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상세정보
Detail Information
술과 바닐라 : 정한아 소설
총서명
문학동네 소설집
저자
출판사
출판일
20210521
가격
₩ 13,500
ISBN
9788954679732
페이지
276 p.
판형
133 X 200 mm
커버
Book
책 소개
상실이 남긴 빈자리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매력적인 인물들을 선보여온 소설가 정한아의 세번째 소설집 [술과 바닐라]가 출간되었다. 정한아는 2005년 대학생 신분으로 등단한 이래 생애주기마다 맞닥뜨린 고민들을 깊이 곱씹어 작품 속에 녹여왔다. 그렇게 작가 자신과 함께 성장해온 소설들은 인간의 삶의 궤적과 긴밀히 조응하며 세대를 불문하고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이제 정한아는 사십대에 접어들며 펴내는 이 소설집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여성의 삶을 집중 조명한다. 작가는 여성 소설가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 일과 가정 사이에서 느낀 갈등을 각기 다른 상황에 놓인 인물들을 통해 다양하게 형상화한다.
유독 여성의 삶에서 결혼과 출산은 한번 넘어서면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는 높은 문턱처럼 여겨지고, 그 결과 여성들은 삶의 형태를 자유롭게 선택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정한아 소설은 이 비가역성을 감수하고 새로운 세계로 발걸음을 내디딘 인물들의 희로애락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모든 여성들이 각자의 삶뿐만 아니라 서로의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도 이해해나갈 수 있는 소통의 장을 열어 보인다.
이제 정한아는 사십대에 접어들며 펴내는 이 소설집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여성의 삶을 집중 조명한다. 작가는 여성 소설가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 일과 가정 사이에서 느낀 갈등을 각기 다른 상황에 놓인 인물들을 통해 다양하게 형상화한다.
유독 여성의 삶에서 결혼과 출산은 한번 넘어서면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는 높은 문턱처럼 여겨지고, 그 결과 여성들은 삶의 형태를 자유롭게 선택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정한아 소설은 이 비가역성을 감수하고 새로운 세계로 발걸음을 내디딘 인물들의 희로애락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모든 여성들이 각자의 삶뿐만 아니라 서로의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도 이해해나갈 수 있는 소통의 장을 열어 보인다.
목차
잉글리시 하운드 독 _007
술과 바닐라 _041
참새 잡기 _073
바다와 캥거루와 낙원의 밤 _107
고양이 자세를 해주세요 _143
기진의 마음 _175
할로윈 _211
대담|정한아×염승숙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을 계속한다 _245
작가의 말 _275
술과 바닐라 _041
참새 잡기 _073
바다와 캥거루와 낙원의 밤 _107
고양이 자세를 해주세요 _143
기진의 마음 _175
할로윈 _211
대담|정한아×염승숙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을 계속한다 _245
작가의 말 _275
본문발췌
P.36
아이가 잠든 후, 미연은 조용히 책을 덮었다. 문득 스위스의 설야가 떠올랐다. 하얗고 폭신한 눈, 영원히 녹지 않을 것만 같던 눈 덮인 구릉…… 연주는 그때를 떠올리며 눈이 휘어지게 웃었다. 그제야 미연이 아는 연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들 넷은 잠시 동안 한마음이 되었다. 미연 역시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과거에 사로잡힌 채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비록 모든 아름다운 것이 과거에 있다 할지라도. _「잉글리시 하운드 독」
P.69
나는 저절로 발걸음을 멈추었다. 눈을 감은 채로도 그 향기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것은 인공적인 바닐라향이었다. 사람의 체취에 섞여 조금씩 다르게 느껴지는 향기. 내가 아는 사람에게서는 바닐라와 술의 향기가 났다. 달콤하고 시큼한 향기. 나는 율이에게 그 향기를 맡아보라고 했다. 아이는 아무 감흥이 없었다. _「술과 바닐라」
P.98
만약 내게 일말의 언어가 남아 있었다고 해도, 그에게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내 인생은 어디선가부터 잘못되었다고, 나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아이에 관한 모든 것을 후회한다고. _「참새 잡기」
P.133~134
