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상세정보
Detail Information
너와 막걸리를 마신다면
저자
출판사
출판일
20210812
가격
₩ 15,000
ISBN
9788984374294
페이지
324 p.
판형
128 X 182 mm
커버
Book
책 소개
평행 세계를 상상할 때 우리에게는 여러 선택지가 주어진다. 직업, 학벌, 애인 등등 다양한 설정 값을 변경하며 또 다른 '나'의 인생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설재인 작가는 이중에서도 가장 원초적인 요소를 선택했다. 바로 '성별'이다. 그렇게 “내가 만일 남자, 혹은 여자로 태어났다면 어떤 모습일까?”라는 우리 모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설 [너와 막걸리를 마신다면]이 탄생했다. 그러나 저자는 기발한 상상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를 기반으로 본인이 그려낸 세계 속에서 현실적인 문제들을 고발한다. 두 엄주영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났으나 서로 다른 모습으로 성장한다. 둘 다 폭력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남자 엄주영만이 아버지의 모습을 답습하고, 더 나아가 여자 엄주영은 ‘불행해질 여자들을 구하고자’하기까지 한다.
본문발췌
“엄마, 그거 알아? 나는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 걸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넌 또?”
본가 아파트의 뒷산에 ‘뒷산’이 아닌 이름이 붙어있단 걸 나는 서른셋이 되어서야 처음 알았다. ‘낙가산’. 그 산줄기를 한 시간 정도 타고 가다 보면 어느새 산 이름이 ‘것대산’이라고 슬그머니 바뀌었다. 엄마와 나는 낙가산과 것대산의 중간 즈음에서, 한참 동안의 오르막을 드디어 끝내고 내리막에 접어들며 호흡을 가다듬는 참이었다.
오늘의 코스는, 낙가산에서 출발해 것대산을 지나 산성 마을에 도착한 후 엄마와 막걸리를 한 잔씩 시원하게 마시는 것이었다.
“솔직히 엄마도 알잖아. 나 분노 조절 안 되는 거.”
“알지.”
“뭘 알아, 알긴. 엄만 반의반도 몰라.”
“왜 이랬다저랬다 해. 방금은 알 거라며.”
“엄마는 내가 연애하는 거 옆에서 본 적 없잖아. 엄마 그거 알아? 나 지금까지 연애할 때마다 남친들을 완전 음식물 쓰레기통처럼 썼어. 먹기 싫은 거, 상한 거, 그런 거 다 갖다 부었어. 술만 마시면 꼬장에 폭언에…. 지금까지 한 대도 안 맞은 게 신기하다니까. 내가 일하면서 맞는 여자들을 얼마나 많이 봐왔겠어. 그럴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린다고.”
“뭔 소리야. 네가 남자한테 왜 맞아!”
“안 맞았다니까, 좀 집중해서 들어. 엄마가 나한테 왜 맨날 말라빠졌는데 키까지 더 작은 남자 만나냐고 속상해 했잖아. 왜 학벌도 안 좋고 벌이도 시원찮고 말주변도 없이 수줍기만 한 애들 만나냐고 했잖아. 왜 그 잘하던 탁구나 계속 치지, 남 목 조르고 잡아채는 운동만 하냐고 13년째 혼내고 있잖아. 근데 엄마, 솔직히 말해줄까? 내가 왜 그랬는지?”
“너 갑자기 왜 이러니, 술도 안 마셨으면서.”
몸을 움직이고 호흡이 거칠어지면 아드레날린이 나와서인지 이상하게 평소 할 수 없던 말들을 마구 뱉게 된다.
“내가 술 먹고 아무리 쓰레기처럼 굴어도, 날 때릴 수 없을 만한 애들을 골라 사귄 거야. 내가 그 정도로 쓰레기 같았던 걸 나는 알고 있거든. 엄마, 그게 바로 내가 남자로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라는 이유야. 내가 남자로 태어났잖아? 학교 다닐 때 애들 괴롭히고, 연애하면서 여자 괴롭히고, 자식 낳으면 맨날 소리나 지르고, 그랬을 거야. 때렸을지도 몰라. 진짜로.”
“무슨 소리야, 너 인성 그렇게 나쁜 애 아니고, 엄마가 그렇게 안 키우려고 기를 썼을 거야.”
그다음에 이어 하고 싶던 대답은 속으로만 뱉었다. 유치원 다닐 때부터 인서울 해서 해방될 때까지 집에서 보고 배운 게 그것뿐인데, 엄마가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해도 별수 있었을 것 같아? 십여 년을 그런 집구석에서 커야 했던 아이가 짠, 하고 성인군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어쨌든 그래서 나는 남자로 태어나지 않아 천만다행이라고. 선천적으로 힘이 달리니까 나쁜 짓을 못하잖아. 저절로 착해졌어. 이러고 싶지 않은데.”
“…너 남자들 이겨먹으려고 유도 배웠지.”
“에에이, 못 그래. 사람들이 막, 여자가 격투기 하면 남자 이기겠네, 하고 기대하거든? 근데 너무 슬프지만 선천적인 하드웨어 차이가 있어. 엄마. 남녀는 타고난 근력이나 뼈대 자체가 아예 달라. 그러니까 싸움박질은 안 할 거야. 걱정하지 말고, 뭐 그냥 아, 이래서 얘가 연애를 더 이상 안 하는구나, 결혼할 마음도 없구나, 정도로 생각해주면 좋겠다 이거야. 쓰레기 되고 싶지 않으니까. 남 불행하게 하고 남의 삶 망치고, 그러고 싶지 않으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귤이나 먹자.”
