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상세정보
Detail Information
죽음을 그리다 = Si vis vitam, para mortem : 예술에 담긴 죽음의 여러 모습, 모순들
저자
출판사
출판일
20211122
가격
₩ 17,000
ISBN
9791165797966
페이지
311 p.
판형
130 X 215 mm
커버
Book
책 소개
예술에 나타난 죽음의 온갖 양상과 모습을 다룬다. 죽음을 여러 갈래로 나누고 파헤치다 보니 죽음의 민낯과 지금껏 논의되지 못한 모순들이 도드라졌다. 하지만 무겁고 진지하지만은 않게, 군데군데 유머와 풍부한 논의를 통해 모두가 막연히 의심했지만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던 죽음에 얽힌 궁금증을 열어 본다. 죽음을 언제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면, 인간의 숙명이라면, 죽음을 버려두는 대신 삶만큼 소중히 대해 주고 싶다면 이 책이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인생이 1천 가지 모습이라면 죽음도 1천 가지 얼굴일 수 있다는 깨달음을 전하는 책이다.
목차
들어가며_조용한 들판을 달린다면 _8
1장 죽음을 맞이하다 _12
천재의 임종 ○ 아르스 모리엔디 ○ 장군의 죽음 ○ 마지막 명령 ○ 말을 바꾸는 노인, 풀을 묶는 노인 ○ 네로의 마지막 소원
2장 순교자와 암살자 _48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 가장 좋은 순간이 가장 위태로운 순간 ○ 절정 속에 죽을 것인가 ○ 작은 죽음과 큰 죽음 ○ 순교자와 암살자 ○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3장 죽음은 검정 _82
상복은 검은색 ○ 어둠의 화가들 ○ 검은 광채 ○ 검은색 더하기 검은색 ○ 검은 돛 ○ 흑기사 vs. 검은 천사
4장 나를 죽이다 _122
내리찍는 칼날 ○ 위를 향해 세운 칼날 ○ 꼿꼿한 죽음 ○ 나가 죽은 자 ○ 화가의 유언 ○ 이야기가 없는 죽음
5장 죽어 가는 사람을 그린 화가 _166
카미유를 그린 모네 ○ 아내를 담은 연작 ○ 가셰가 그린 빈센트 ○ 클림트를 그린 실레 ○ 익사한 사람의 사진
6장 애도와 매장 _200
서 있는 예수 ○ 폭발하는 비탄 ○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과 오르낭의 매장 ○ 청색 시대의 죽음 ○ 나는 아발론으로 간다
7장 유령 _236
바닥을 딛지 못하는 자 ○ 흐릿한 존재 ○ 크리스마스 캐럴 ○ 불려 나온 유령들 ○ 그들은 보고 있을까 ○ 내게 나타난 유령
8장 돌아온 망자 _266
죽은 이가 돌아온다면 ○ 되살아난 라자로 ○ 나를 만지지 마라
나오며_언제나 다른 누군가가 죽는다 _296
대담_죽음 후에 남은 것들 _301
1장 죽음을 맞이하다 _12
천재의 임종 ○ 아르스 모리엔디 ○ 장군의 죽음 ○ 마지막 명령 ○ 말을 바꾸는 노인, 풀을 묶는 노인 ○ 네로의 마지막 소원
2장 순교자와 암살자 _48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 가장 좋은 순간이 가장 위태로운 순간 ○ 절정 속에 죽을 것인가 ○ 작은 죽음과 큰 죽음 ○ 순교자와 암살자 ○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3장 죽음은 검정 _82
상복은 검은색 ○ 어둠의 화가들 ○ 검은 광채 ○ 검은색 더하기 검은색 ○ 검은 돛 ○ 흑기사 vs. 검은 천사
4장 나를 죽이다 _122
내리찍는 칼날 ○ 위를 향해 세운 칼날 ○ 꼿꼿한 죽음 ○ 나가 죽은 자 ○ 화가의 유언 ○ 이야기가 없는 죽음
5장 죽어 가는 사람을 그린 화가 _166
카미유를 그린 모네 ○ 아내를 담은 연작 ○ 가셰가 그린 빈센트 ○ 클림트를 그린 실레 ○ 익사한 사람의 사진
6장 애도와 매장 _200
서 있는 예수 ○ 폭발하는 비탄 ○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과 오르낭의 매장 ○ 청색 시대의 죽음 ○ 나는 아발론으로 간다
7장 유령 _236
바닥을 딛지 못하는 자 ○ 흐릿한 존재 ○ 크리스마스 캐럴 ○ 불려 나온 유령들 ○ 그들은 보고 있을까 ○ 내게 나타난 유령
8장 돌아온 망자 _266
죽은 이가 돌아온다면 ○ 되살아난 라자로 ○ 나를 만지지 마라
나오며_언제나 다른 누군가가 죽는다 _296
대담_죽음 후에 남은 것들 _301
본문발췌
우리는 ‘죽음’을 자주 말하다 못해 입에 달고 산다. 죽겠다, 죽고 싶다, 죽을 것 같다는 표현을 작은 투정에도 쉽게 사용한다. 실제 죽음이 갖는 위압적인 무게에 견주어 볼 때 괴상할 정도다. 그런 주문으로 죽음을 잊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다 전혀 의외의 상황에서 켜켜이 쌓아 온 죽음의 무게가 한꺼번에 터져 버린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잠을 자고 있다가, 친구와 헤어져 들어오는 길에, 문득 부모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 ‘들어가며’ 중에서
굳이 따지자면 레오나르도의 임종을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이랬을 수도 있고 저랬을 수도 있는데도 이런 식으로 따지는 건 프랑수아가 레오나르도의 임종을 맞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소망을 바탕에 깔고 있다. ‘임종’이라는 극적인 결말이야말로 천재와 군주에게 어울리는 그림이니까. 실제로는 결코 극적이지도 또 명쾌하지도 않다. 이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임종에 관한 기록도, 심지어는 무덤조차 찾을 수 없다. 먼지처럼 역사와 세월 속에 사라졌다.