한 번도 말할 수 없었다. 항상 딸애를 잃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다고. 불의의 사고나 질병이나 아니면 어떤 죽음이 내게서 그 아이를 빼앗아가고 말 거라는 생각에 시달려왔다고. 실제로 그런 상황을 수십 번, 수백 번 머릿속에서 그려보곤 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일을 당해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단 한 번도 아이를 위해 나를 내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에 완전히 실패한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애를 잃어버린다 해도 할말이 없었다. _「바다와 캥거루와 낙원의 밤」
P.173
고양이는 미소 띤 얼굴로 눈을 감고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어떤 번뇌도 없이 홀로 만족한 미소. 그 고양이로 인해 내 인생은 전혀 다른 국면에 이르게 되는데, 그 이야기는 나중에 새로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기쁘면 이야기를 더 하는 사람이 있고, 멈추는 사람이 있다. 나는 후자다. _「고양이 자세를 해주세요」
P.208~209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어디까지고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노인은 기진을 이끌고 숲길을 걸어갔다. 그들은 점점 더 동굴 같은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숲은 거대한 동물의 뱃속 같았다. 별똥별 따위는 볼 수 없었지만, 기진은 검은 허공을 향해 눈을 감고 소원을 빌었다. 그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뭔가를 바라고, 염원하고, 기도하는 일. 하지만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그런 소원이 있었다는 것이, 늘 마음속에 그 소원을 간직해왔다는 것이 새삼 놀라울 뿐이었다. _「기진의 마음」
P.242
시장 안은 대낮처럼 환했다. 노인 외출복이 사방에 걸려 있었다. 과일과 야자수와 꽃의 패턴, 강렬한 원색의 색채가 눈을 찌르며 달려들었다. 그것들은 몸을 드러내기보다는 감추기 위한 옷들이었다. 그 색깔, 그 무늬에는 어떤 원한이 깃든 것 같았다. 그 옷들은 삶이면서 죽음인, 기이한 경계에 있었다. 마치 카니발 같았다. _「할로윈」
P.66~67
아무 것도 쓰지 못하는 삶. 어떠한 새로움도 없이 거죽만 남은 채 쳇바퀴를 도는 삶은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끔찍하지는 않았다. 매일 하루씩 시간이 지나갔을 뿐이다.
나는 이모님이 내 옷을 입고 내 침대에서 낮잠을 잔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사생활이 대체 뭔지 묻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새로 쓴 극본으로 미니시리즈 편성을 받았고, 방송국 근방에 작업실도 얻었다. 율이를 마음놓고 떨어뜨려놓을 수 있게 되자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나 자신이 되는 기분.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감내할 수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강한 섬유유연제 향기까지도. 그마저도 일 년이 지나자 무감각해졌다._<술과 바닐라> 중에서.
율이는 이모님을 기억하지 못했다. 생애의 가장 작고 약한 시절 자신을 안아주고 지켜준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하지만 한편 그애는 만듯국을 제일 좋아하고, 숲을 제집처럼 쏘다니며, 오래된 나무를 올려다보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소년으로 자랐다. 아이는 열다섯 살이 되면서 남편의 키를 앞질렀다.
나는 종종 이모님에게 아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녀와 좋지 않게 헤어진 것이 후회스러웠다. 우리는 좀더 잘 헤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나를 딸로 여겼든 아니든, 인생의 한 시기 우리가 가장 가까운 관계였던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그녀를 한 번쯤 다시 보고 싶었다. 터무니없지만, 나는 언제든 그녀가 나를 반갑게 맞아줄 거라고 생각했다._<술과 바닐라> 중에서.
[정 : 이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들의 결말이 ‘엄마가 된 여성‘들에 대한 어떤 전망을 보여주지는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리라는 기원을 담아 썼던 것 같아요. 글쓰는 엄마로서 내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을 계속해나간다고 하더라도 어떤 관계의 확장과 또 뭐랄까, 실패에서 오는 자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실패한 그 자리에서 또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그런 위로를 줄 수 있다면 좋겠어요.]_대담 중에서.
P.177
당시 기진은 잠에서 깨자마자 주로 뭘 먹이나를 생각했다. 다른 건 몰라도 식구들 아침밥만은 꼭 먹게 하는것이 주부로서 그녀가 가진 원칙이었다. 갓 지은 밥과 따뜻한 국,
부드러운 달걀과 두부를 먹이기 위해서 그녀는 새벽부터 주방을종종거렸다.
이제 그런 것은 다 지나간 일이 되었다. 근래 그녀는 누구를 위해서도 밥을 짓지 않았다. 아침마다 잠에서 깨지 못해 멍했다.
