지닌 죽음 의례가 있다. 와리족이 동족의 살을 구워먹는 풍습부터 티베트 승려가 죽어서 독수리 부리에 갈기갈기 찢기는 것, 클리프의 긴 은빛 투관침으로 내장을 뚫는 것까지 말이다. 하지만 와리족의 행동과 티베트인이 고인의 시신을 갖고 한 일을 브루스가 클리프에게 한 일과 비교해보면, 그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믿음이다. 와리족은 신체를 온전히 없애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티베트인들에게는 한 사람의 몸에서 영혼이 떠난 다음에는 그 몸이 다른 존재들을 지탱해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북미 사람들은 시체에 방부처리를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어떤 믿음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를 편안하게 하는 의례가 아니라, 장례 비용 청구서에 가욋돈 900달러를 얹는 짓일 뿐이다.(130)
자연 매장은 환경보호적으로 사멸하는 가장 건전한 방법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산산조각 나고 통제 불능 상태가 된다는 두려움을 갑절은 감소시킨다. 자연 매장을 택한 사람들은 말한다. “내가 유기물질로 이뤄진, 무력하고 조각조각 모인 덩어리라는 것을 알아차릴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경축하노라. 해체 만세!” 웨스트윈드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이미 내 몸을 녹색 매장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일종의 우주의 대출 프로그램에서 내 심장이며 발톱, 간과 뇌를 이루는 원자들을 부여받은 것으로 이해했다. 언젠가는 내가 이 원자들을 돌려줘야 할 때가 올 것이며, 내 미래의 시신을 화학적으로 보존함으로써 그 원자에 매달리려는 시도를 하고 싶지 않다.(236)
피가 내 혈관 속을 돌아 그 밑에 깔린 부패한 시체들 위로 흐르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나는 살아 있다, 있을 수도 있는 많은 내일을 품은 채로. 그렇다, 지금 세운 여러 계획들은 내가 죽고 나면 산산조각 나버리거나 미완성으로 남을 수도 있다. 나는 육체적으로 어떻게 죽을지를 선택할 수 없고, 오로지 정신적으로 어떻게 죽을지만 선택할 수 있다. 죽음이 28세에 찾아오든 93세에 찾아오든, 나는 만족한 채 무(無)로 돌아가 스르르 미끄러져 죽기로 선택했다. 그래서 내 몸을 이루는 원자가 나무들을 가린, 바로 그 안개가 되도록 말이다. 죽음과 묘지의 정적은 형벌이 아니라 잘 살아낸 삶에 대한 보상인 것이다.(336)
화장터를 거닐며 죽음을 응시하다
“죽음과 시체들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들을 읽으면서 ‘죽음’을 구체적으로 감각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가 인문학적 지식과 경험을 동원해 독창하고 세밀한 방식으로
‘좋은 죽음’이라는 결론에 가닿는 과정을 따라가는 것은 굉장한 경험이 될 것이다.”
김혼비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저자)
“나처럼 ‘죽음’ 언저리에서 일하는 저자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눈을 부릅뜬 채
직관한 이 죽음의 기록은 차라리 유쾌하고 신랄한 생존 증명서 같다.”
―—김완(죽음 현장 특수청소부, 하드웍스 대표)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렇기에 죽음은 미리 준비해야 한다.
이 책을 통해 나 자신과 가족, 주변 사람들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기를 바란다.”
—심은이(한국의 첫 번째 여성 장례지도사, [아름다운 배웅] 저자)
“장의사에 대해서 이렇게 생생한 정보를 접한 적이 없다.
죽음학과 관련해서 대단히 희귀한 책.”