- 1장 ‘죽음을 맞이하다’ 중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여기부터다. 콤모두스는 마지막 기운을 짜내서 ‘불태워라!’라고 외친다. 그러자 부하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장작에 불을 놓는다. 마지막까지 뒤끝을 보여 주는 황제가 아니라, 부하들이 신속히 황제의 명을 따른다는 점이 불가해하다. 곧 끝장날 황제의 명령을 왜 그리 충실하게 집행했을까? 황제의 주변 사람들은 권력의 향방에 민감하기 이를 데 없었고, 종종 자신들의 손으로 황제를 죽이거나 교체했다. 가뜩이나 정신 나간 황제가 이제 숨이 끊어지는 형국이다. 군인으로서 신망이 두터운 리비우스가 새 황제가 될 공산이 크다. 게다가 그가 화형을 저지하러 나타났다. 이런 판에 섣불리 불을 놓았다가는 리비우스의 노여움을 사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이 모든 계산을 깡그리 무시한다. 기둥에 묶여 불길에 휩싸인 게르만 사람들이 ‘로마는 멸망할 것이다’라고 외치는 장면을 엔딩으로 삼아야 했기 때문이다. 죽어 가는 권력자의 마지막 명령, ‘유언’이 가진 불가해한 힘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 1장 ‘죽음을 맞이하다’ 중에서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는 곧잘 자연이 허락한 수명을 마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된다. 사람들은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종종 잊어버리고는 자신은 아주 긴 시간이 흐른 다음 천천히 세상을 떠날 거라 믿는다. 누구도 내가 죽을 모습을 정해 둘 수 없다. 죽을 시간과 자리, 함께 있을 사람 등도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사고나 재난으로, 또 전쟁과 학살로 사라졌던가.
- 2장 ‘순교자와 암살자’ 중에서
다비드는 마라를 ‘대혁명’이라는 대의를 위해 복무하다 불의의 습격을 받아 숨진 고결한 영웅으로 묘사했다. 마라의 자세를 미켈란젤로의 그 유명한 〈바티칸의 피에타〉의 그리스도에서 가져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를 스스로 목숨을 바친 순교자로 묘사한 것이다. 따라서 그림 어디에도 암살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다비드는 암살이 벌어진 직후의 모습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애초에는 그런 구상을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드넓은 공간에 홀로 스스로의 죽음을 명상하기라도 하는 것 같은 엄숙한 그림을 완성했다. 마라는 지성적인 존재이자 아름다운 육체를 지닌 존재로 묘사되었다. 그림은 널리 환영받았고, 혁명 당국에서는 복제화도 요청했다.
- 2장 ‘순교자와 암살자’ 중에서
상복에는 묘한 아이러니가 담겨 있다. 검은색이 아니라도 오래전부터 인류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장례 때 상복에 해당하는 차림을 갖추었다. 장례에 참여한 이들 모두가 몸에 흰 칠을 하는 오지(奧地)의 원주민 부족도 있다. 인류가 왜 상복을 입거나 상복처럼 꾸몄는지에 대한 설명 가운데 가장 설득력 높은 것은 상복이 일종의 변장이라는 주장이다. 사람들은 망자의 영혼이 되돌아와 저승으로 함께 갈 동반자를 찾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망자의 눈에 띄어 끌려가지 않기 위해 평소와는 전혀 다른 색과 차림으로 자신들을 꾸몄다는 것이다.