서두르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 바다를 볼 수 있을 터였다. 하기만 조금 늦어도 괜찮다. 흑암처럼 검은 바다라고 해도 그곳에는여전히 솟구치고 부서지는 파도가 있으리라. 아이와 나란히 서서파도를 바라볼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보다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아이가 잠든 후, 미연은 조용히 책을 덮었다. 문득 스위스의 설야가 떠올랐다. 하얗고 폭신한 눈, 영원히 녹지 않을 것만 같던 눈 덮인 구릉…… 연주는 그때를 떠올리며 눈이 휘어지게 웃었다. 그제야 미연이 아는 연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들 넷은 잠시 동안 한마음이 되었다. 미연 역시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과거에 사로잡힌 채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비록 모든 아름다운 것이 과거에 있다 할지라도. _「잉글리시 하운드 독」
P.69
나는 저절로 발걸음을 멈추었다. 눈을 감은 채로도 그 향기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것은 인공적인 바닐라향이었다. 사람의 체취에 섞여 조금씩 다르게 느껴지는 향기. 내가 아는 사람에게서는 바닐라와 술의 향기가 났다. 달콤하고 시큼한 향기. 나는 율이에게 그 향기를 맡아보라고 했다. 아이는 아무 감흥이 없었다. _「술과 바닐라」
P.98
만약 내게 일말의 언어가 남아 있었다고 해도, 그에게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내 인생은 어디선가부터 잘못되었다고, 나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아이에 관한 모든 것을 후회한다고. _「참새 잡기」
P.133~134
한 번도 말할 수 없었다. 항상 딸애를 잃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다고. 불의의 사고나 질병이나 아니면 어떤 죽음이 내게서 그 아이를 빼앗아가고 말 거라는 생각에 시달려왔다고. 실제로 그런 상황을 수십 번, 수백 번 머릿속에서 그려보곤 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일을 당해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단 한 번도 아이를 위해 나를 내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에 완전히 실패한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애를 잃어버린다 해도 할말이 없었다. _「바다와 캥거루와 낙원의 밤」
P.173
고양이는 미소 띤 얼굴로 눈을 감고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어떤 번뇌도 없이 홀로 만족한 미소. 그 고양이로 인해 내 인생은 전혀 다른 국면에 이르게 되는데, 그 이야기는 나중에 새로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기쁘면 이야기를 더 하는 사람이 있고, 멈추는 사람이 있다. 나는 후자다. _「고양이 자세를 해주세요」
P.208~209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어디까지고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노인은 기진을 이끌고 숲길을 걸어갔다. 그들은 점점 더 동굴 같은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숲은 거대한 동물의 뱃속 같았다. 별똥별 따위는 볼 수 없었지만, 기진은 검은 허공을 향해 눈을 감고 소원을 빌었다. 그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뭔가를 바라고, 염원하고, 기도하는 일. 하지만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그런 소원이 있었다는 것이, 늘 마음속에 그 소원을 간직해왔다는 것이 새삼 놀라울 뿐이었다. _「기진의 마음」
P.242
시장 안은 대낮처럼 환했다. 노인 외출복이 사방에 걸려 있었다. 과일과 야자수와 꽃의 패턴, 강렬한 원색의 색채가 눈을 찌르며 달려들었다. 그것들은 몸을 드러내기보다는 감추기 위한 옷들이었다. 그 색깔, 그 무늬에는 어떤 원한이 깃든 것 같았다. 그 옷들은 삶이면서 죽음인, 기이한 경계에 있었다. 마치 카니발 같았다. _「할로윈」
P.66~67
아무 것도 쓰지 못하는 삶. 어떠한 새로움도 없이 거죽만 남은 채 쳇바퀴를 도는 삶은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끔찍하지는 않았다. 매일 하루씩 시간이 지나갔을 뿐이다.
나는 이모님이 내 옷을 입고 내 침대에서 낮잠을 잔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사생활이 대체 뭔지 묻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새로 쓴 극본으로 미니시리즈 편성을 받았고, 방송국 근방에 작업실도 얻었다. 율이를 마음놓고 떨어뜨려놓을 수 있게 되자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나 자신이 되는 기분.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감내할 수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강한 섬유유연제 향기까지도. 그마저도 일 년이 지나자 무감각해졌다._<술과 바닐라> 중에서.