—최준식(한국죽음학회 회장,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북페이지] 2014년 최고의 책 선정
세계적인 유튜브 스타이자 여성 장의사
케이틀린 도티가 전하는 죽음을 대면하는 법
우리는 죽음을 마주하기 어려운 사회에 살고 있다. 시신을 직접 본 적이 있는가? 죽어가는 사람의 곁을 지켜본 적은? 늙고 병든 몸이 요양원과 병원을 거쳐 시체가 되고, 영안실, 장례식장, 무덤과 화장터에 이르러 해체되는 과정은 모두 일상과 유리되어 있다. 다들 죽음에 관한 것은 멀리 하지만, 젊음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애쓴다. 운동과 식이요법, 기능성 식품을 부지런히 챙기는 것은 죽음을 하루라도 늦추기 위함이다.
이런 문화에서는 무방비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할 가능성이 높다. 그때가 되면 내가 원하는 나의 죽음은 어떤 형태이며,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추모해야 할지 충분히 숙고할 새도 없이, 장례업계의 표준화된 프로세스를 따라가기에도 벅찬 상황에 놓이게 된다. 결국 죽음을 회피하는 것은 삶을 주체적으로 마무리할 권한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죽음을 직시할 것을 권하며, 저자는 특유의 유머러스하면서도 신랄한 어조로 독자를 시체들의 공간으로 초대한다.
이 책에는 저자가 20대에 여성 장의사로서 장례업계에서 6년간 경험한 것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시체 한 구 한 구에 얽힌 흥미진진한 에피소드와 함께, 시신을 운반하고 화장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저자와 함께 재로 가득한 화장장을 거니는 듯한 간접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문장 곳곳에 위트가 가득하지만 그 톤은 결코 가볍지 않다. 시카고 대학에서 중세사를 전공한 저자는 역사와 종교, 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죽음을 다양한 맥락에서 사유한다. 백만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브 채널 「장의사에게 무엇이든 물어보세요」의 운영자이기도 한 그는 유쾌하고도 깊이 있는 글쓰기로, 죽음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전한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죽음을 가장자리로 밀어내고, 시신을 강철 문 뒤에 두고, 환자와 죽어가는 사람들을 병실에 몰아넣는다. 죽음을 너무나 잘 숨기는 바람에, 우리가 죽지 않는 첫 세대라고 거의 믿어도 될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며 우리도 그 사실을 안다. 위대한 문화인류학자 어니스트 베커는 이렇게 말했다. “죽음에 대한 생각과 두려움은 다른 무엇보다도 인간이라는 동물을 따라다닌다.” 죽음이 두려워서 우리는 대성당을 세우고, 아이를 낳고, 전쟁을 선포하며, 새벽 3시에 고양이 동영상을 본다. 죽음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가진 모든 창의적, 파괴적 충동의 원동력이 된다. 죽음을 가까이에서 이해할수록, 우리 자신을 좀 더 이해하게 된다.(21)
시신들은 산 사람으로 하여금 현실에 매여 있게 한다. 웨스트윈드에서 일하기 전까지, 나는 상대적으로 시신을 못 본 삶을 살아왔다. 이제 나는 화장장 냉장고에 쌓인 시신들을 수십 구씩 다룬다. 시신들을 대하다 보면, 나 자신의 죽음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대면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기술이 우리의 선장이 되었다 해도, 그 배 밖으로 닻을 내려 우리를 끌어내리는 데는 단 한 구의 시신이면 충분하다. 아무리 영광스럽게 포장해도 시체는 우리가 먹고 싸고 끝내 죽을 수밖에 없는 동물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려준다. 우리는 모두 앞으로 시신이 될 사람들인 것이다.(240)