- 3장 ‘죽음은 검정’ 중에서
대체로 미술에서 검정은 불안과 절망, 죽음을 가리켰다. 프란시스코 고야가 말년에 자신의 집 벽에 그린 ‘검은 그림’은 공포와 비관론을 표현했다. 널리 알려진 대로 프랑스 화가 오딜롱 르동은 반평생을 검은색만 사용하여 그림을 그렸다. 상징주의 문학의 영향을 받고, 현미경으로 본 미생물의 기이한 모습에서 영감을 얻은 르동은 검정으로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세계를 표현해 냈다. 여기서 검정은 상상을 자극하고 창조를 촉진하는 매개체였고, 모호하고 신비로운 멜랑콜리의 근원이다.
- 3장 ‘죽음은 검정’ 중에서
갈리아 전사는 항복을 거부하고 마지막까지 저항한다. 적보다는 자신의 손에 죽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에 아내를 먼저 죽인다. 적들에게 어떤 끔찍한 일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숨이 끊어져 늘어진 아내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검을 자신의 빗장뼈 위에 세웠다. 이런 방법으로 자살을 기도하는 그림이나 조각을 볼 때면 꼭 내 몸에 칼이 쑤욱 들어오는 느낌이다. 서늘하다.
가슴을 부여잡고 차근히 따져 보면 칼로 심장을 직접 찌르는 방법도 있다. 다만 이렇게 되면 칼을 찌르는 내가 어쩔 수 없이 칼날을 내려다봐야 하니까 두렵다. 이 조각처럼 내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 칼을 세우면 조금은 쉽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검을 수직으로 세움으로써 당당하고 분명하게 자신의 결의를 과시한다. 실제로는 칼날이 조금 들어가다가 멈추기 쉬울 것 같지만… 조각 자체가 전장에서 목격한 모습을 바탕으로 제작되었기에 적어도 모델이 된 전사는 성공했으리라 짐작한다.
여러 기록과 경험이 증명하듯 단번에 스스로의 목숨을 끊기란 쉽지 않다. 자살을 결심하면서도 조금이라도 고통을 줄이는 방법을 선택하거나 내 몸에 칼이 들어가는 장면을 보는 걸 꺼린다거나 하는. 그렇다면 칼날의 방향은 무엇을 의미할까?
- 4장 ‘나를 죽이다’ 중에서
호들러는 두터운 선으로 큼지막하게 윤곽만 잡았는데, 발랑틴의 고통이 커질수록 호들러의 필치도 어지러워진다. ‘연작’을 보는 입장에서는 병자의 몸이 점점 아래로 늘어지면서, 몸을 세워 앉았던 수직선이 수평선으로 내려앉는 과정을 의식하게 된다. 수직선은 삶, 수평선은 죽음이다. 호들러는 발랑틴이 죽던 날 병실 창문으로 본 호수의 일몰을 그렸다.
이날 호들러가 그린 발랑틴은 이제 다른 사람이 되었다. 호수의 수평선처럼 길게 누워 있다. 발랑틴이 한참 고통스러워할 때는 함께 흔들리던 필치가 이제는 차분해졌다. 발랑틴이 신발을 신고 있다는 점은 이상하다. 병석에서 신발을 신고 누웠을 리 없고 발을 저렇게 드러냈을 리는 더더욱. 숨이 끊어지자 관에 모시기 전에 신발을 신겼다. 그러니 이제 걸을 것이다. 걸어가리라.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디든 갈 수 있으리라.
- 5장 ‘죽어 가는 사람을 그린 화가’ 중에서
바야르의 사진은 이미지의 진실성에 관한 흥미로운 물음을 제기한다. 죽은 사람을 찍은 사진이라지만 이처럼 연출된 경우도 있고, 거꾸로 실제로 사고나 전투 현장에서 죽은 사람을 찍은 사진은 영화에서 엑스트라들이 죽은 시늉을 하고 누워 있는 모습처럼 비현실적이다. 죽은 클림트의 모습을 그렸던 실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스페인 독감으로 허망하게 숨을 거두었다. 실레의 죽은 모습을 담은 그림은 없다. 그릴 화가도 없었고, 또 실레가 아주 급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기에 그림을 그릴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은 실레를 담은 사진은 남아 있다. 사진 속 실레는 마치 잠이 든 것 같다.
죽은 이들과 함께 회화도 잠들었다. 이후로는 사진의 시대가 열린다.
- 5장 ‘죽어 가는 사람을 그린 화가’ 중에서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한 명 한 명 주변의 죽음을 보고 듣는다. 나이가 들수록 경험하는 죽음의 수가 늘어나며 조금씩 죽음에 둔감해진다고 한다. 반면에 점점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겪게 된다. 죽음에 가까워지면서 둔감해지는 것이다. 이러다가 죽음의 당사자가 되면 벼락을 맞은 것처럼 실감하게 될까? 애도는 망자를 향한 것이지만 망자의 모습에 비친 스스로를 향하기도 한다.
