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상세정보
Detail Information
장엄호텔 : 마리 르도네 소설
원서명
Splendid Hotel
총서명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2
저자
번역자
원저자
출판사
출판일
20210906
가격
₩ 13,000
ISBN
9791170400462
페이지
183 p.
판형
125 X 200 mm
판차
개정판
커버
Book
책 소개
[열림원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두 번째 책. 여성을 중심으로 상속되는 불행에 대해 쓰는 마리 르도네, [장엄호텔]은 그녀의 데뷔 소설이자 일명 ‘마리 르도네 삼부작’의 첫 작품이다. 이재룡 문학평론가에 의해 처음 국내에 소개됐으며 새로 출간되는 개정판에는 이재룡 교수의 해설이 붙었다. [장엄호텔]은 얼굴도 이름도 없는 ‘나’가 인적이 끊긴 늪지대에서 할머니의 마지막 유산 ‘장엄호텔’을 지키며 분투하는 이야기다. ‘나’는 생활력 없고 불만만 많은 두 언니 아다와 아델을 부양하며 무너져가는 장엄호텔을 관리한다. “모든 걸 썩게 만드는 습기”를 내뿜는 늪은 온갖 병과 곰팡이, 해충과 쥐 떼를 불러들인다. 손님들은 호텔을 더럽히고 망가뜨리고는 갖은 불평을 늘어놓으며 떠난다. 할머니에 이어 언니들도 정체불명의 전염병으로 돌연 죽는다. 오직 ‘나’만이 장엄호텔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 이 책을 추천하는 최진영 소설가의 말처럼 장엄호텔은 “생명”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이 어떻게 부서지고 무너진다고 해도 우리는 그 무른 땅 위에 단단하게 서 있다. 꼴이 어떻든 “지탱하고 있고 그게 중요한 거다.” 헤어날 수 없는 늪처럼 영원히 이어지는 불행의 세계. ‘나’는 “매일 밤 장엄호텔에 네온사인을 켜고 손님을 기다린다.”
목차
장엄호텔
옮긴이 해설 - 묵시론 다음에는?
옮긴이 해설 - 묵시론 다음에는?
본문발췌
P.15~16
그녀는 입을 벌린 채 잔다. 호흡이 곤란한 것 같다. 번번이 깜짝깜짝 잠에서 깬다. 그녀는 마치 내가 일부러 그녀를 깨웠다는 듯 심술 난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그러나 그건 약을 먹이기 위해서다. 그녀는 신장기능이 좋지 않다. 그녀는 마치 병원 생활을 되풀이하는 것 같다고 했다.
P.25
아델은 이상한 인간이다. 그녀는 정원을 떠나는 마지막 사람이다. 오지 않는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낮에 호텔이 비었을 땐 정신 나간 사람 같다. 이리저리 서성거린다. 해가 떨어지면 그녀는 방에 틀어박혀 준비를 한다. 그녀 옷이 헐렁하다. 꺼져 들어가는 빈약한 그녀 앞가슴이 눈에 들어온다. 그녀는 부끄러운 줄 모른다. 나는 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게 그녀를 짜증나게 한다.
P.32
언니들은 장엄호텔은 걱정도 하지 않는다. 부서져도 코웃음 친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먹고 자는 주제에. 그들은 이곳에서 바캉스, 영원한 바캉스중인 것이다. 나는 그들을 너무 쉽게 살게 해준 것이다. 아델이 정말 진지하게 연기 연습을 하는지 자문해본다. 그러는 척만 하는 건 아닌지. 그녀는 언제나 공사판 근처를 배회한다. 연극보다 철도의 장래가 더 궁금한가보다.
P.38
도대체 꽁꽁 얼어붙은 날씨의 그런 시각에 할머니는 혼자서 뭘 하고 있었을까? 할머니는 심장마비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리곤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할머니가 죽었다기보다는 내가 모르는 다른 누군가가 할머니 모습을 차지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무척 힘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묻힌 묘지에는 분명 그녀 이름이 적힌 비석이 있다.