움직여주지 않으면 환자는 아직 살아 있어도 산 채로 자신의 괴사한 조직에 먹혀 그야말로 부패하기 시작한다. 웨스트윈드의 화장 준비실에 들어왔던 특이한 시체를 나는 평생 기억할 것이다. 아흔 살 먹은 흑인 할머니였는데, 자리보전하는 환자들이 칙칙한 우리 같은 곳에 누워 공허하게 벽만 응시하는, 그런 낙후된 양로원에서 가져온 시체였다. 그녀의 등을 씻기려고 돌려 눕히자, 등 아래쪽에 축구공만한 크기의, 섬뜩하게 놀라운 것이 나 있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상처가 곪아 있었던 것이다. 그건 곪아 터지려 하는 지옥의 쩍 벌어진 아가리와 비슷했다. 그런 상처를 보면 우리의 암울한 미래가 보이는 듯했다.(313)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미리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면, 사전의료의향서나 DNR(Do Not Resuscitate, 심폐소생술 금지)이라는 지시와 장례 계획을 통해 확실한 의사표시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러한 미래에, 그리고 이런 미래를 지닌 암울한 현재에 직접 힘을 보태주는 셈이다.(317)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랑하는 누군가가 죽었을 때 충격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건 “왜 사람들은 죽는가?”, “이런 일이 어째서 나한테 일어나는가?” 같은 더 큰 실존적 물음의 짐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슬픔에 초점을 맞출 수 있을 거라는 뜻이다. 죽음이란 당신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죽음을 부정하는 문화는 잘 죽는 데 장애물이 된다.(323~324)
이러한 부정은 여러 형태를 띤다. 젊음에 대한 집착, 몸이 자연스레 노화하는 것이 괴상한 것이라는 생각을 파는 사람들이 굳이 쓰라고 강요하는 크림과 화학물질과 각종 해독 식이요법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어린이 500만 명 중에 310만 명이 굶주려 죽는데, 우리는 노화방지 상품을 만드느라 1년에 1000억 달러 이상을 쓰고 있다. 죽음에 대한 부정은 우리의 기술과 건축에서도 나타난다. 이는 우리가 도로에 치여 죽는 동물들보다는 맥북의 매끈한 선과 더 비슷한 점이 많다는 환상을 만들어낸다.(235)
역사적으로, 죽음 의례는 말할 것도 없이 종교적 신앙과 결부되어 왔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점 더 세속적으로 변해간다. 미국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종교는 ‘무교’로, 미국 인구의 약 20퍼센트를 차지한다. 자신이 강한 종교적 신념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한때 강력했던 죽음 의례가 요즘은 편의 위주로 바뀌었고 그 의미가 덜해졌다고 느낀다. 이런 시대에 현대 생활에 관한 의례를 만들어내는 창조성에는 한계가 없다. 자유는 짜릿하지만 또한 짐이기도 하다. 우리는 죽는다는 사실과 무관하게는 살 수가 없으며, 죽음을 마주하는 세속적 방법을 계발하는 것은 매년 더 중요해질 것이다.(301)
우리 사회에서 구할 수 있는 ‘죽음의 기술’에 대한 교과서는 없다.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 그 책을 쓰기로 했다. 종교인만 읽으라는 것이 아니라 점점 그 수가 늘어나는 무신론자들, 불가지론자들, 그리고 막연히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내가 볼 때 좋은 죽음이란, 지금까지 하던 일을 잘 정리하고, 전할 필요가 있는 좋고 나쁜 말을 전하고, 죽을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좋은 죽음이란 수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견딜 필요 없이 죽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좋은 죽음이란 죽음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죽을 시간이 왔을 때 싸우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좋은 죽음이지만, 전설적인 정신분석가 칼 융의 말대로 “내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이야기를 들어봤자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인간이 죽음과 맺는 관계는 오직 그 사람만의 것이다.(310)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치유하는 화장터 르포
이 책은 저자가 화장장에 취직해 시체를 면도하던 출근 첫날부터 시작된다. 두 눈을 부릅뜬 시체만 봐도 기겁하던 그였지만, 점차 시신과 죽음에 친숙해지는 과정을 그린다. 그는 어제 죽은 시신부터 부패한 시신까지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시체 박스를 확인하고, 화장로에서 삐져나온 재를 들이마시고, 인간의 지방이 녹아내린 기름을 뒤집어쓰기도 하며, 시체를 둘러싼 온갖 에피소드를 유머러스하게 들려준다. 또한 시체 운구부터 씻김, 화장, 분쇄에 이르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화장장 르포를 완성한다.