- 6장 ‘애도와 매장’ 중에서
조각가 귀도 마초니가 같은 주제를 연출한 작품과 함께 보면 흥미롭다. 델라르카의 작품에 비해 마초니 쪽은 사도 요한은 조금 더 슬퍼하고 마리아 막달레나는 조금 덜 슬퍼한다. 이로써 전체적으로 감정과 태도의 톤이 통일되어 있고, 구도도 더 정돈되었다. 그런데 덜 매력적이다. 혼돈과 어수선한 리듬이야말로 애도의 실제 모습에 가깝다. 장례는 모순과 긴장 속에 마련된 형식인데, 슬픔은 주체할 수 없고 비탄은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 6장 ‘애도와 매장’ 중에서
영적인 존재는 물리적인 한계를 초월한다. 발끝까지 모두 그려 놓으면 아무래도 무거워 보인다. 이런 이유로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도 유령은 바닥에서 살짝 떠 있는 경우가 많고, 전체적으로 흐릿하고 투명하다. 《꼬마 유령 캐스퍼》의 캐스퍼처럼. 사진이 발명된 직후부터 죽은 사람의 영혼이 찍힌 사진, 즉 심령사진이 많이 나왔다. 그때도 절대 다수가 반투명한 형상이다. 그리고 대부분 조작이다.
‘영혼을 반투명한 형상으로 묘사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예는 회화에서도 적잖이 나왔다. 예술가들이 영혼을 반투명하게 묘사한 건 왜일까? 싱거운 답이지만 완전히 투명한 형상은 아예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설령 보이지는 않지만 자신들의 주변에 영혼이 머물고 있다고 믿는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다는 논리에 들어맞는 모습은 반투명이다.
- 7장 ‘유령’ 중에서
죽은 이가 돌아온다면 어떤 모습일까? 아름답고 건강했을 때의 모습 그대로일까? 아니면 죽기 직전의 쇠약해진 모습, 혹은 부서진 그대로, 심지어 흙 속에서 썩다 만 모습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죽은 이를 그리워한다지만 그런 모습을 바라는 게 아니다. 하지만 죽은 이가 돌아온다면 산 자들이 기대하던 모습이 아닐 가능성이 높을 듯하다. 그래서 죽은 이는 무섭다. 그들의 모습을 짐작할 수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죽은 이들 중 극히 일부라도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면 당연하게도 세상의 모습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달라졌으리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뒤틀리다 못해 무너졌을 것이다.
죽은 이는 돌아올 수 없다. 아니, 돌아와서는 안 된다. 산 자는 살아야 하고 죽은 이는 ‘죽어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산 자는 죽은 이에게 한없이 잔인하다.
- 8장 ‘돌아온 망자’ 중에서
지금까지 숱한 작품과 여러 이야기, 생각의 조각들을 끄집어 와서 죽음을 이야기했지만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죽음에는 의미가 없다.’ 죽음은 죽음 그 자체다. 우리가 애써 의미를 부여할 뿐이다. 죽음은 사라짐이고, 죽음의 의미조차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우리는 죽음 뒤에 남겨진 것을, 한때 살아 곁에 있던 존재의 흔적을 붙들 뿐이다.
평생 말장난을 즐겨 하던 마르셀 뒤샹이지만 죽음에 대해서만은 묘하게 진지한 말을 남겼다. “죽는 이는 언제나 다른 이다.” 바꿔 말하면, 죽으면 다른 이가 된다. 끈덕지게 들러붙는 자아의 껍질을 벗고 진정으로 다른 존재가 되는 길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죽음은 경이롭다.’
- ‘나오며’ 중에서
- ‘들어가며’ 중에서
굳이 따지자면 레오나르도의 임종을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이랬을 수도 있고 저랬을 수도 있는데도 이런 식으로 따지는 건 프랑수아가 레오나르도의 임종을 맞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소망을 바탕에 깔고 있다. ‘임종’이라는 극적인 결말이야말로 천재와 군주에게 어울리는 그림이니까. 실제로는 결코 극적이지도 또 명쾌하지도 않다. 이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임종에 관한 기록도, 심지어는 무덤조차 찾을 수 없다. 먼지처럼 역사와 세월 속에 사라졌다.