뭘 이렇게 무겁게 챙겨왔어? 나는 핀잔을 주며 앉은 자리에서 귤을 다섯 개나 까먹었다. 엄마는 겨우 하나를 먹더니, 부르튼 입술에 귤즙이 들어가 따갑다며 립밤을 빌려 달라고 했다. 갚을 거야? 나는 괜히 투덜댔다.“초등학교 땐 H.O.T.에서 장우혁 좋아해서, 막 장우혁 부인이라고 복도에서 소리치고 다녔잖아요. 그러다 6학년 일진 언니한테 찍혀가지고 불려가지 않았어요? 신화에선 내내 김동완이었죠? 근육 너무 키워서 다 김동완 탈빠해도 혼자 김동완 목 놓아 부르고. 중학생 때 무심천에서, 무슨 행사였나, 하여간 그때 신화 왔었잖아요. 그때 학교 째고 맨 앞줄에 앉아서 기다렸죠?”
도박이었다. 어차피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까.
“외국 가수 중에선 아론 카터. 그러다 웨스트라이프로 갈아탔고. 왜냐하면 학교 영어 시간에 ‘마이 러브’를 하도 틀어줘 가지고. 언 엠티 스트릿, 언 엠티 하우스 따라 부르다가 정들어서 팬질하지 않았냐고요.”
최은빈은 내 얼굴과 손에 쥐여준 내 주민등록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경찰서에서 봤던 남자 엄주영의 주민등록증과 똑같은 생년월일, 그리고 똑같은 주소지가 적혀있었다.
“거의 맞아요. 하나만 빼고. 아론 카터 좋아한 적은 없어요. 그래서 최근에 걔가 성인 배우로 전향했다는 뉴스 보고 생각했죠. 내가 관상 하나는 잘 본다고.”
“…그래요. 뭐 제가 남자로 변한 세상에서 그 자그마한 사실 하나 정도는 충분히 달라지고도 남겠죠!”
“그런데 주영 님, 제가 이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쉽게 믿으리라고 기대하시는 건 아니죠.”
“당연히 아니죠. 저 같았으면 벌써 정신병자 취급하고 쫓아냈어요. 은빈 님 인내심이랑 이해력이 진짜 쩌시는 거예요. 역시 한국 경찰의 미래는 밝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감동입니다. 근데 다만요.”
다만.
“제가 다른 세계에서 떨어진 여자 엄주영이란 걸 믿지 않으셔도 좋아요. 다만 배중숙 씨가요. 그러니까 우리 엄마가, 이 세계에서조차 집안 남자들한테 겁나 시달리고 있는 게 빤히 보여요. 심지어 제가 살던 세계에선 아들이 없이 외동딸만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는데 이 세계에선 아들만 있고, 그 아들 개쓰레기라면서요, 은빈 님이 그러셨잖아요.
그래서 미칠 것 같아요. 배중숙 씨를, 그러니까 우리 엄마를,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 살게 도와주지 않고는 맘 편히 여길 떠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플러스, 남자 엄주영 혼쭐내주기. 어디서 감히 내 이름을 달고 망나니짓을 저질러요?”
“이해가 잘 안 돼요….”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저를 헛소리하는 미친년으로 보셔도 상관이 없다, 그러나 어쨌든 저의 세계에서 저는 엄용민 배중숙의 딸이었고 최은빈의 절친이었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의 남자 엄주영을 어떻게든 사람새끼로 만들어놓고 싶다. 아마 은빈 님도 저와 더불어 민중의 지팡이로서, 가녀린 저에게 도움을 주실 수 있을 거다, 뭐 그런 거죠. 더 나은 지역사회를! 살기 좋은 청주시를! 위해.”
누구 하나 잠을 깨고 귀를 열까 두려워 우리는 포차를 나와 고요한 길가에 서있었다.
“저도 그 새끼 잡아 처넣고 싶어요. 걔들한테 시달리는 바람에 경찰 된 건데. 말 다 했죠. 그런데, 정말로 잡아 처넣는 걸 원하세요? 아들이 감방 들어가면 주영 님 어머니… 어머니 맞나… 하여간 그 아주머니는요, 불행하시겠죠. 매일 눈물 찍어가며, 귀여웠던 아기 시절 추억하다가, 면회할 때면 바리바리 사식 싸들고 가서 먹이겠죠. 세상에 대한 원망만 깊어지고. 제가 이 일 하면서 얻은 결론이 뭔 줄 아세요? 무슨 일이 일어나든 결국 세상에서 제일 불행해지는 건요, 늙은 여자예요.”
그리고 우리도 늙은 여자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고요. 말을 마친 최은빈이 건물 벽에 등을 기댔다.
“…뭐라도 해봐야죠.”
“네?”
“이 꼴을 봤는데 어떻게 아무것도 안 하고 참아요, 제가. 게다가 전 어차피 이 세상 사람도 아니라서. 남의 세상 일이니까, 더 쉽게 간섭할래요. 그리고요, 저 보기보다 힘세요. 저 유도 오래 했거든요. 제 전완근 만져보실래요?”자유자재로 원래 세계에 돌아갈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그쵸. 식탁 맞은편에 앉아 머리를 싸매고 있는 은빈에게 말했다. 그럼 그냥 확 뒤통수 갈겨 버리고 내 세계로 꺼지면 되는데. 잘못된 행동을 할 때마다 그런 일이 반복된다면, 좀 교정이 되지 않을까요? 아 내가 천벌을 받는구나, 하고 말이에요.
“그러게. 아니, 그럼 거꾸로 생각해보죠.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
“그, 상당산성에 있는 막걸리 집에서 엄마랑 막걸리 먹다가 화장실엘 갔거든요. 그런데 다시 자리로 돌아오니까 남자 엄주영이 엄마 앞에 앉아있었어요. 그러고는 계속 여기예요.”
“헐, 음. 그럼 거길 다시 가볼까요?”
“네?”
“실험의 기본이잖아요. 똑같은 제한 조건 아래에서 같은 일이 벌어지는지 재차 확인하기. 저랑 같이 가서, 막걸리 마시고 화장실 다녀와봐요.”
나는 입을 헤 벌렸다. 그렇게 쉬운 생각을 왜 나는 하지 못했지?
“만약 성공하면요? 그러니까, 제 세계로 돌아가면요? 그런데 제가,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요…? 그냥 다 잊어야지, 골치 아프게 뭘 또 엮여, 하고요.”