P.134
노란 이끼가 퍼진다. 인근 늪에서 왔을 것이다. 늪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서로 뚝뚝 떨어져 있는 게 아니다. 작은 수로가 망을 이뤄 서로 통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병이 들어 다른 것에 오염시켰을 것이다. 곧이어 또 새들이 죽을 것이다. 정기적으로 있는 일이다. 풀들도 노래진다. 현장 소장은 불안한 눈길로 늪을 바라본다.
P.146
아델이 나를 아다라고 부른다. 그리곤 아델도 죽었다. 언니들은 같은 병으로 죽었다. 아델의 얼굴을 씻겨준다. 그녀도 할머니의 면사포로 덮어주었다. 아델을 아다 곁에 눕혔다. 이제 내겐 언니가 없다. 장엄뿐이다. 나는 아다와 아델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호텔에서 편하게 살았다. 어머니는 아다와 아델은 데려가면서 왜 나는 할머니에게 맡겼을까?
P.159
언니들이 묻혀 있는 둑에 자주 산책을 간다. 둑의 그 부분은 견고하다.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는다. 아다와 아델의 이름이 잘못 새겨졌다. 벌써 지워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장엄호텔이란 글자는 여전히 분명하게 남아 있다. 언니들은 벌써 조금은 잊혔다. 나도 기억력이 나쁜가보다.
P.167
아다와 아델도 늪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밑바닥 어느 곳에선가 할머니와 만나게 될 것이다. 언니들에겐 늪 구덩이에서 떠돌이로 헤매는 종말을 면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그걸 이루지 못한 거다. 언니들 역시 휩쓸려갔다. 아무것도 늪에 대항할 수 없다.
그녀는 입을 벌린 채 잔다. 호흡이 곤란한 것 같다. 번번이 깜짝깜짝 잠에서 깬다. 그녀는 마치 내가 일부러 그녀를 깨웠다는 듯 심술 난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그러나 그건 약을 먹이기 위해서다. 그녀는 신장기능이 좋지 않다. 그녀는 마치 병원 생활을 되풀이하는 것 같다고 했다.
P.25
아델은 이상한 인간이다. 그녀는 정원을 떠나는 마지막 사람이다. 오지 않는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낮에 호텔이 비었을 땐 정신 나간 사람 같다. 이리저리 서성거린다. 해가 떨어지면 그녀는 방에 틀어박혀 준비를 한다. 그녀 옷이 헐렁하다. 꺼져 들어가는 빈약한 그녀 앞가슴이 눈에 들어온다. 그녀는 부끄러운 줄 모른다. 나는 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게 그녀를 짜증나게 한다.
P.32
언니들은 장엄호텔은 걱정도 하지 않는다. 부서져도 코웃음 친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먹고 자는 주제에. 그들은 이곳에서 바캉스, 영원한 바캉스중인 것이다. 나는 그들을 너무 쉽게 살게 해준 것이다. 아델이 정말 진지하게 연기 연습을 하는지 자문해본다. 그러는 척만 하는 건 아닌지. 그녀는 언제나 공사판 근처를 배회한다. 연극보다 철도의 장래가 더 궁금한가보다.
P.38
도대체 꽁꽁 얼어붙은 날씨의 그런 시각에 할머니는 혼자서 뭘 하고 있었을까? 할머니는 심장마비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리곤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할머니가 죽었다기보다는 내가 모르는 다른 누군가가 할머니 모습을 차지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무척 힘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묻힌 묘지에는 분명 그녀 이름이 적힌 비석이 있다.
P.134
노란 이끼가 퍼진다. 인근 늪에서 왔을 것이다. 늪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서로 뚝뚝 떨어져 있는 게 아니다. 작은 수로가 망을 이뤄 서로 통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병이 들어 다른 것에 오염시켰을 것이다. 곧이어 또 새들이 죽을 것이다. 정기적으로 있는 일이다. 풀들도 노래진다. 현장 소장은 불안한 눈길로 늪을 바라본다.