- 1장 ‘죽음을 맞이하다’ 중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여기부터다. 콤모두스는 마지막 기운을 짜내서 ‘불태워라!’라고 외친다. 그러자 부하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장작에 불을 놓는다. 마지막까지 뒤끝을 보여 주는 황제가 아니라, 부하들이 신속히 황제의 명을 따른다는 점이 불가해하다. 곧 끝장날 황제의 명령을 왜 그리 충실하게 집행했을까? 황제의 주변 사람들은 권력의 향방에 민감하기 이를 데 없었고, 종종 자신들의 손으로 황제를 죽이거나 교체했다. 가뜩이나 정신 나간 황제가 이제 숨이 끊어지는 형국이다. 군인으로서 신망이 두터운 리비우스가 새 황제가 될 공산이 크다. 게다가 그가 화형을 저지하러 나타났다. 이런 판에 섣불리 불을 놓았다가는 리비우스의 노여움을 사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이 모든 계산을 깡그리 무시한다. 기둥에 묶여 불길에 휩싸인 게르만 사람들이 ‘로마는 멸망할 것이다’라고 외치는 장면을 엔딩으로 삼아야 했기 때문이다. 죽어 가는 권력자의 마지막 명령, ‘유언’이 가진 불가해한 힘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 1장 ‘죽음을 맞이하다’ 중에서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는 곧잘 자연이 허락한 수명을 마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된다. 사람들은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종종 잊어버리고는 자신은 아주 긴 시간이 흐른 다음 천천히 세상을 떠날 거라 믿는다. 누구도 내가 죽을 모습을 정해 둘 수 없다. 죽을 시간과 자리, 함께 있을 사람 등도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사고나 재난으로, 또 전쟁과 학살로 사라졌던가.
- 2장 ‘순교자와 암살자’ 중에서
다비드는 마라를 ‘대혁명’이라는 대의를 위해 복무하다 불의의 습격을 받아 숨진 고결한 영웅으로 묘사했다. 마라의 자세를 미켈란젤로의 그 유명한 〈바티칸의 피에타〉의 그리스도에서 가져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를 스스로 목숨을 바친 순교자로 묘사한 것이다. 따라서 그림 어디에도 암살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다비드는 암살이 벌어진 직후의 모습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애초에는 그런 구상을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드넓은 공간에 홀로 스스로의 죽음을 명상하기라도 하는 것 같은 엄숙한 그림을 완성했다. 마라는 지성적인 존재이자 아름다운 육체를 지닌 존재로 묘사되었다. 그림은 널리 환영받았고, 혁명 당국에서는 복제화도 요청했다.
- 2장 ‘순교자와 암살자’ 중에서
상복에는 묘한 아이러니가 담겨 있다. 검은색이 아니라도 오래전부터 인류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장례 때 상복에 해당하는 차림을 갖추었다. 장례에 참여한 이들 모두가 몸에 흰 칠을 하는 오지(奧地)의 원주민 부족도 있다. 인류가 왜 상복을 입거나 상복처럼 꾸몄는지에 대한 설명 가운데 가장 설득력 높은 것은 상복이 일종의 변장이라는 주장이다. 사람들은 망자의 영혼이 되돌아와 저승으로 함께 갈 동반자를 찾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망자의 눈에 띄어 끌려가지 않기 위해 평소와는 전혀 다른 색과 차림으로 자신들을 꾸몄다는 것이다.
- 3장 ‘죽음은 검정’ 중에서
대체로 미술에서 검정은 불안과 절망, 죽음을 가리켰다. 프란시스코 고야가 말년에 자신의 집 벽에 그린 ‘검은 그림’은 공포와 비관론을 표현했다. 널리 알려진 대로 프랑스 화가 오딜롱 르동은 반평생을 검은색만 사용하여 그림을 그렸다. 상징주의 문학의 영향을 받고, 현미경으로 본 미생물의 기이한 모습에서 영감을 얻은 르동은 검정으로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세계를 표현해 냈다. 여기서 검정은 상상을 자극하고 창조를 촉진하는 매개체였고, 모호하고 신비로운 멜랑콜리의 근원이다.
- 3장 ‘죽음은 검정’ 중에서
갈리아 전사는 항복을 거부하고 마지막까지 저항한다. 적보다는 자신의 손에 죽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에 아내를 먼저 죽인다. 적들에게 어떤 끔찍한 일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숨이 끊어져 늘어진 아내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검을 자신의 빗장뼈 위에 세웠다. 이런 방법으로 자살을 기도하는 그림이나 조각을 볼 때면 꼭 내 몸에 칼이 쑤욱 들어오는 느낌이다. 서늘하다.
가슴을 부여잡고 차근히 따져 보면 칼로 심장을 직접 찌르는 방법도 있다. 다만 이렇게 되면 칼을 찌르는 내가 어쩔 수 없이 칼날을 내려다봐야 하니까 두렵다. 이 조각처럼 내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 칼을 세우면 조금은 쉽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검을 수직으로 세움으로써 당당하고 분명하게 자신의 결의를 과시한다. 실제로는 칼날이 조금 들어가다가 멈추기 쉬울 것 같지만… 조각 자체가 전장에서 목격한 모습을 바탕으로 제작되었기에 적어도 모델이 된 전사는 성공했으리라 짐작한다.