율이는 이모님을 기억하지 못했다. 생애의 가장 작고 약한 시절 자신을 안아주고 지켜준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하지만 한편 그애는 만듯국을 제일 좋아하고, 숲을 제집처럼 쏘다니며, 오래된 나무를 올려다보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소년으로 자랐다. 아이는 열다섯 살이 되면서 남편의 키를 앞질렀다.
나는 종종 이모님에게 아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녀와 좋지 않게 헤어진 것이 후회스러웠다. 우리는 좀더 잘 헤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나를 딸로 여겼든 아니든, 인생의 한 시기 우리가 가장 가까운 관계였던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그녀를 한 번쯤 다시 보고 싶었다. 터무니없지만, 나는 언제든 그녀가 나를 반갑게 맞아줄 거라고 생각했다._<술과 바닐라> 중에서.
[정 : 이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들의 결말이 ‘엄마가 된 여성‘들에 대한 어떤 전망을 보여주지는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리라는 기원을 담아 썼던 것 같아요. 글쓰는 엄마로서 내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을 계속해나간다고 하더라도 어떤 관계의 확장과 또 뭐랄까, 실패에서 오는 자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실패한 그 자리에서 또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그런 위로를 줄 수 있다면 좋겠어요.]_대담 중에서.
P.177
당시 기진은 잠에서 깨자마자 주로 뭘 먹이나를 생각했다. 다른 건 몰라도 식구들 아침밥만은 꼭 먹게 하는것이 주부로서 그녀가 가진 원칙이었다. 갓 지은 밥과 따뜻한 국,
부드러운 달걀과 두부를 먹이기 위해서 그녀는 새벽부터 주방을종종거렸다.
이제 그런 것은 다 지나간 일이 되었다. 근래 그녀는 누구를 위해서도 밥을 짓지 않았다. 아침마다 잠에서 깨지 못해 멍했다.
서두르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 바다를 볼 수 있을 터였다. 하기만 조금 늦어도 괜찮다. 흑암처럼 검은 바다라고 해도 그곳에는여전히 솟구치고 부서지는 파도가 있으리라. 아이와 나란히 서서파도를 바라볼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보다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저자소개
1982년 서울에서 태어나 건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2005년 대산대학문학상으로 등단, 2007년 문학동네작가상에 장편 [달의 바다]가 당선되었다.
장편소설 [달의 바다] [리틀 시카고], 소설집 [나를 위해 웃다] [애니]가 있다.
장편소설 [달의 바다] [리틀 시카고], 소설집 [나를 위해 웃다] [애니]가 있다.
서평
2020 김승옥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바다와 캥거루와 낙원의 밤」 수록!
“지나간 낙원이 실은 진짜 낙원이 아니었듯,
지금의 폐허 또한 진짜 폐허가 아닐 것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_정소현(소설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지점으로 건너갈 사다리 같은 작품.”
_염승숙(소설가)
기혼, 미혼, 그리고 비혼,
각각의 길이 서로 다른 행복으로 통하리라는 믿음
상실이 남긴 빈자리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매력적인 인물들을 선보여온 소설가 정한아의 세번째 소설집 [술과 바닐라]가 출간되었다. 정한아는 2005년 대학생 신분으로 등단한 이래 생애주기마다 맞닥뜨린 고민들을 깊이 곱씹어 작품 속에 녹여왔다. 그렇게 작가 자신과 함께 성장해온 소설들은 인간의 삶의 궤적과 긴밀히 조응하며 세대를 불문하고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이제 정한아는 사십대에 접어들며 펴내는 이 소설집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여성의 삶을 집중 조명한다. 작가는 여성 소설가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 일과 가정 사이에서 느낀 갈등을 각기 다른 상황에 놓인 인물들을 통해 다양하게 형상화한다. 유독 여성의 삶에서 결혼과 출산은 한번 넘어서면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는 높은 문턱처럼 여겨지고, 그 결과 여성들은 삶의 형태를 자유롭게 선택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정한아 소설은 이 비가역성을 감수하고 새로운 세계로 발걸음을 내디딘 인물들의 희로애락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모든 여성들이 각자의 삶뿐만 아니라 서로의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도 이해해나갈 수 있는 소통의 장을 열어 보인다.
결혼한 여자의 삶은 독하면서도 부드럽고,
씁쓸한 동시에 달콤하다
겉으로는 안정되어 보이던 기혼 여성의 생활 속에서 균열을 발견하는 순간은 [술과 바닐라]의 주요 소재이다. 가정을 이루고 안락한 주거공간을 마련한 여성 인물들에게 찾아오는 또다른 결의 불안감을 묘사하며, 정한아는 ‘결혼이 주는 안정감’이라는 오해 혹은 환상에 대해 증언한다.