“그렇게 약하고 책임감 없는 분이었다면 애당초 내 존재도 모르는 엄마를 위해 엄주영을 처단하겠다, 뭐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해요.” 맞아. 은빈은 칭찬을 입에 달고 사는 아이였지. “게다가, 제 절친이었다면서요. 저 나름 눈 높아요. 관상 잘 본다고는 저번에 얘기했죠? 함부로 말 섞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저는 주영 씨 절대적으로 믿어요.”
혼자 앉아서 나물 반찬을 리필해 먹는 엄마의 모습을 확인하고도 바로 뒷걸음질 쳐 다시 화장실로 달려간 것은 그, 절대적으로 믿는다, 는 옛 친구의 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됐어요. 다녀왔어요. 저 화장실이에요. 막걸리 먹고 여자화장실 세 번째 칸에 들어가면 돼. 그럼 옮겨가요. 시점은 제가 떠나온 그 과거, 딱 거기예요. 그 세계는 아직 1분도 안 움직인 것 같아요.”
숨이 찼다.
“저, 엄마한테 말 한마디 안 걸고 다시 여기로 달려왔어요, 은빈 님. 그냥, 어… 알아달라고요. 내가 진짜 진지하다, 라는 마음. 알아달라고 말하는 거예요.”
“의심한 적 없어요. 생각보다도 훨씬 빨리 왔는데요.”
은빈이 환하게 웃었다. 엄마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내 모든 사실을 유일하게 알고 있었던 친구의 웃음. 십여 년만에 보는 은빈의 표정이었다.
“저 잘했죠?”
“네.”
“그럼 우리 말 놓아요.”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해야 남자 엄주영을 손볼 수 있단 말인가.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탁구장 사람들이랑 친해진 후 이 막걸리 집에서 정기모임을 가져야 하나. 그리고 동시에, 어떻게든 구실을 만들어서, 남자 엄주영도 그 자리에 참여하도록 유도해야 하나.
“은빈아, 아까 말한 것처럼 진짜로 뒤통수 겁나 때린 다음 화장실로 도망갈까?”
“한 백 번은 반복해야 할 텐데. 체력이 되겠어?”
“아니.”
“응, 그래.”
우리 둘의 머리로 내릴 수 있는 수는 겨우 그 정도였다. 한참을 바닥만 보았다. 머리를 너무 많이 써서 배만 고팠다. 그때 은빈이 나를 불렀다.
“주영아.”
“응?”
“동창들 사이에서 엄주영 재혼한단 얘기가 돌던데 진짜일까?”
은빈의 물음이 잊고 있던 기억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던 스위치를 올려 주었다. 반짝. 머릿속에 불이 들어왔다.
“어어. 그러고 보니 그 비슷한 얘길 들었어. 처음 여기 떨어졌을 때, 그 청국장집에서.”
“진짜 막아야 되는데. 세상에 불행한 여자 하나 더 생기는 것밖엔 안 되는데…….”
누군가 축 늘어져있던 풍선에 숨을 불어넣은 듯, 별안간 커다란 목표가 부풀어 올랐다.
“그럼 일단, 구체적인 목표는 이렇게 잡으면 어떨까. 결혼 파투내기. 이건 진짜로 누군가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되는 일이니까, 너도 껄끄럽지 않을 거고. 불행해질 여자를 하나 구한다고 생각하자, 우리.”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넌 또?”
본가 아파트의 뒷산에 ‘뒷산’이 아닌 이름이 붙어있단 걸 나는 서른셋이 되어서야 처음 알았다. ‘낙가산’. 그 산줄기를 한 시간 정도 타고 가다 보면 어느새 산 이름이 ‘것대산’이라고 슬그머니 바뀌었다. 엄마와 나는 낙가산과 것대산의 중간 즈음에서, 한참 동안의 오르막을 드디어 끝내고 내리막에 접어들며 호흡을 가다듬는 참이었다.
오늘의 코스는, 낙가산에서 출발해 것대산을 지나 산성 마을에 도착한 후 엄마와 막걸리를 한 잔씩 시원하게 마시는 것이었다.
“솔직히 엄마도 알잖아. 나 분노 조절 안 되는 거.”
“알지.”
“뭘 알아, 알긴. 엄만 반의반도 몰라.”
“왜 이랬다저랬다 해. 방금은 알 거라며.”
“엄마는 내가 연애하는 거 옆에서 본 적 없잖아. 엄마 그거 알아? 나 지금까지 연애할 때마다 남친들을 완전 음식물 쓰레기통처럼 썼어. 먹기 싫은 거, 상한 거, 그런 거 다 갖다 부었어. 술만 마시면 꼬장에 폭언에…. 지금까지 한 대도 안 맞은 게 신기하다니까. 내가 일하면서 맞는 여자들을 얼마나 많이 봐왔겠어. 그럴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린다고.”
“뭔 소리야. 네가 남자한테 왜 맞아!”
“안 맞았다니까, 좀 집중해서 들어. 엄마가 나한테 왜 맨날 말라빠졌는데 키까지 더 작은 남자 만나냐고 속상해 했잖아. 왜 학벌도 안 좋고 벌이도 시원찮고 말주변도 없이 수줍기만 한 애들 만나냐고 했잖아. 왜 그 잘하던 탁구나 계속 치지, 남 목 조르고 잡아채는 운동만 하냐고 13년째 혼내고 있잖아. 근데 엄마, 솔직히 말해줄까? 내가 왜 그랬는지?”
“너 갑자기 왜 이러니, 술도 안 마셨으면서.”
몸을 움직이고 호흡이 거칠어지면 아드레날린이 나와서인지 이상하게 평소 할 수 없던 말들을 마구 뱉게 된다.