여러 기록과 경험이 증명하듯 단번에 스스로의 목숨을 끊기란 쉽지 않다. 자살을 결심하면서도 조금이라도 고통을 줄이는 방법을 선택하거나 내 몸에 칼이 들어가는 장면을 보는 걸 꺼린다거나 하는. 그렇다면 칼날의 방향은 무엇을 의미할까?
- 4장 ‘나를 죽이다’ 중에서
호들러는 두터운 선으로 큼지막하게 윤곽만 잡았는데, 발랑틴의 고통이 커질수록 호들러의 필치도 어지러워진다. ‘연작’을 보는 입장에서는 병자의 몸이 점점 아래로 늘어지면서, 몸을 세워 앉았던 수직선이 수평선으로 내려앉는 과정을 의식하게 된다. 수직선은 삶, 수평선은 죽음이다. 호들러는 발랑틴이 죽던 날 병실 창문으로 본 호수의 일몰을 그렸다.
이날 호들러가 그린 발랑틴은 이제 다른 사람이 되었다. 호수의 수평선처럼 길게 누워 있다. 발랑틴이 한참 고통스러워할 때는 함께 흔들리던 필치가 이제는 차분해졌다. 발랑틴이 신발을 신고 있다는 점은 이상하다. 병석에서 신발을 신고 누웠을 리 없고 발을 저렇게 드러냈을 리는 더더욱. 숨이 끊어지자 관에 모시기 전에 신발을 신겼다. 그러니 이제 걸을 것이다. 걸어가리라.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디든 갈 수 있으리라.
- 5장 ‘죽어 가는 사람을 그린 화가’ 중에서
바야르의 사진은 이미지의 진실성에 관한 흥미로운 물음을 제기한다. 죽은 사람을 찍은 사진이라지만 이처럼 연출된 경우도 있고, 거꾸로 실제로 사고나 전투 현장에서 죽은 사람을 찍은 사진은 영화에서 엑스트라들이 죽은 시늉을 하고 누워 있는 모습처럼 비현실적이다. 죽은 클림트의 모습을 그렸던 실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스페인 독감으로 허망하게 숨을 거두었다. 실레의 죽은 모습을 담은 그림은 없다. 그릴 화가도 없었고, 또 실레가 아주 급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기에 그림을 그릴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은 실레를 담은 사진은 남아 있다. 사진 속 실레는 마치 잠이 든 것 같다.
죽은 이들과 함께 회화도 잠들었다. 이후로는 사진의 시대가 열린다.
- 5장 ‘죽어 가는 사람을 그린 화가’ 중에서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한 명 한 명 주변의 죽음을 보고 듣는다. 나이가 들수록 경험하는 죽음의 수가 늘어나며 조금씩 죽음에 둔감해진다고 한다. 반면에 점점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겪게 된다. 죽음에 가까워지면서 둔감해지는 것이다. 이러다가 죽음의 당사자가 되면 벼락을 맞은 것처럼 실감하게 될까? 애도는 망자를 향한 것이지만 망자의 모습에 비친 스스로를 향하기도 한다.
- 6장 ‘애도와 매장’ 중에서
조각가 귀도 마초니가 같은 주제를 연출한 작품과 함께 보면 흥미롭다. 델라르카의 작품에 비해 마초니 쪽은 사도 요한은 조금 더 슬퍼하고 마리아 막달레나는 조금 덜 슬퍼한다. 이로써 전체적으로 감정과 태도의 톤이 통일되어 있고, 구도도 더 정돈되었다. 그런데 덜 매력적이다. 혼돈과 어수선한 리듬이야말로 애도의 실제 모습에 가깝다. 장례는 모순과 긴장 속에 마련된 형식인데, 슬픔은 주체할 수 없고 비탄은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 6장 ‘애도와 매장’ 중에서
영적인 존재는 물리적인 한계를 초월한다. 발끝까지 모두 그려 놓으면 아무래도 무거워 보인다. 이런 이유로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도 유령은 바닥에서 살짝 떠 있는 경우가 많고, 전체적으로 흐릿하고 투명하다. 《꼬마 유령 캐스퍼》의 캐스퍼처럼. 사진이 발명된 직후부터 죽은 사람의 영혼이 찍힌 사진, 즉 심령사진이 많이 나왔다. 그때도 절대 다수가 반투명한 형상이다. 그리고 대부분 조작이다.
‘영혼을 반투명한 형상으로 묘사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예는 회화에서도 적잖이 나왔다. 예술가들이 영혼을 반투명하게 묘사한 건 왜일까? 싱거운 답이지만 완전히 투명한 형상은 아예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설령 보이지는 않지만 자신들의 주변에 영혼이 머물고 있다고 믿는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다는 논리에 들어맞는 모습은 반투명이다.