P.146
아델이 나를 아다라고 부른다. 그리곤 아델도 죽었다. 언니들은 같은 병으로 죽었다. 아델의 얼굴을 씻겨준다. 그녀도 할머니의 면사포로 덮어주었다. 아델을 아다 곁에 눕혔다. 이제 내겐 언니가 없다. 장엄뿐이다. 나는 아다와 아델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호텔에서 편하게 살았다. 어머니는 아다와 아델은 데려가면서 왜 나는 할머니에게 맡겼을까?
P.159
언니들이 묻혀 있는 둑에 자주 산책을 간다. 둑의 그 부분은 견고하다.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는다. 아다와 아델의 이름이 잘못 새겨졌다. 벌써 지워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장엄호텔이란 글자는 여전히 분명하게 남아 있다. 언니들은 벌써 조금은 잊혔다. 나도 기억력이 나쁜가보다.
P.167
아다와 아델도 늪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밑바닥 어느 곳에선가 할머니와 만나게 될 것이다. 언니들에겐 늪 구덩이에서 떠돌이로 헤매는 종말을 면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그걸 이루지 못한 거다. 언니들 역시 휩쓸려갔다. 아무것도 늪에 대항할 수 없다.
저자소개
1948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마르틴느 로스피탈리에(Martine L'hospitalier). 문학을 전공한 그는 1970년대 말부터 글쓰기를 시작했고, 1985년 일본 하이쿠에 영감을 받은 시 「사망자주식회사」를 발표하며 작가로 데뷔했다. 1986년 소설 『장엄호텔』을 미뉴이 출판사에 투고해 출간했고, 이듬해 어머니 성을 따른 마리 르도네라는 필명으로 두 권의 소설 『영원의 계곡』 『로즈 멜리 로즈』를 출간해 삼부작으로 완결했다. 이밖에 장편소설 『이제 더 이상은』 『콜트 45 권총을 든 여인』, 단편집 『대역인물』 『실시』, 희곡집 『티르와 리르』 『모비-딕』 등이 있다.
역자소개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브장송대학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숭실대학교 불어불문학과 명예교수다. 지은 책으로 『꿀벌의 언어』 『소설, 때때로 맑음 1, 2, 3』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장 필리프 투생의 『욕조』 『사진기』,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정체성』, 앙투안 콩파뇽의 『모더니티의 다섯 개 역설』,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벵갈의 밤』, 마리 르도네의 『장엄호텔』, 외젠 이오네스코의 『외로운 남자』, 르 클레지오의 『오니샤』 등이 있다.
서평
“소설을 읽으며 장엄호텔을 생명처럼 느꼈다. 낡은 것은 고치고 막힌 것은 뚫고
고칠 수 없는 것은 감당하면서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나의 삶과 비슷하다고.”_최진영(소설가)
“늪에 버티는 건 오로지 장엄뿐, 기우뚱해도 쓰러지진 않는다.”
마리 르도네, 끝없이 침몰하는 세계를 딛고 선 악착같은 생의 의지 !
“백지 위에 첫 번째 중요한 단어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시체’였다. 그것은 앞으로 내 글쓰기가 생산될 디딤돌이 될 단어였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마리 르도네의 소설은 희망이라고는 없는 종말의 세계를 그리며 죽음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장엄호텔] [영원의 계곡] [로즈 멜리 로즈] 세 편의 소설로 이어지는 일명 ‘마리 르도네 삼부작’, 그중 첫 소설 [장엄호텔]은 얼굴도 이름도 드러나지 않는 ‘나’가 인적이 끊긴 늪지대에서 무너져가는 호텔을 지키며 분투하는 이야기다.