“내가 술 먹고 아무리 쓰레기처럼 굴어도, 날 때릴 수 없을 만한 애들을 골라 사귄 거야. 내가 그 정도로 쓰레기 같았던 걸 나는 알고 있거든. 엄마, 그게 바로 내가 남자로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라는 이유야. 내가 남자로 태어났잖아? 학교 다닐 때 애들 괴롭히고, 연애하면서 여자 괴롭히고, 자식 낳으면 맨날 소리나 지르고, 그랬을 거야. 때렸을지도 몰라. 진짜로.”
“무슨 소리야, 너 인성 그렇게 나쁜 애 아니고, 엄마가 그렇게 안 키우려고 기를 썼을 거야.”
그다음에 이어 하고 싶던 대답은 속으로만 뱉었다. 유치원 다닐 때부터 인서울 해서 해방될 때까지 집에서 보고 배운 게 그것뿐인데, 엄마가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해도 별수 있었을 것 같아? 십여 년을 그런 집구석에서 커야 했던 아이가 짠, 하고 성인군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어쨌든 그래서 나는 남자로 태어나지 않아 천만다행이라고. 선천적으로 힘이 달리니까 나쁜 짓을 못하잖아. 저절로 착해졌어. 이러고 싶지 않은데.”
“…너 남자들 이겨먹으려고 유도 배웠지.”
“에에이, 못 그래. 사람들이 막, 여자가 격투기 하면 남자 이기겠네, 하고 기대하거든? 근데 너무 슬프지만 선천적인 하드웨어 차이가 있어. 엄마. 남녀는 타고난 근력이나 뼈대 자체가 아예 달라. 그러니까 싸움박질은 안 할 거야. 걱정하지 말고, 뭐 그냥 아, 이래서 얘가 연애를 더 이상 안 하는구나, 결혼할 마음도 없구나, 정도로 생각해주면 좋겠다 이거야. 쓰레기 되고 싶지 않으니까. 남 불행하게 하고 남의 삶 망치고, 그러고 싶지 않으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귤이나 먹자.”
뭘 이렇게 무겁게 챙겨왔어? 나는 핀잔을 주며 앉은 자리에서 귤을 다섯 개나 까먹었다. 엄마는 겨우 하나를 먹더니, 부르튼 입술에 귤즙이 들어가 따갑다며 립밤을 빌려 달라고 했다. 갚을 거야? 나는 괜히 투덜댔다.“초등학교 땐 H.O.T.에서 장우혁 좋아해서, 막 장우혁 부인이라고 복도에서 소리치고 다녔잖아요. 그러다 6학년 일진 언니한테 찍혀가지고 불려가지 않았어요? 신화에선 내내 김동완이었죠? 근육 너무 키워서 다 김동완 탈빠해도 혼자 김동완 목 놓아 부르고. 중학생 때 무심천에서, 무슨 행사였나, 하여간 그때 신화 왔었잖아요. 그때 학교 째고 맨 앞줄에 앉아서 기다렸죠?”
도박이었다. 어차피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까.
“외국 가수 중에선 아론 카터. 그러다 웨스트라이프로 갈아탔고. 왜냐하면 학교 영어 시간에 ‘마이 러브’를 하도 틀어줘 가지고. 언 엠티 스트릿, 언 엠티 하우스 따라 부르다가 정들어서 팬질하지 않았냐고요.”
최은빈은 내 얼굴과 손에 쥐여준 내 주민등록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경찰서에서 봤던 남자 엄주영의 주민등록증과 똑같은 생년월일, 그리고 똑같은 주소지가 적혀있었다.
“거의 맞아요. 하나만 빼고. 아론 카터 좋아한 적은 없어요. 그래서 최근에 걔가 성인 배우로 전향했다는 뉴스 보고 생각했죠. 내가 관상 하나는 잘 본다고.”
“…그래요. 뭐 제가 남자로 변한 세상에서 그 자그마한 사실 하나 정도는 충분히 달라지고도 남겠죠!”
“그런데 주영 님, 제가 이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쉽게 믿으리라고 기대하시는 건 아니죠.”
“당연히 아니죠. 저 같았으면 벌써 정신병자 취급하고 쫓아냈어요. 은빈 님 인내심이랑 이해력이 진짜 쩌시는 거예요. 역시 한국 경찰의 미래는 밝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감동입니다. 근데 다만요.”
다만.
“제가 다른 세계에서 떨어진 여자 엄주영이란 걸 믿지 않으셔도 좋아요. 다만 배중숙 씨가요. 그러니까 우리 엄마가, 이 세계에서조차 집안 남자들한테 겁나 시달리고 있는 게 빤히 보여요. 심지어 제가 살던 세계에선 아들이 없이 외동딸만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는데 이 세계에선 아들만 있고, 그 아들 개쓰레기라면서요, 은빈 님이 그러셨잖아요.
그래서 미칠 것 같아요. 배중숙 씨를, 그러니까 우리 엄마를,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 살게 도와주지 않고는 맘 편히 여길 떠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플러스, 남자 엄주영 혼쭐내주기. 어디서 감히 내 이름을 달고 망나니짓을 저질러요?”
“이해가 잘 안 돼요….”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저를 헛소리하는 미친년으로 보셔도 상관이 없다, 그러나 어쨌든 저의 세계에서 저는 엄용민 배중숙의 딸이었고 최은빈의 절친이었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의 남자 엄주영을 어떻게든 사람새끼로 만들어놓고 싶다. 아마 은빈 님도 저와 더불어 민중의 지팡이로서, 가녀린 저에게 도움을 주실 수 있을 거다, 뭐 그런 거죠. 더 나은 지역사회를! 살기 좋은 청주시를! 위해.”
누구 하나 잠을 깨고 귀를 열까 두려워 우리는 포차를 나와 고요한 길가에 서있었다.
“저도 그 새끼 잡아 처넣고 싶어요. 걔들한테 시달리는 바람에 경찰 된 건데. 말 다 했죠. 그런데, 정말로 잡아 처넣는 걸 원하세요? 아들이 감방 들어가면 주영 님 어머니… 어머니 맞나… 하여간 그 아주머니는요, 불행하시겠죠. 매일 눈물 찍어가며, 귀여웠던 아기 시절 추억하다가, 면회할 때면 바리바리 사식 싸들고 가서 먹이겠죠. 세상에 대한 원망만 깊어지고. 제가 이 일 하면서 얻은 결론이 뭔 줄 아세요? 무슨 일이 일어나든 결국 세상에서 제일 불행해지는 건요, 늙은 여자예요.”