- 7장 ‘유령’ 중에서
죽은 이가 돌아온다면 어떤 모습일까? 아름답고 건강했을 때의 모습 그대로일까? 아니면 죽기 직전의 쇠약해진 모습, 혹은 부서진 그대로, 심지어 흙 속에서 썩다 만 모습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죽은 이를 그리워한다지만 그런 모습을 바라는 게 아니다. 하지만 죽은 이가 돌아온다면 산 자들이 기대하던 모습이 아닐 가능성이 높을 듯하다. 그래서 죽은 이는 무섭다. 그들의 모습을 짐작할 수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죽은 이들 중 극히 일부라도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면 당연하게도 세상의 모습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달라졌으리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뒤틀리다 못해 무너졌을 것이다.
죽은 이는 돌아올 수 없다. 아니, 돌아와서는 안 된다. 산 자는 살아야 하고 죽은 이는 ‘죽어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산 자는 죽은 이에게 한없이 잔인하다.
- 8장 ‘돌아온 망자’ 중에서
지금까지 숱한 작품과 여러 이야기, 생각의 조각들을 끄집어 와서 죽음을 이야기했지만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죽음에는 의미가 없다.’ 죽음은 죽음 그 자체다. 우리가 애써 의미를 부여할 뿐이다. 죽음은 사라짐이고, 죽음의 의미조차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우리는 죽음 뒤에 남겨진 것을, 한때 살아 곁에 있던 존재의 흔적을 붙들 뿐이다.
평생 말장난을 즐겨 하던 마르셀 뒤샹이지만 죽음에 대해서만은 묘하게 진지한 말을 남겼다. “죽는 이는 언제나 다른 이다.” 바꿔 말하면, 죽으면 다른 이가 된다. 끈덕지게 들러붙는 자아의 껍질을 벗고 진정으로 다른 존재가 되는 길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죽음은 경이롭다.’
- ‘나오며’ 중에서
저자소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전문사 과정에서 미술이론을 공부했다. 현재 미술사를 다각도로 살펴보며 예술의 정형성과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다양한 저술, 번역,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이연식의 서양 미술사 산책], [유혹하는 그림, 우키요에], [멜랑콜리], [뒷모습], [드가] 등을 썼고, [무서운 그림], [예술가는 왜 책을 사랑하는가?], [컬러 오브 아트]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서평
예술의 뒷모습을 파고드는 작가, 이연식의 죽음 담론
이미지로 들여다본 죽음의 진짜 모습
“죽음이 인간의 숙명이라면 한번은 제대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 미술사가가 보여 주는 죽음의 여러 얼굴과 비로소 드러나는 모순들
- 인생의 다양한 모습 이상으로 다채로운 죽음에 관한 이야기
- 죽음을 피하기보다는 바라볼 수 있게, 두려워하기보다는 마주하는 힘을 주는 책
현대는 죽음을 잊고 사는 시대다. 사람들은 우울, 불안, 외로움 같은 죽음이 관장하는 감정들을 껴안고 살아가면서도 사후 세계는 믿지 않는다. 죽고 싶다, 죽을 것 같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막상 죽음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갈팡질팡한다. 어린아이가 노인이 되듯 시간의 섭리에 따른 일일 것이라 막연히 생각하지만 인간사는 예상치 못한 무수한 죽음과 죽음의 여러 양상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동안 죽음을 다룬 책들은 삶에 있어 죽음이 갖는 의미를 모색하거나, 죽음에만 깊은 무게를 두거나, 죽음이 주는 메시지에만 집중했다. 켜켜이 쌓기만 한 죽음의 무게와 위압에서 우리들은 자연히 그것을 마주하기보다는 회피하는 쪽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그리다]는 예술에 나타난 죽음의 온갖 양상과 모습을 다룬다. 죽음을 여러 갈래로 나누고 파헤치다 보니 죽음의 민낯과 지금껏 논의되지 못한 모순들이 도드라졌다. 하지만 무겁고 진지하지만은 않게, 군데군데 유머와 풍부한 논의를 통해 모두가 막연히 의심했지만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던 죽음에 얽힌 궁금증을 열어 본다. 죽음을 언제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면, 인간의 숙명이라면, 죽음을 버려두는 대신 삶만큼 소중히 대해 주고 싶다면 이 책이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인생이 1천 가지 모습이라면 죽음도 1천 가지 얼굴일 수 있다는 깨달음을 전하는 책이다.
◎ 이미지를 통해 들여다본 죽음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도, 또 설명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죽음을 증명하고 밝히려 애써 왔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지’를 빌려 전승되었는데, 이미지는 죽어 사라지는 것 혹은 죽어 없어져 보이지 않게 되는 존재를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오직 이미지 속에서 죽음은 물질적이고 구체적일 수 있다.