소설집의 첫머리에 놓인 작품 「잉글리시 하운드 독」은 이러한 중산층 여성의 심리적 갈등을 적나라하게 내보이며 긴장을 고조시킨다. 남편과 아이들을 보살피며 평범한 행복을 지키는 삶을 택한 ‘미연’은 자신과 정반대의 가치관을 토대로 자유롭고 화려한 삶을 사는 친구 ‘연주’에게 은연중 열등감을 갖고 있다. 그래서 연주 내외가 경제적 부침을 겪을 때 질투심과 희열을 번갈아 느끼며, 아이로부터 얻어지는 행복을 모르는 연주를 은근히 내려다보기도 한다. 결혼생활에 대한 미연의 만족감이 연주의 불행에 기반해 있는 것이 드러날 때, 견고해 보였던 미연의 행복은 타인에 의해 언제든 역전될 위기에 처한다.
「기진의 마음」은 유방암으로 인한 절실한 고통을 가까운 가족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기진’의 소외감을 그린다. 기진의 남편은 그녀를 살뜰하게 간병하지만, 사실 남편의 노력에 기진에 대한 배려는 결핍되어 있다. 오히려 남편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이 고통과 함께 되살아나 기진을 괴롭힌다.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기진에게 힘이 되어준 사람은 완전한 타인이면서 투병생활을 함께한 ‘윤’뿐이다. 가족에게 깊이 이해받기를 바라는 기대가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고립감을 겪는 기진을 통해, 소설은 관계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고 홀로 설 때 비로소 고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말한다.
「고양이 자세를 해주세요」는 결혼생활에서 파국을 맞은 ‘나’가 그후 삶을 재건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홀로 남겨졌다는 불안감을 감당하지 못하던 ‘나’는 요가원에서 우연히 재회한 옛 친구 ‘정우’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그러나 ‘나’는 상실을 극복하지 못한 채로 당장의 욕구를 해소하는 데 급급할 뿐 정우와 진중한 관계로 발전하지 못한다. 정우와도 멀어지고 만 후에야, ‘나’는 요가 수련을 통해 몸의 지경地境을 확장하며 마음의 영역 또한 넓혀나간다. 자기 몫의 행복을 스스로 찾아냈을 때 진정한 평안이 깃들고, 타인과의 행복은 그후에 도모할 수 있다는 진실이 결혼이라는 기로에 선 이들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어머니로서 가져서는 안 되는 마음을 정확히 쓰는 것
혈연조차 허상처럼 느껴지는 가정 내에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꿋꿋한 움직임
정한아의 여성 인물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은 파편화된 가정에서 성장해 ‘사랑을 주는 일’에 곤란을 겪는다는 점이다. 어머니의 부재와 아버지의 무관심 속에서 자란 그들은 모성이라는 본능 자체에 이질감을 느낀다. 그래서 인간으로서의 욕망과 성취가 모성을 앞설 때마다 혼란스러워하기도 하고, 애정을 갈구하는 자신의 아이를 버거워하기도 한다. 이렇듯 정한아는 어머니로서 가져서는 안 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마음들을 정확하게 기술하면서 ‘엄마됨’에 딸려오는 복합적인 감정을 소설 속에 고스란히 담아낸다.
2020년 김승옥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인 「바다와 캥거루와 낙원의 밤」은 친딸에게 안정된 가정환경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결혼과 이혼, 새로운 연애를 반복하는 어머니상을 제시한다. 딸을 전남편에게로 떠나보내며 어머니로서도 여자로서도 “사랑에 완전히 실패”했다고 느끼던 인물이 버림받은 이웃 아이들에게 문득 애정을 갖게 되는 장면이 따스하다. 「참새 잡기」는 자신을 길러준 할머니로부터 받은 애정의 정체를 확인하고 방황하는 ‘나’의 이야기이다. 할머니는 볼품없는 아버지의 삶을 끝까지 책임지기 위해 희생해왔고, 이제는 ‘나’에게마저 그 희생을 바란다. “아이에 관한 모든 것을 후회”하고 있던 ‘나’는 할머니에게서 정신적으로 자립한 끝에 할머니의 감정을 이해하고, 그 감정이 자기 자신에게도 깃들어 있음을 받아들인다.