그리고 우리도 늙은 여자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고요. 말을 마친 최은빈이 건물 벽에 등을 기댔다.
“…뭐라도 해봐야죠.”
“네?”
“이 꼴을 봤는데 어떻게 아무것도 안 하고 참아요, 제가. 게다가 전 어차피 이 세상 사람도 아니라서. 남의 세상 일이니까, 더 쉽게 간섭할래요. 그리고요, 저 보기보다 힘세요. 저 유도 오래 했거든요. 제 전완근 만져보실래요?”자유자재로 원래 세계에 돌아갈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그쵸. 식탁 맞은편에 앉아 머리를 싸매고 있는 은빈에게 말했다. 그럼 그냥 확 뒤통수 갈겨 버리고 내 세계로 꺼지면 되는데. 잘못된 행동을 할 때마다 그런 일이 반복된다면, 좀 교정이 되지 않을까요? 아 내가 천벌을 받는구나, 하고 말이에요.
“그러게. 아니, 그럼 거꾸로 생각해보죠.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
“그, 상당산성에 있는 막걸리 집에서 엄마랑 막걸리 먹다가 화장실엘 갔거든요. 그런데 다시 자리로 돌아오니까 남자 엄주영이 엄마 앞에 앉아있었어요. 그러고는 계속 여기예요.”
“헐, 음. 그럼 거길 다시 가볼까요?”
“네?”
“실험의 기본이잖아요. 똑같은 제한 조건 아래에서 같은 일이 벌어지는지 재차 확인하기. 저랑 같이 가서, 막걸리 마시고 화장실 다녀와봐요.”
나는 입을 헤 벌렸다. 그렇게 쉬운 생각을 왜 나는 하지 못했지?
“만약 성공하면요? 그러니까, 제 세계로 돌아가면요? 그런데 제가,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요…? 그냥 다 잊어야지, 골치 아프게 뭘 또 엮여, 하고요.”
“그렇게 약하고 책임감 없는 분이었다면 애당초 내 존재도 모르는 엄마를 위해 엄주영을 처단하겠다, 뭐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해요.” 맞아. 은빈은 칭찬을 입에 달고 사는 아이였지. “게다가, 제 절친이었다면서요. 저 나름 눈 높아요. 관상 잘 본다고는 저번에 얘기했죠? 함부로 말 섞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저는 주영 씨 절대적으로 믿어요.”
혼자 앉아서 나물 반찬을 리필해 먹는 엄마의 모습을 확인하고도 바로 뒷걸음질 쳐 다시 화장실로 달려간 것은 그, 절대적으로 믿는다, 는 옛 친구의 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됐어요. 다녀왔어요. 저 화장실이에요. 막걸리 먹고 여자화장실 세 번째 칸에 들어가면 돼. 그럼 옮겨가요. 시점은 제가 떠나온 그 과거, 딱 거기예요. 그 세계는 아직 1분도 안 움직인 것 같아요.”
숨이 찼다.
“저, 엄마한테 말 한마디 안 걸고 다시 여기로 달려왔어요, 은빈 님. 그냥, 어… 알아달라고요. 내가 진짜 진지하다, 라는 마음. 알아달라고 말하는 거예요.”
“의심한 적 없어요. 생각보다도 훨씬 빨리 왔는데요.”
은빈이 환하게 웃었다. 엄마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내 모든 사실을 유일하게 알고 있었던 친구의 웃음. 십여 년만에 보는 은빈의 표정이었다.
“저 잘했죠?”
“네.”
“그럼 우리 말 놓아요.”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해야 남자 엄주영을 손볼 수 있단 말인가.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탁구장 사람들이랑 친해진 후 이 막걸리 집에서 정기모임을 가져야 하나. 그리고 동시에, 어떻게든 구실을 만들어서, 남자 엄주영도 그 자리에 참여하도록 유도해야 하나.
“은빈아, 아까 말한 것처럼 진짜로 뒤통수 겁나 때린 다음 화장실로 도망갈까?”
“한 백 번은 반복해야 할 텐데. 체력이 되겠어?”
“아니.”
“응, 그래.”
우리 둘의 머리로 내릴 수 있는 수는 겨우 그 정도였다. 한참을 바닥만 보았다. 머리를 너무 많이 써서 배만 고팠다. 그때 은빈이 나를 불렀다.
“주영아.”
“응?”
“동창들 사이에서 엄주영 재혼한단 얘기가 돌던데 진짜일까?”
은빈의 물음이 잊고 있던 기억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던 스위치를 올려 주었다. 반짝. 머릿속에 불이 들어왔다.
“어어. 그러고 보니 그 비슷한 얘길 들었어. 처음 여기 떨어졌을 때, 그 청국장집에서.”
“진짜 막아야 되는데. 세상에 불행한 여자 하나 더 생기는 것밖엔 안 되는데…….”
누군가 축 늘어져있던 풍선에 숨을 불어넣은 듯, 별안간 커다란 목표가 부풀어 올랐다.
“그럼 일단, 구체적인 목표는 이렇게 잡으면 어떨까. 결혼 파투내기. 이건 진짜로 누군가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되는 일이니까, 너도 껄끄럽지 않을 거고. 불행해질 여자를 하나 구한다고 생각하자, 우리.”
저자소개
1989년생. 한때는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으나 인생이 요상하게 흘러가서, 이제는 하루 종일 소설을 쓰고 읽는 일을 한다. 근육이 간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걸 아주 잘 알지만 그래도 술을 오래 마시기 위해 매일 세 시간씩 체육관에 머무른다.
소설집 『내가 만든 여자들』, 『사뭇 강펀치』, 장편소설 『세 모양의 마음』, 『붉은 마스크』, 에세이 『어퍼컷 좀 날려도 되겠습니까』를 썼다.