20대 여성으로서 장의사라는 직업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가 이토록 죽음에 천착하는 것은 어린 시절 목격한 죽음 때문이다. 우연히 쇼핑몰에서 추락사한 아기를 보고 당시 여덟 살이었던 그는 큰 충격에 빠진다. 죽음을 부정하는 문화 안에서 어떤 설명도, 위로도 들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죽음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 시작되었다. 대학에서 중세사를 전공한 것도 죽음을 학문적으로 가까이 접하고자 했던 욕망의 결과물이었다. 졸업 후 그는 화장터에서 일하며, 이 경험을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스스로 치유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는다. 저자는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일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죽음에 대한 침묵을 깨고 나와 이 경험을 기록한다.
때때로 나는 죽음에 직접 맞닥뜨리는 체험을 했더라면 내 어린 시절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생각해본다. 죽음이 있는 곳에 앉아 있으면서, 죽음과 악수를 한다. 죽음이 내 일거수일투족에 영향을 미치며 내게 “너는 언젠가 벌레에게 먹힐 몸이야.”라고 귀에 속삭인다. 그리고 우리는 친한 벗이 될 거라는 말을 듣는다. 그랬다면 죽음은 쭉 나의 친구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정말이지 나 같은 방년의 아가씨가 웨스트윈드처럼 섬뜩하고 오래된 화장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건 과연 어떤 의미일까? 진실은, 내가 이 직업을 옛날에 여덟 살 먹은 나에게 일어났던 일을 치유하기 위한 방도로 본다는 것이다. 소녀 시절 나는 밤이면 공포에 질려 담요를 덮고 쪼그려 앉은 채, 죽음이 나를 볼 수 없다면 데려갈 수도 없다고 믿었다.(68~69)
나의 하루는 오전 8시 30분에 웨스트윈드의 두 ‘레토르트(화장로를 가리키는 업계 은어)’를 켜면서 시작된다.……레토르트의 벽돌 방 안의 온도가 화씨 1500도(섭씨 816도)에 이르면 화장로는 첫 번째 시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이다. 아침마다 마이크는 캘리포니아주에서 발급된 화장허가서 여러 장을 내 책상 위에 쌓아놓고는, 오늘 화장할 사람은 누군지 내게 알려 준다. 허가서 두 장을 추린 다음 나는 내가 화장할 시신들을 ‘냉장 트럭’에서 찾아와야 한다. 냉장 트럭이란 시신들이 화장될 때까지 대기하는, 담당자가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시신 냉장고를 말한다. 차가운 바람이 나오는 냉장고 속을 뚫고 들어가 나는 첩첩이 쌓인 시체 박스(고인의 이름, 죽은 날짜가 적힌 상자)에 인사했다. 냉장 트럭에서는 얼음에 재운 시체 냄새가 난다.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잊을 수 없는 냄새다.(41~42)
마티네즈 씨가 안전하게 냉장 트럭 밖으로 나오자, 이제는 시체 박스를 열어야 할 시간이었다. 내가 발견한 바로는, 이것이 내 직업에서 가장 좋은 부분이었다.…… 박스를 열 때마다 집에서 호스피스 서비스를 받다가 평화롭게 죽음을 맞은 95세 할머니부터, 홈디포 가게 뒤의 쓰레기통에서 8일간 부패된 뒤에 찾아낸 30세 청년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발견할 수 있다. 한 구 한 구가 새로운 모험이다.(45)
만약 박스에서 찾아낸 시체에 범상치 않은 면이 있다면(파드마의 얼굴에 난 곰팡이를 생각해보라.), 나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살금살금 탐사 취재를 해나갔다. 전자 사망등록 체계와 검시관의 수정안, 사망확인서 같은 필수 행정 서류에는 그 사람의 삶과, 더 중요하게는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해 더 많은 정보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삶과 작별하여 내가 있는 화장장으로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45)