호텔을 세운 할머니가 죽고 ‘나’는 장엄호텔의 주인이 된다. 어렸을 적 어머니는 “언니들을 데리고 불쑥 떠”났고 “장엄호텔을 떠나지 않았던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다. 어머니가 죽고 들이닥친 언니들은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호텔이 “제 안방인 양 산다.” ‘나’는 “무엇보다도 장엄을 먼저 생각”하며 호텔 운영에 힘쓰지만 현실은 처참하기만 하다. 늪은 “모든 걸 썩게 만드는 습기”를 내뿜고 남루한 호텔은 그 공격을 견디지 못한다. 곳곳에 곰팡이가 피고 온갖 해충이 들끓으며 쥐 떼는 병을 옮겨 호텔에 방문하는 모두를 앓거나 죽게 만든다.
“항상 배경 속에 희미하게 서 있”던 어머니와 “지팡이를 짚고 아주 꼿꼿이 서 있”던 할머니도 죽었고, “결코 완쾌된 적이 없”이 늘 병들어 있던 아다와 “오지 않는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배우의 꿈에 매달리던 아델도 죽었다. 폭우가 물러진 땅을 헤치고 시신을 쓸어간 덕에 “할머니와 언니들은 늪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종기가 돋고 굽은 몸으로 호텔을 조금씩 정리해간다. 이렇듯 “산 사람은 계속 사는 거다.” 어려서 호텔을 떠난 언니들도 결국은 장엄에서 죽었다. 빠져나올 수 없는 늪처럼 영원히 이어지는 불행의 세계.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 닳고 닳을지언정 끊어지지 않는 그 선명한 생의 의지 위로 장엄한 네온사인이 비친다. 아무도 찾지 않는 썩은 늪, “장엄은 밤낮으로 열려 있다. 손님은 언제나 환영이다.”
“나를 고치며 살아가는 내가 바로 여기 있다.”
부서지고 희미해져도 사라지지 않겠다는 선언
까만 밤 홀로 네온사인을 밝히며 여기 내가 분명히 존재함을 알리는 장엄호텔은 결코 철도나 늪이나 사람 때문에 무너지지 않으리라. (……) 오늘도 부지런히 나를 고치며 살아가는 내가 바로 여기 있다. 늪지대 위에서 불을 밝히고 있다._최진영(소설가)
마리 르도네의 소설은 자질구레한 불행을 지루하게 반복한다. 작가는 오물을 토해내듯이 대화와 감정이 배제된 서술을 꾸역꾸역 뱉어낸다. 죽음마저 무심히 이야기하는 둔중하고 서늘한 문장은 끝없이 이어지는 암울한 세계를 그린다. “겨울엔 얼어붙고 여름엔 벌레가 들끓”어 “계절이 바뀌어도 삶은 털끝만치도 달라지지 않는” 장엄호텔이 바로 그것이다. 썩은 늪의 악취 나는 호텔은 거역할 수 없는 불행의 무게로 소설의 객(客)들을 모조리 압도한다. 붕괴되고 침수되고 오염되고…… 마리 르도네의 세계에서 “끈질기게 되풀이되는 불행은” 말 그대로 “지옥이 따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 르도네의 화자는 묵묵히 삶을 살아낸다. 고통에 둔감하다기보다 차라리 고통이 생의 충동을 유지하는 연료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다와 아델은 더러운 늪과 친절하지도 말끔하지도 않은 불청객들의 행패에 죽음에 가까워가지만 ‘나’는 병든 몸으로 두 언니와 호텔을 건사하기 위해 애쓴다. “유령 같은 두 언니”는 “내가 책임져야 하는 나와 다르지 않다.” 좌절되고 흔들리고 서로 증오하는 동시에 보살펴주는, “나의 동반자이자 훼방꾼인 나.” “언니들이 내 고생의 근원이”지만 ‘나’는 “그들 불행에 책임이 있다고 여긴다.” “어쨌든 언니들은 장엄에서 태어났”지만 “그건 그들 탓이 아니다.”