소설집 『내가 만든 여자들』, 『사뭇 강펀치』, 장편소설 『세 모양의 마음』, 『붉은 마스크』, 에세이 『어퍼컷 좀 날려도 되겠습니까』를 썼다.
서평
경쾌하고 날카롭게 역동하는 설재인의 세계
당신이 기다려온 여자들의 명랑 서사!
“불행해질 여자를 구하는 거야. 우리가.”
것대산 막걸리 집 여자 화장실 세 번째 칸
그곳에서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것대산 끝자락에 위치한 잘 나가는 막걸리 집 옆의 옆에 있는 가게. 산행을 마친 주영과 엄마는 배를 채우고자 그곳으로 들어간다. 청국장과 함께 막걸리까지 한잔 걸치고 난 뒤 화장실로 향한 주영. 그런데 다시 돌아온 주영 앞에 기이한 광경이 펼쳐진다. 엄마의 맞은편,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 웬 남자가 앉아 청국장을 ‘처’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놀란 마음도 잠시, 너무도 태연한 엄마의 얼굴에 주영은 옆자리에 앉아 곁눈질을 하기 시작한다. 이 모든 것은 33년 인생의 짬밥이자, 그동안 수백 번도 넘게 철판을 깔아왔던 경험 덕택이었으리라. 그러자 남자가 엄마에게 묻는다. “아빠는 오고 있대?” 아빠? 저게 무슨 소리야? 그리고 놀랍게도 이내 엄용민 씨가 모습을 드러낸다. 다부진 체구, 까무잡잡한 피부, M자형 탈모, 숯검정 눈썹. 모든 것이 그대로다. 화가 나면 언제나 모녀에게 보내던 그만의 경고까지. 비웨어, 커션, 그리고 워닝.
그 ‘워닝’ 때문일까, 아니면 취기 때문일까. 몽롱한 기운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중 옆을 보니, 어느새 세 사람은 사라지고 없다. 대신 그곳에는 남성용 구찌 반지갑 하나가 덜렁 남겨져 있다. 주영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지갑을 열어 신분증을 확인한다. 거기에는 아까 엄마가 아들이라고 불렀던 남자의 얼굴이 떡하니 붙어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적힌 이름 ‘엄주영.’ 그것은 주영이 33년간 써온 이름이었다.
이런 걸 뭐라고 해? 평행 세계?
「“엄마, 그거 알아? 나는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 걸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넌 또?”
“내가 남자로 태어났잖아? 학교 다닐 때 애들 괴롭히고, 연애하면서 여자 괴롭히고, 자식 낳으면 맨날 소리나 지르고, 그랬을 거야. 때렸을지도 몰라. 진짜로.”
“무슨 소리야, 너 인성 그렇게 나쁜 애 아니고, 엄마가 그렇게 안 키우려고 기를 썼을 거야.”
그다음에 이어 하고 싶던 대답은 속으로만 뱉었다. 유치원 다닐 때부터 인서울 해서 해방될 때까지 집에서 보고 배운 게 그것뿐인데, 엄마가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해도 별수 있었을 것 같아? 십여 년을 그런 집구석에서 커야 했던 아이가 짠, 하고 성인군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같은 이름, 같은 주민등록번호, 같은 엄마 아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 아까 등산을 할 때 엄마에게 했던 말이 씨가 되어 돌아온 것일까. 어찌저찌 막걸리 집에선 나왔는데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주영은 복잡한 마음을 안고 방황하다 우선 지갑을 돌려준다는 핑계로 남자 엄주영과 다시 마주하기 위해 용암지구대로 향한다. 그리고 또 한 번 머리를 부여잡는다. 거기엔 ‘최은빈’이 있었다. 주영의 세계에서 그의 베스트프렌드였던, 그러나 어느 날의 싸움으로 한순간에 남이 되었던 옛 친구가.
물론 은빈 역시 주영을 알아보지 못한다. 다만, 남자인 엄주영은 잘 아는 것 같다. 은빈의 입을 통해 들은 남자 엄주영은 주영을 충격에 빠지게 한다. 엄주영, 빨간 줄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온갖 나쁜 짓을 일삼는 패거리의 ‘따까리’였다. 잘나가는 애들한테 빌빌 기고, 망보며 기생하는 존재. 친구들의 힘이 자기의 것인 줄 착각하는 멍청이. 그게 바로 ‘남자’로 태어난 주영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런 걸 평행 세계라고 하던가? 지극한 현실주의자였던 자신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다니…….
감히 내 이름을 걸고 망나니짓을 저질러?
그저 기분 나쁜 꿈이었다 치부하며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런데 주영의 눈에 자꾸만 한 사람이 아른거린다. 자신을 아가씨라 불렀던 엄마 ‘배중숙’씨. 내 세계에서는 결혼하지 않는 딸 때문에 고생했는데 이 세계에서는 그보다 더 한 아들을 가지고 있다니, 배중숙 씨는 어디에서도 행복할 수 없는 걸까. 이 꼴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주영은 결심한다. 엄마를 위해 남자 엄주영을 개과천선시키기로. 그리고 이유는 또 있다. 감히 자신의 이름을 달고 망나니짓을 저지른 죗값도 받게 해야 할 것 아닌가. 탁구와 유도로 단련된 주영의 전완근이 불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연히 뭣도 없는 이 평행 세계에서 혼자 힘으로는 무리인 일. 그런 주영에게 선택지는 하나였다. 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수 있는 단 한 사람, 최은빈에게 모든 것을 말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 주영은 은빈에게 자신이 평행 세계에서 왔음을 고백한다. 믿지 못하는 은빈에게 주영은 자신의 세계에 사는 은빈의 학창시절을 줄줄 읊는다. 장우혁에서 시작해 김동완을 거친 그의 유구한 덕질의 역사를. 반신반의하던 은빈은 엄마를 구하겠다는 주영의 확고한 마음에 흔들린다. 주영은 은빈과 함께 근무하는 박병옥 경사에게도 그들의 계획을 전하며 설득한다. 마침내 살기 좋은 청주시를 만들자는 명목아래 세 사람은 의기투합한다.