표제작 「술과 바닐라」는 출산 후에도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나’를 주인공으로 삼아 직장과 가정 사이에서 분투하는 뭇 여성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설상가상으로 ‘나’에게는 의지할 친정이 없는데, 나이든 베이비시터 ‘이모님’이 그 빈자리를 채워주기 시작한다. 이모님은 ‘나’의 친정어머니보다 가까운 존재가 되어 아이의 성장을 대신 지켜봐주고, ‘나’의 직업적 성공을 함께 축하해준다. 그러나 이모님이 ‘나’의 가정에 편입되어 어머니로서 실현하지 못했던 욕망을 대리 충족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후, 서서히 끓어오르던 긴장감이 한꺼번에 분출되기에 이른다.
소설집의 말미에는 작가의 친우이자 동료 소설가인 염승숙과 정한아의 진솔한 대담이 실렸다. ‘글쓰는 어머니’로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끼는 찬란한 기쁨이 웃음과 눈물에 실려 생생하게 전해져온다. 이들은 결혼 이전의 삶을 그리워하지도, 결혼 이후의 삶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각각의 삶마다 서로 다른 행복과 그 대가로 따라오는 고민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정한아 소설에서는 그 빛과 어둠이 칵테일처럼 부드럽게 섞여든다. 정한아가 그리는 다양하고 또 유일한 삶의 형태들을 음미하다보면 이해 불가능해 보였던 타인의 인생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엄마됨’에 대해 긍정적으로 그리는 서사가 거의 없는데 나부터도 그게 달갑지는 않았어요. 엄마로서의 나는 이렇게 소모되고 착취당하고 있어, 라는 뉘앙스들이 굳어진 정서가 돼버릴까봐 두렵기도 하거든요. 엄마가 됨으로써 얻어지는 새로운 감각―관계 맺음을 통한 시야의 확장, 유연함이라는 무기, 물리적 삶의 극복이라는 측면이 분명히 있으니까요. 이 소설집에서 그것이 제대로 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계속 해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행복이라는 것이 꼭 쾌감, 불쾌감의 두 가지 감각만으로 가늠되는 것은 아닐 거예요. 아주 복합적이고, 세밀하고, 또 매 순간 새로운 것이죠. 삶도 같을 거예요.”
_정한아, 대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을 계속한다」 중에서
정한아 작가는 정공법으로 폐허를 재현한다. 언뜻 무사해 보였던 일상이, 견고해 보였던 관계가 미세한 균열로부터 무너져내리는 과정을 핍진하게 그려낸다. 작가의 섬세한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우리가 한때 아름다웠던 시간 속에 있었음을, 아름다운 줄도 모르고 그 시간을 떠나와버렸음을, 그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사후적으로 깨닫는 한순간을 체험하게 된다. 작가는 과거를 미화하거나 미래를 낙관하지 않는다. 지나간 낙원이 실은 진짜 낙원이 아니었듯, 지금의 폐허 또한 진짜 폐허가 아닐 것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 강렬한 미적 체험은 우리를 서늘하게 하는 동시에 폐허 위로 새로 피어날 풍경을 기대하게 한다. 설령 아무것도 없다 해도, 조금 늦는다 해도 괜찮다. 함께 파도를 바라보는 마음, 온기를 잃지 않으려는 마음,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만으로도 이미 아름답지 않은가. _정소현(소설가)
「바다와 캥거루와 낙원의 밤」 수록!
“지나간 낙원이 실은 진짜 낙원이 아니었듯,
지금의 폐허 또한 진짜 폐허가 아닐 것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_정소현(소설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지점으로 건너갈 사다리 같은 작품.”