최진영 소설가의 말처럼 장엄호텔은 “생명” 그 자체일지 모른다. 제아무리 세계가 우리의 삶을 부서뜨리고 무너뜨려도 우리는 무른 땅 위에 단단하게 서 있다. 꼴이 어떻든 “지탱하고 있고 그게 중요한 거다.” “장엄은 선수가 반쯤 썩어 눈 위에 좌초된 배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좌초되었으니 완전히 가라앉을 염려는 없다.” “장엄은 잘 버틴다.” “날씨가 춥고 손님이 없더라도 장엄호텔은 계속해서 밤을 밝혀야 한다.” “중요한 건 현재뿐.” 더럽고 치욕적이고 비참해도 살아만 있으면 무엇도 끝나지 않는다. “죽음, 그건 삶보다 나쁘다”는 아델의 말처럼 우리 삶의 최우선 과제는 우선 죽지 않고 사는 것이다. ‘나’는 “지금 내리막길에 있”어도 “매일 밤 장엄호텔에 네온사인을 켜고 손님을 기다린다.”
이미 시로 문단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신인이나 다름없었던 마리 르도네는 1986년 [장엄호텔]로 평단의 눈길을 끌었고 연이어 발표한 삼부작이 완성되자 그녀는 프랑스 여성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앞선 세대인 뒤라스, 에르노의 작품세계와 비교연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 [장엄호텔]이 출간된 지 35년이 지난 요즘, 늪에 빠져 온갖 질병에 시달리다 주변 사람들이 시름없이 죽어가는 모습을 우두망찰 지켜보는 화자에게서 우리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 이재룡, ‘옮긴이 해설’ 중에서
고칠 수 없는 것은 감당하면서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나의 삶과 비슷하다고.”_최진영(소설가)
“늪에 버티는 건 오로지 장엄뿐, 기우뚱해도 쓰러지진 않는다.”
마리 르도네, 끝없이 침몰하는 세계를 딛고 선 악착같은 생의 의지 !
“백지 위에 첫 번째 중요한 단어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시체’였다. 그것은 앞으로 내 글쓰기가 생산될 디딤돌이 될 단어였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마리 르도네의 소설은 희망이라고는 없는 종말의 세계를 그리며 죽음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장엄호텔] [영원의 계곡] [로즈 멜리 로즈] 세 편의 소설로 이어지는 일명 ‘마리 르도네 삼부작’, 그중 첫 소설 [장엄호텔]은 얼굴도 이름도 드러나지 않는 ‘나’가 인적이 끊긴 늪지대에서 무너져가는 호텔을 지키며 분투하는 이야기다.
호텔을 세운 할머니가 죽고 ‘나’는 장엄호텔의 주인이 된다. 어렸을 적 어머니는 “언니들을 데리고 불쑥 떠”났고 “장엄호텔을 떠나지 않았던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다. 어머니가 죽고 들이닥친 언니들은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호텔이 “제 안방인 양 산다.” ‘나’는 “무엇보다도 장엄을 먼저 생각”하며 호텔 운영에 힘쓰지만 현실은 처참하기만 하다. 늪은 “모든 걸 썩게 만드는 습기”를 내뿜고 남루한 호텔은 그 공격을 견디지 못한다. 곳곳에 곰팡이가 피고 온갖 해충이 들끓으며 쥐 떼는 병을 옮겨 호텔에 방문하는 모두를 앓거나 죽게 만든다.
“항상 배경 속에 희미하게 서 있”던 어머니와 “지팡이를 짚고 아주 꼿꼿이 서 있”던 할머니도 죽었고, “결코 완쾌된 적이 없”이 늘 병들어 있던 아다와 “오지 않는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배우의 꿈에 매달리던 아델도 죽었다. 폭우가 물러진 땅을 헤치고 시신을 쓸어간 덕에 “할머니와 언니들은 늪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종기가 돋고 굽은 몸으로 호텔을 조금씩 정리해간다. 이렇듯 “산 사람은 계속 사는 거다.” 어려서 호텔을 떠난 언니들도 결국은 장엄에서 죽었다. 빠져나올 수 없는 늪처럼 영원히 이어지는 불행의 세계.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 닳고 닳을지언정 끊어지지 않는 그 선명한 생의 의지 위로 장엄한 네온사인이 비친다. 아무도 찾지 않는 썩은 늪, “장엄은 밤낮으로 열려 있다. 손님은 언제나 환영이다.”