어떻게 하면 남자 엄주영을 개과천선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그의 뒤를 밟던 주영과 은빈은 그가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의 정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무려 띠동갑 연하인 연재와. 한마디로 불행에 빠질 여자가 한 사람 더 있다는 것. 배중숙 씨와 연재까지, 그들을 그냥 두고 볼 순 없다. 우선은 연재부터 구하기로 한다. 연재의 친구 다정까지 힘을 보탠 이 팀의 첫 번째 목표가 정해진다. ‘남자 엄주영 결혼 파투내기.’ 과연 주영은 남자로 태어난 자신을 개과천선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
명랑하고 발랄하게 뛰노는 문장 사이
숨을 멈추게 만드는 리얼한 현실 고발
평행 세계를 상상할 때 우리에게는 여러 선택지가 주어진다. 직업, 학벌, 애인 등등 다양한 설정 값을 변경하며 또 다른 '나'의 인생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설재인 작가는 이중에서도 가장 원초적인 요소를 선택했다. 바로 '성별'이다. 그렇게 “내가 만일 남자, 혹은 여자로 태어났다면 어떤 모습일까?”라는 우리 모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설 [너와 막걸리를 마신다면]이 탄생했다.
그러나 저자는 기발한 상상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를 기반으로 본인이 그려낸 세계 속에서 현실적인 문제들을 고발한다. 두 엄주영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났으나 서로 다른 모습으로 성장한다. 둘 다 폭력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남자 엄주영만이 아버지의 모습을 답습하고, 더 나아가 여자 엄주영은 ‘불행해질 여자들을 구하고자’하기까지 한다. 그 이유는 소설 전반, 곳곳에서 드러난다. 저자가 여자 엄주영을 비롯해 배중숙, 최은빈, 심연재, 김다정과 같이 그의 주변에 위치한 여자들이 걸어온 길을 통해 왜 이러한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깨닫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나도 너랑 똑같은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너처럼 되지 않았어.”라고 외치는 여자 엄주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더 이상 같은 불행이 반복되지 않기를 희망하는 그를 응원하면서, 남자 엄주영이 하루빨리 정신을 차리기 바라면서.
이처럼 장르적 재미와 사회적 메시지를 둘 다 잡는 데 성공한 작품이지만,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한층 노련해진 작가 특유의 완급 조절이다. 각자의 매력을 뿜어내는 인물들과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가 통통 튀는 탁구공처럼 페이지 위를 오가다가도, 어느 한순간, 어느 한 장면이 우리를 울컥하게 만들기 때문. [너와 막걸리를 마신다면]은 악행이 만연하는 사회 속에서 사랑은 더욱 빛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작가, 언제나 어떤 환경 속에서도 그 안에 숨어있는 사랑을 찾고 사랑의 연결고리를 엮어내는 작가 설재인의 작품 세계를 적극적으로 만나볼 수 있는 소설이다. 올 여름 국내독자들의 마음속에 ‘설재인’이라는 이름이 아로새겨질 것이다.
당신이 기다려온 여자들의 명랑 서사!
“불행해질 여자를 구하는 거야. 우리가.”
것대산 막걸리 집 여자 화장실 세 번째 칸
그곳에서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것대산 끝자락에 위치한 잘 나가는 막걸리 집 옆의 옆에 있는 가게. 산행을 마친 주영과 엄마는 배를 채우고자 그곳으로 들어간다. 청국장과 함께 막걸리까지 한잔 걸치고 난 뒤 화장실로 향한 주영. 그런데 다시 돌아온 주영 앞에 기이한 광경이 펼쳐진다. 엄마의 맞은편,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 웬 남자가 앉아 청국장을 ‘처’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놀란 마음도 잠시, 너무도 태연한 엄마의 얼굴에 주영은 옆자리에 앉아 곁눈질을 하기 시작한다. 이 모든 것은 33년 인생의 짬밥이자, 그동안 수백 번도 넘게 철판을 깔아왔던 경험 덕택이었으리라. 그러자 남자가 엄마에게 묻는다. “아빠는 오고 있대?” 아빠? 저게 무슨 소리야? 그리고 놀랍게도 이내 엄용민 씨가 모습을 드러낸다. 다부진 체구, 까무잡잡한 피부, M자형 탈모, 숯검정 눈썹. 모든 것이 그대로다. 화가 나면 언제나 모녀에게 보내던 그만의 경고까지. 비웨어, 커션, 그리고 워닝.
그 ‘워닝’ 때문일까, 아니면 취기 때문일까. 몽롱한 기운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중 옆을 보니, 어느새 세 사람은 사라지고 없다. 대신 그곳에는 남성용 구찌 반지갑 하나가 덜렁 남겨져 있다. 주영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지갑을 열어 신분증을 확인한다. 거기에는 아까 엄마가 아들이라고 불렀던 남자의 얼굴이 떡하니 붙어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적힌 이름 ‘엄주영.’ 그것은 주영이 33년간 써온 이름이었다.
이런 걸 뭐라고 해? 평행 세계?
「“엄마, 그거 알아? 나는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 걸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넌 또?”
“내가 남자로 태어났잖아? 학교 다닐 때 애들 괴롭히고, 연애하면서 여자 괴롭히고, 자식 낳으면 맨날 소리나 지르고, 그랬을 거야. 때렸을지도 몰라. 진짜로.”
“무슨 소리야, 너 인성 그렇게 나쁜 애 아니고, 엄마가 그렇게 안 키우려고 기를 썼을 거야.”