_염승숙(소설가)
기혼, 미혼, 그리고 비혼,
각각의 길이 서로 다른 행복으로 통하리라는 믿음
상실이 남긴 빈자리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매력적인 인물들을 선보여온 소설가 정한아의 세번째 소설집 [술과 바닐라]가 출간되었다. 정한아는 2005년 대학생 신분으로 등단한 이래 생애주기마다 맞닥뜨린 고민들을 깊이 곱씹어 작품 속에 녹여왔다. 그렇게 작가 자신과 함께 성장해온 소설들은 인간의 삶의 궤적과 긴밀히 조응하며 세대를 불문하고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이제 정한아는 사십대에 접어들며 펴내는 이 소설집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여성의 삶을 집중 조명한다. 작가는 여성 소설가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 일과 가정 사이에서 느낀 갈등을 각기 다른 상황에 놓인 인물들을 통해 다양하게 형상화한다. 유독 여성의 삶에서 결혼과 출산은 한번 넘어서면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는 높은 문턱처럼 여겨지고, 그 결과 여성들은 삶의 형태를 자유롭게 선택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정한아 소설은 이 비가역성을 감수하고 새로운 세계로 발걸음을 내디딘 인물들의 희로애락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모든 여성들이 각자의 삶뿐만 아니라 서로의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도 이해해나갈 수 있는 소통의 장을 열어 보인다.
결혼한 여자의 삶은 독하면서도 부드럽고,
씁쓸한 동시에 달콤하다
겉으로는 안정되어 보이던 기혼 여성의 생활 속에서 균열을 발견하는 순간은 [술과 바닐라]의 주요 소재이다. 가정을 이루고 안락한 주거공간을 마련한 여성 인물들에게 찾아오는 또다른 결의 불안감을 묘사하며, 정한아는 ‘결혼이 주는 안정감’이라는 오해 혹은 환상에 대해 증언한다.
소설집의 첫머리에 놓인 작품 「잉글리시 하운드 독」은 이러한 중산층 여성의 심리적 갈등을 적나라하게 내보이며 긴장을 고조시킨다. 남편과 아이들을 보살피며 평범한 행복을 지키는 삶을 택한 ‘미연’은 자신과 정반대의 가치관을 토대로 자유롭고 화려한 삶을 사는 친구 ‘연주’에게 은연중 열등감을 갖고 있다. 그래서 연주 내외가 경제적 부침을 겪을 때 질투심과 희열을 번갈아 느끼며, 아이로부터 얻어지는 행복을 모르는 연주를 은근히 내려다보기도 한다. 결혼생활에 대한 미연의 만족감이 연주의 불행에 기반해 있는 것이 드러날 때, 견고해 보였던 미연의 행복은 타인에 의해 언제든 역전될 위기에 처한다.
「기진의 마음」은 유방암으로 인한 절실한 고통을 가까운 가족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기진’의 소외감을 그린다. 기진의 남편은 그녀를 살뜰하게 간병하지만, 사실 남편의 노력에 기진에 대한 배려는 결핍되어 있다. 오히려 남편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이 고통과 함께 되살아나 기진을 괴롭힌다.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기진에게 힘이 되어준 사람은 완전한 타인이면서 투병생활을 함께한 ‘윤’뿐이다. 가족에게 깊이 이해받기를 바라는 기대가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고립감을 겪는 기진을 통해, 소설은 관계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고 홀로 설 때 비로소 고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말한다.
「고양이 자세를 해주세요」는 결혼생활에서 파국을 맞은 ‘나’가 그후 삶을 재건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홀로 남겨졌다는 불안감을 감당하지 못하던 ‘나’는 요가원에서 우연히 재회한 옛 친구 ‘정우’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그러나 ‘나’는 상실을 극복하지 못한 채로 당장의 욕구를 해소하는 데 급급할 뿐 정우와 진중한 관계로 발전하지 못한다. 정우와도 멀어지고 만 후에야, ‘나’는 요가 수련을 통해 몸의 지경地境을 확장하며 마음의 영역 또한 넓혀나간다. 자기 몫의 행복을 스스로 찾아냈을 때 진정한 평안이 깃들고, 타인과의 행복은 그후에 도모할 수 있다는 진실이 결혼이라는 기로에 선 이들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어머니로서 가져서는 안 되는 마음을 정확히 쓰는 것
혈연조차 허상처럼 느껴지는 가정 내에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꿋꿋한 움직임
정한아의 여성 인물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은 파편화된 가정에서 성장해 ‘사랑을 주는 일’에 곤란을 겪는다는 점이다. 어머니의 부재와 아버지의 무관심 속에서 자란 그들은 모성이라는 본능 자체에 이질감을 느낀다. 그래서 인간으로서의 욕망과 성취가 모성을 앞설 때마다 혼란스러워하기도 하고, 애정을 갈구하는 자신의 아이를 버거워하기도 한다. 이렇듯 정한아는 어머니로서 가져서는 안 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마음들을 정확하게 기술하면서 ‘엄마됨’에 딸려오는 복합적인 감정을 소설 속에 고스란히 담아낸다.