“나를 고치며 살아가는 내가 바로 여기 있다.”
부서지고 희미해져도 사라지지 않겠다는 선언
까만 밤 홀로 네온사인을 밝히며 여기 내가 분명히 존재함을 알리는 장엄호텔은 결코 철도나 늪이나 사람 때문에 무너지지 않으리라. (……) 오늘도 부지런히 나를 고치며 살아가는 내가 바로 여기 있다. 늪지대 위에서 불을 밝히고 있다._최진영(소설가)
마리 르도네의 소설은 자질구레한 불행을 지루하게 반복한다. 작가는 오물을 토해내듯이 대화와 감정이 배제된 서술을 꾸역꾸역 뱉어낸다. 죽음마저 무심히 이야기하는 둔중하고 서늘한 문장은 끝없이 이어지는 암울한 세계를 그린다. “겨울엔 얼어붙고 여름엔 벌레가 들끓”어 “계절이 바뀌어도 삶은 털끝만치도 달라지지 않는” 장엄호텔이 바로 그것이다. 썩은 늪의 악취 나는 호텔은 거역할 수 없는 불행의 무게로 소설의 객(客)들을 모조리 압도한다. 붕괴되고 침수되고 오염되고…… 마리 르도네의 세계에서 “끈질기게 되풀이되는 불행은” 말 그대로 “지옥이 따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 르도네의 화자는 묵묵히 삶을 살아낸다. 고통에 둔감하다기보다 차라리 고통이 생의 충동을 유지하는 연료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다와 아델은 더러운 늪과 친절하지도 말끔하지도 않은 불청객들의 행패에 죽음에 가까워가지만 ‘나’는 병든 몸으로 두 언니와 호텔을 건사하기 위해 애쓴다. “유령 같은 두 언니”는 “내가 책임져야 하는 나와 다르지 않다.” 좌절되고 흔들리고 서로 증오하는 동시에 보살펴주는, “나의 동반자이자 훼방꾼인 나.” “언니들이 내 고생의 근원이”지만 ‘나’는 “그들 불행에 책임이 있다고 여긴다.” “어쨌든 언니들은 장엄에서 태어났”지만 “그건 그들 탓이 아니다.”
최진영 소설가의 말처럼 장엄호텔은 “생명” 그 자체일지 모른다. 제아무리 세계가 우리의 삶을 부서뜨리고 무너뜨려도 우리는 무른 땅 위에 단단하게 서 있다. 꼴이 어떻든 “지탱하고 있고 그게 중요한 거다.” “장엄은 선수가 반쯤 썩어 눈 위에 좌초된 배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좌초되었으니 완전히 가라앉을 염려는 없다.” “장엄은 잘 버틴다.” “날씨가 춥고 손님이 없더라도 장엄호텔은 계속해서 밤을 밝혀야 한다.” “중요한 건 현재뿐.” 더럽고 치욕적이고 비참해도 살아만 있으면 무엇도 끝나지 않는다. “죽음, 그건 삶보다 나쁘다”는 아델의 말처럼 우리 삶의 최우선 과제는 우선 죽지 않고 사는 것이다. ‘나’는 “지금 내리막길에 있”어도 “매일 밤 장엄호텔에 네온사인을 켜고 손님을 기다린다.”
이미 시로 문단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신인이나 다름없었던 마리 르도네는 1986년 [장엄호텔]로 평단의 눈길을 끌었고 연이어 발표한 삼부작이 완성되자 그녀는 프랑스 여성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앞선 세대인 뒤라스, 에르노의 작품세계와 비교연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 [장엄호텔]이 출간된 지 35년이 지난 요즘, 늪에 빠져 온갖 질병에 시달리다 주변 사람들이 시름없이 죽어가는 모습을 우두망찰 지켜보는 화자에게서 우리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 이재룡, ‘옮긴이 해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