그다음에 이어 하고 싶던 대답은 속으로만 뱉었다. 유치원 다닐 때부터 인서울 해서 해방될 때까지 집에서 보고 배운 게 그것뿐인데, 엄마가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해도 별수 있었을 것 같아? 십여 년을 그런 집구석에서 커야 했던 아이가 짠, 하고 성인군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같은 이름, 같은 주민등록번호, 같은 엄마 아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 아까 등산을 할 때 엄마에게 했던 말이 씨가 되어 돌아온 것일까. 어찌저찌 막걸리 집에선 나왔는데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주영은 복잡한 마음을 안고 방황하다 우선 지갑을 돌려준다는 핑계로 남자 엄주영과 다시 마주하기 위해 용암지구대로 향한다. 그리고 또 한 번 머리를 부여잡는다. 거기엔 ‘최은빈’이 있었다. 주영의 세계에서 그의 베스트프렌드였던, 그러나 어느 날의 싸움으로 한순간에 남이 되었던 옛 친구가.
물론 은빈 역시 주영을 알아보지 못한다. 다만, 남자인 엄주영은 잘 아는 것 같다. 은빈의 입을 통해 들은 남자 엄주영은 주영을 충격에 빠지게 한다. 엄주영, 빨간 줄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온갖 나쁜 짓을 일삼는 패거리의 ‘따까리’였다. 잘나가는 애들한테 빌빌 기고, 망보며 기생하는 존재. 친구들의 힘이 자기의 것인 줄 착각하는 멍청이. 그게 바로 ‘남자’로 태어난 주영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런 걸 평행 세계라고 하던가? 지극한 현실주의자였던 자신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다니…….
감히 내 이름을 걸고 망나니짓을 저질러?
그저 기분 나쁜 꿈이었다 치부하며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런데 주영의 눈에 자꾸만 한 사람이 아른거린다. 자신을 아가씨라 불렀던 엄마 ‘배중숙’씨. 내 세계에서는 결혼하지 않는 딸 때문에 고생했는데 이 세계에서는 그보다 더 한 아들을 가지고 있다니, 배중숙 씨는 어디에서도 행복할 수 없는 걸까. 이 꼴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주영은 결심한다. 엄마를 위해 남자 엄주영을 개과천선시키기로. 그리고 이유는 또 있다. 감히 자신의 이름을 달고 망나니짓을 저지른 죗값도 받게 해야 할 것 아닌가. 탁구와 유도로 단련된 주영의 전완근이 불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연히 뭣도 없는 이 평행 세계에서 혼자 힘으로는 무리인 일. 그런 주영에게 선택지는 하나였다. 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수 있는 단 한 사람, 최은빈에게 모든 것을 말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 주영은 은빈에게 자신이 평행 세계에서 왔음을 고백한다. 믿지 못하는 은빈에게 주영은 자신의 세계에 사는 은빈의 학창시절을 줄줄 읊는다. 장우혁에서 시작해 김동완을 거친 그의 유구한 덕질의 역사를. 반신반의하던 은빈은 엄마를 구하겠다는 주영의 확고한 마음에 흔들린다. 주영은 은빈과 함께 근무하는 박병옥 경사에게도 그들의 계획을 전하며 설득한다. 마침내 살기 좋은 청주시를 만들자는 명목아래 세 사람은 의기투합한다.
어떻게 하면 남자 엄주영을 개과천선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그의 뒤를 밟던 주영과 은빈은 그가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의 정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무려 띠동갑 연하인 연재와. 한마디로 불행에 빠질 여자가 한 사람 더 있다는 것. 배중숙 씨와 연재까지, 그들을 그냥 두고 볼 순 없다. 우선은 연재부터 구하기로 한다. 연재의 친구 다정까지 힘을 보탠 이 팀의 첫 번째 목표가 정해진다. ‘남자 엄주영 결혼 파투내기.’ 과연 주영은 남자로 태어난 자신을 개과천선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
명랑하고 발랄하게 뛰노는 문장 사이
숨을 멈추게 만드는 리얼한 현실 고발
평행 세계를 상상할 때 우리에게는 여러 선택지가 주어진다. 직업, 학벌, 애인 등등 다양한 설정 값을 변경하며 또 다른 '나'의 인생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설재인 작가는 이중에서도 가장 원초적인 요소를 선택했다. 바로 '성별'이다. 그렇게 “내가 만일 남자, 혹은 여자로 태어났다면 어떤 모습일까?”라는 우리 모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설 [너와 막걸리를 마신다면]이 탄생했다.
그러나 저자는 기발한 상상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를 기반으로 본인이 그려낸 세계 속에서 현실적인 문제들을 고발한다. 두 엄주영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났으나 서로 다른 모습으로 성장한다. 둘 다 폭력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남자 엄주영만이 아버지의 모습을 답습하고, 더 나아가 여자 엄주영은 ‘불행해질 여자들을 구하고자’하기까지 한다. 그 이유는 소설 전반, 곳곳에서 드러난다. 저자가 여자 엄주영을 비롯해 배중숙, 최은빈, 심연재, 김다정과 같이 그의 주변에 위치한 여자들이 걸어온 길을 통해 왜 이러한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깨닫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나도 너랑 똑같은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너처럼 되지 않았어.”라고 외치는 여자 엄주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더 이상 같은 불행이 반복되지 않기를 희망하는 그를 응원하면서, 남자 엄주영이 하루빨리 정신을 차리기 바라면서.
이처럼 장르적 재미와 사회적 메시지를 둘 다 잡는 데 성공한 작품이지만,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한층 노련해진 작가 특유의 완급 조절이다. 각자의 매력을 뿜어내는 인물들과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가 통통 튀는 탁구공처럼 페이지 위를 오가다가도, 어느 한순간, 어느 한 장면이 우리를 울컥하게 만들기 때문. [너와 막걸리를 마신다면]은 악행이 만연하는 사회 속에서 사랑은 더욱 빛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작가, 언제나 어떤 환경 속에서도 그 안에 숨어있는 사랑을 찾고 사랑의 연결고리를 엮어내는 작가 설재인의 작품 세계를 적극적으로 만나볼 수 있는 소설이다. 올 여름 국내독자들의 마음속에 ‘설재인’이라는 이름이 아로새겨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