아무 처리도 하지 않은 죽은 사람의 얼굴은 끔찍해 보인다. 어쨌든 우리가 가진 매우 협소한 문화적 기대로 봤을 때 그렇다는 얘기다. 그들의 지친 두 눈은 흐리멍덩하게 허공을 응시한다. 입은 에드바르트 뭉크의 그림 「절규」에 나오는 것처럼 쫙 벌어져 있다.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다. 이런 이미지는 정상적인 생물학적 죽음의 과정을 반영하지만, 가족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가격표에 쓰여 있듯이, 장의업체라면 어디서나 보통 ‘모양을 만드는’ 비용으로 175~500달러를 가족에게 청구한다. 그래서 시신들은 ‘평화롭고’ ‘자연스럽고’ ‘편히 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172)
한번은 화장로를 쓸어내는 동안 뜨거운 뼛조각 하나가 튀어올랐다. 나는 우연히 그걸 밟았는데, 신고 있던 장화의 고무바닥의 깊숙한 곳까지 타서 구멍이 났다. “이런 제길!” 난 소리쳤고, 나도 모르게 무릎을 홱 움직여 그 뼈를 화장로 저편까지 포물선 모양으로 높이 차 보내버렸다. 뼈는 시체 운반용 들것이 줄 지어 있는 곳 어딘가에 착지했다. 5분 뒤 두 손과 양 무릎으로 기어 다니면서 나는 그 숯덩이를 찾아 장화에 뼈 모양으로 난 구멍과 맞는지 그 조각을 맞춰보았다. 당신도 언젠가는 산산조각 날 것이다.(195)
엔쿄 패트 오하라는 9・11 사태 당시 뉴욕시 선불교 센터의 수장이었다. 그는 세계무역 센터의 고층 건물들이 혼돈의 비명과 요란한 소리 속에 무너졌을 때 “그 냄새는 몇 주 동안 빠지지 않았고, 마치 우리가 숨 쉴 때 사람들을 들이마시는 것같이 느꼈다.”라며 “그건 사람을 포함한 모든 것을 해체시킨 온갖 것들의 냄새였다. 사람들과 전기로 된 것들과 돌덩이와 유리와 모든 것.”이라고 말했다.……오하라는 사람들에게 이 이미지에서 도망치지 말라고 말한다. 이것은 항상 일어나는 일이지만 보이지 않았을 뿐이며, 지금 처음으로 그것을 보고, 냄새 맡고, 느끼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인정하라고 그는 조언한다. 웨스트윈드에서 나는 처음인 듯 느낀 것을 보고, 냄새 맡고, 느끼고, 경험하고 있었다. 이런 유형의 직면은 현실과 관계 맺는 일이었다. 그건 아주 소중했고, 나는 죽음을 직면하는 데 빠르게 중독되어 갔다.(49)
오늘날의 죽음 의례, 이대로 괜찮은가?
저자는 상업주의로 물든 장의업계의 이면을 낱낱이 보여준다. 시신에 울긋불긋한 메이크업을 하고, 1급 발암물질로 시신을 방부처리하며, 고가의 관을 권하는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죽음 의례가 실은 몇십 년밖에 되지 않았음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뒷받침한다. 시신에 방부처리를 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미국의 남북전쟁 이후의 일이며, 중세 유럽의 교회에서는 부패하는 시신의 냄새 속에서 예배를 보는 일도 흔했다. 또한 일본, 중국, 인도, 티베트, 이슬람, 브라질 원주민 등 다양한 문화권의 죽음 의례를 들여다봄으로써 다른 선택지도 가능함을 시사한다. 이에 대해서는 저자의 두 번째 책 [좋은 시체가 되고 싶어(근간)]에서 보다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속한 문화에서 당연시하는 죽음 의례는 과연 최선의 것인가? 좋은 죽음이란 무엇일까? 현대인은 죽음과 어떤 상호작용을 해야 하는가? 저자는 종교가 약화되고 무신론자가 늘어나는 지금이, 죽음을 적극적으로 사유해야 할 적기라고 본다. 금기 없이 개인과 공동체뿐만 아니라, 자연과 우주 차원에서 그 의미를 폭넓게 고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삶이 “우주의 대출 프로그램에서 몸을 이루는 원자들을 부여”받은 것이라 보고, 이 원자를 돌려주는 과정으로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시신이 부패해 땅으로 돌아가기 쉽도록 ‘자연 매장’하기로 결심한다. 그에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죽음은 삶의 연장선상에서 널리 함께 의논해야 할 공동의 화두이다.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을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환기하며, 죽음을 대면하고 스스로 질문을 던지도록 돕는다.