2020년 김승옥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인 「바다와 캥거루와 낙원의 밤」은 친딸에게 안정된 가정환경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결혼과 이혼, 새로운 연애를 반복하는 어머니상을 제시한다. 딸을 전남편에게로 떠나보내며 어머니로서도 여자로서도 “사랑에 완전히 실패”했다고 느끼던 인물이 버림받은 이웃 아이들에게 문득 애정을 갖게 되는 장면이 따스하다. 「참새 잡기」는 자신을 길러준 할머니로부터 받은 애정의 정체를 확인하고 방황하는 ‘나’의 이야기이다. 할머니는 볼품없는 아버지의 삶을 끝까지 책임지기 위해 희생해왔고, 이제는 ‘나’에게마저 그 희생을 바란다. “아이에 관한 모든 것을 후회”하고 있던 ‘나’는 할머니에게서 정신적으로 자립한 끝에 할머니의 감정을 이해하고, 그 감정이 자기 자신에게도 깃들어 있음을 받아들인다.
표제작 「술과 바닐라」는 출산 후에도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나’를 주인공으로 삼아 직장과 가정 사이에서 분투하는 뭇 여성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설상가상으로 ‘나’에게는 의지할 친정이 없는데, 나이든 베이비시터 ‘이모님’이 그 빈자리를 채워주기 시작한다. 이모님은 ‘나’의 친정어머니보다 가까운 존재가 되어 아이의 성장을 대신 지켜봐주고, ‘나’의 직업적 성공을 함께 축하해준다. 그러나 이모님이 ‘나’의 가정에 편입되어 어머니로서 실현하지 못했던 욕망을 대리 충족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후, 서서히 끓어오르던 긴장감이 한꺼번에 분출되기에 이른다.
소설집의 말미에는 작가의 친우이자 동료 소설가인 염승숙과 정한아의 진솔한 대담이 실렸다. ‘글쓰는 어머니’로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끼는 찬란한 기쁨이 웃음과 눈물에 실려 생생하게 전해져온다. 이들은 결혼 이전의 삶을 그리워하지도, 결혼 이후의 삶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각각의 삶마다 서로 다른 행복과 그 대가로 따라오는 고민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정한아 소설에서는 그 빛과 어둠이 칵테일처럼 부드럽게 섞여든다. 정한아가 그리는 다양하고 또 유일한 삶의 형태들을 음미하다보면 이해 불가능해 보였던 타인의 인생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엄마됨’에 대해 긍정적으로 그리는 서사가 거의 없는데 나부터도 그게 달갑지는 않았어요. 엄마로서의 나는 이렇게 소모되고 착취당하고 있어, 라는 뉘앙스들이 굳어진 정서가 돼버릴까봐 두렵기도 하거든요. 엄마가 됨으로써 얻어지는 새로운 감각―관계 맺음을 통한 시야의 확장, 유연함이라는 무기, 물리적 삶의 극복이라는 측면이 분명히 있으니까요. 이 소설집에서 그것이 제대로 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계속 해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행복이라는 것이 꼭 쾌감, 불쾌감의 두 가지 감각만으로 가늠되는 것은 아닐 거예요. 아주 복합적이고, 세밀하고, 또 매 순간 새로운 것이죠. 삶도 같을 거예요.”
_정한아, 대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을 계속한다」 중에서
정한아 작가는 정공법으로 폐허를 재현한다. 언뜻 무사해 보였던 일상이, 견고해 보였던 관계가 미세한 균열로부터 무너져내리는 과정을 핍진하게 그려낸다. 작가의 섬세한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우리가 한때 아름다웠던 시간 속에 있었음을, 아름다운 줄도 모르고 그 시간을 떠나와버렸음을, 그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사후적으로 깨닫는 한순간을 체험하게 된다. 작가는 과거를 미화하거나 미래를 낙관하지 않는다. 지나간 낙원이 실은 진짜 낙원이 아니었듯, 지금의 폐허 또한 진짜 폐허가 아닐 것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 강렬한 미적 체험은 우리를 서늘하게 하는 동시에 폐허 위로 새로 피어날 풍경을 기대하게 한다. 설령 아무것도 없다 해도, 조금 늦는다 해도 괜찮다. 함께 파도를 바라보는 마음, 온기를 잃지 않으려는 마음,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만으로도 이미 아름답지 않은가. _정소현(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