홀로 내버려두면 인체는 썩고 부패하고 분해되어 영광스럽게 원래 나왔던 흙으로 돌아간다. 이 과정을 막기 위해 시신을 방부처리하고, 무거운 보호용 관을 사용하는 관습은, 불가피한 것을 모면해보려는 필사적 시도이며 우리가 명백하게 해체에 대한 공포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죽음 산업은 관과 시체가 ‘자연스러워’ 보이는 데 도움을 준다는 명목하에 방부처리를 광고하지만, 미국의 현재 죽음 관습은 곰과 코끼리 같은 커다란 동물들에게 작고 귀여운 옷을 입혀 춤추게 하는 것, 또는 에펠탑 복사본을 세우는 것, 그리고 베네치아의 운하가 사람 살기 힘든 미국 사막 한가운데 있는 것만큼이나 부자연스러운 일이다.(228)
장의업이 대중을 속여 가로채고 있었던 것은 돈보다는 ‘죽음’ 자체였다. 그러니까 죽음과의 실제적인 상호작용을 하고 죽는다는 사실을 대면할 기회를 우리는 박탈당한 것이다.(169)
웨스트윈드에서 부패란 무대 뒤에서조차 드문 일이다. 현대의 세속적 죽음의 해묵은 창고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음과 같다. 우리 고객 대부분은 요양원이나 병원처럼 의학적인 환경에서 죽는다. 그리고 냉동은 아니지만 섭씨 4.4도 이하의 일정 온도를 유지하는 장의사의 냉장고로 이송된다. 주에서 발급되는 적절한 허가서가 작성되는 동안 시체들이 냉장고 안에서 며칠간 머물러야 하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시신들은 부패해서 냄새를 풍기는 단계에 접어들기 한참 전에 화장된다.(232)
서구 문화가 늘 이렇게 해체를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 부패와 우리의 관계는 옛날에는 전반적으로 친밀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성장하면서, 점점 더 많은 신자들이 교회 내부와 주변에 묻혀 성인과 가까이 있는 덕을 보겠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매장 관습은 로마부터 비잔티움까지 제국 전역에, 그리고 지금의 영국과 프랑스 땅까지 퍼졌다. 이렇게 시신들이 매장된 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도시들이 발달했다. 수요는 점점 많아졌고 교회는 이를 공급했다. 물론 유료였다.(228~230)
가장 부유한 교회의 후원자들일수록 성인에 가장 가까운, 가장 좋은 자리를 원했다. 만약 교회 안에 시신을 묻을 만한 크기의 호젓한 땅이 있다면, 그 안에 시체가 묻혀 있을 게 확실했다. 과장이 아니라, 여기저기 어디에나 시체들이 있었다. 사람들이 특히 선호하는 위치는 애프스 주위의 반원과 입구 현관이다. 그 핵심적인 위치 너머에 무한 경쟁이 있었다. 시신들은 복도의 판때기 밑이나 지붕 굴뚝, 처마 밑에 안치되거나, 심지어 벽 속에 차곡차곡 쌓이기도 했다. 교회의 출석자 수는 살아 있는 교구민 수를 넘어선, 벽 속의 시신들까지 의미했다.(231)
[죽음 앞의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1000년간의 서양의 죽음에 대해 훌륭하고 광범위한 저서를 쓴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는 “죽은 자는 무서움을 자아내기를 완전히 중단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러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아리에스가 과장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중세의 유럽인들이 죽음을 두려워했다고 해도 그들은 죽음을 받아들였다. 성인들의 주변에 있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숭고함 덕분이다. 이들의 존재는 부적절한 풍경과 냄새와 함께 살아가는 것의 결함을 압도할 만큼 컸다.(231)
티베트 고산 지대에서는 땅에 바위가 너무 많아 매장을 하지 못하는 데다 나무마저 드물어 화장에 필요한 장작을 만들 수 없다. 티베트인들은 망자를 처리하는 색다른 방식을 발달시켰다. 직업적인 로규빠(시신을 부수는 사람)가 시신에서 살을 잘게 자르고, 남은 뼈는 보리 가루와 야크 버터와 함께 빻는다. 시체는 높고 평평한 바위 위에 놓아두어 독수리들이 먹도록 한다. 새들이 날아 들어 그 시체를 파먹고 하늘로 날아올라 사방팔방으로 실어 나른다. 이렇게 남은 살을 다른 짐승들이 먹도록 놔두는 것은 시체를 처리하는 너그러운 방식이다.(130)
문화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충격적이고 우리의 개인적인 의미망에 도전하는 힘을 지닌 죽음 의례가 있다. 와리족이 동족의 살을 구워먹는 풍습부터 티베트 승려가 죽어서 독수리 부리에 갈기갈기 찢기는 것, 클리프의 긴 은빛 투관침으로 내장을 뚫는 것까지 말이다. 하지만 와리족의 행동과 티베트인이 고인의 시신을 갖고 한 일을 브루스가 클리프에게 한 일과 비교해보면, 그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믿음이다. 와리족은 신체를 온전히 없애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티베트인들에게는 한 사람의 몸에서 영혼이 떠난 다음에는 그 몸이 다른 존재들을 지탱해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북미 사람들은 시체에 방부처리를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어떤 믿음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를 편안하게 하는 의례가 아니라, 장례 비용 청구서에 가욋돈 900달러를 얹는 짓일 뿐이다.(130)
자연 매장은 환경보호적으로 사멸하는 가장 건전한 방법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산산조각 나고 통제 불능 상태가 된다는 두려움을 갑절은 감소시킨다. 자연 매장을 택한 사람들은 말한다. “내가 유기물질로 이뤄진, 무력하고 조각조각 모인 덩어리라는 것을 알아차릴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경축하노라. 해체 만세!” 웨스트윈드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이미 내 몸을 녹색 매장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일종의 우주의 대출 프로그램에서 내 심장이며 발톱, 간과 뇌를 이루는 원자들을 부여받은 것으로 이해했다. 언젠가는 내가 이 원자들을 돌려줘야 할 때가 올 것이며, 내 미래의 시신을 화학적으로 보존함으로써 그 원자에 매달리려는 시도를 하고 싶지 않다.(236)
피가 내 혈관 속을 돌아 그 밑에 깔린 부패한 시체들 위로 흐르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나는 살아 있다, 있을 수도 있는 많은 내일을 품은 채로. 그렇다, 지금 세운 여러 계획들은 내가 죽고 나면 산산조각 나버리거나 미완성으로 남을 수도 있다. 나는 육체적으로 어떻게 죽을지를 선택할 수 없고, 오로지 정신적으로 어떻게 죽을지만 선택할 수 있다. 죽음이 28세에 찾아오든 93세에 찾아오든, 나는 만족한 채 무(無)로 돌아가 스르르 미끄러져 죽기로 선택했다. 그래서 내 몸을 이루는 원자가 나무들을 가린, 바로 그 안개가 되도록 말이다. 죽음과 묘지의 정적은 형벌이 아니라 잘 살아낸 삶에 대한 보상인 것이다.(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