[죽음을 그리다]는 이미지를 중심으로 죽음에 다가선다. 임종을 맞은 이들, 숨이 끊어진 이들을 향한 애도, 그리고 마침내 죽음에서 돌아온 이를 묘사한 작품들을 차례로 살펴본다. 평온하게 숨을 거두는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만 인간사는 늘 복잡하고 숨겨진 사연으로 가득하다. 이밖에도 죽음의 안팎,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넘나드는 시선 속에 놓인 유령의 존재도 함께 다루었다. 작가의 말처럼 “거창하게는 인류의 숙명을 의식하며 소박하게는 죽음을 견디는 데 보탬”이 될 수 있다.
◎ 비로소 드러나는 죽음의 모순들
죽음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도드라지는 건 죽음의 모순이다. 우리는 칼로 잰 듯 빈틈없는 죽음의 절차, 아무도 증명할 수 없는 죽음의 진실 앞에서 너무 오래 침묵해 왔다. 죽음을 금기시하는 사이 진실은 저 멀리 달아나 버렸고, 겹겹이 죽음의 공포가 그 사이를 메웠다. 이제까지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는 대개 죽음을 두루뭉수리하게 다루려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에 이 책은 죽음의 과정을 가능한 한 여러 국면으로 나누어 따져 본다. 그 끝에는 죽음의 복잡함과 모순이 자리하고 있다. 쉬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이라도 정확히 바라보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다루는 죽음에 관련된 의혹들은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정확히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모두가 의심하고 생각해 왔던 것들이다. 죽음을 다룬 책이니 무겁거나 진지하기만 할 것 같다는 선입견은 몇 장만 넘겨도 금방 깨진다. 속 시원한 질문과 명쾌한 설명, 긴장을 풀어 주는 웃음 장치는 독자를 죽음으로의 사유로 자연스럽게 안내한다. 실은 이것이 죽음의 진짜 모습이다.
◎ 왜 죽음을 마주해야 하는가
죽음은 생명의 탄생과 동시에 그 곁에서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는 구멍과 같다. 평생 그 거대한 공백을 끼고 지내면서도 오늘 일을 생각하고 내일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자체가 삶의 놀라운 면이기도 하다. [죽음을 그리다]는 죽음에 관련된 여러 사유와 그것을 담은 다양한 예술 작품, 그리고 거기 얽힌 다채로운 이야기를 꺼내고 끄집어 와서 죽음의 향연을 올렸다. 결론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산 사람들은 죽음 뒤에 남겨진 것, 한때 살아 곁에 있던 존재의 흔적을 붙들 뿐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삶을 영혼이 잠시 머물러 가는 곳이라 여겼다. 중세인들은 삶과 죽음이 한 끗 차이라 생각했다. 현대인들은 어떨까? 웬만한 병은 고칠 수 있고, 죽음도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오늘날을 죽음이 사라진 시대라고 칭할 수 있을까? 역설적이게도 죽음이 흔해진 시대라 할 수 있다. 삶과 죽음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죽음을 마주하고 들여다보고 이해해야 한다. 생명이 귀한 만큼 죽음도 귀중하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을 그리다]는 모든 생명에게 바치는 헌사다.
이미지로 들여다본 죽음의 진짜 모습
“죽음이 인간의 숙명이라면 한번은 제대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 미술사가가 보여 주는 죽음의 여러 얼굴과 비로소 드러나는 모순들
- 인생의 다양한 모습 이상으로 다채로운 죽음에 관한 이야기
- 죽음을 피하기보다는 바라볼 수 있게, 두려워하기보다는 마주하는 힘을 주는 책
현대는 죽음을 잊고 사는 시대다. 사람들은 우울, 불안, 외로움 같은 죽음이 관장하는 감정들을 껴안고 살아가면서도 사후 세계는 믿지 않는다. 죽고 싶다, 죽을 것 같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막상 죽음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갈팡질팡한다. 어린아이가 노인이 되듯 시간의 섭리에 따른 일일 것이라 막연히 생각하지만 인간사는 예상치 못한 무수한 죽음과 죽음의 여러 양상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동안 죽음을 다룬 책들은 삶에 있어 죽음이 갖는 의미를 모색하거나, 죽음에만 깊은 무게를 두거나, 죽음이 주는 메시지에만 집중했다. 켜켜이 쌓기만 한 죽음의 무게와 위압에서 우리들은 자연히 그것을 마주하기보다는 회피하는 쪽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그리다]는 예술에 나타난 죽음의 온갖 양상과 모습을 다룬다. 죽음을 여러 갈래로 나누고 파헤치다 보니 죽음의 민낯과 지금껏 논의되지 못한 모순들이 도드라졌다. 하지만 무겁고 진지하지만은 않게, 군데군데 유머와 풍부한 논의를 통해 모두가 막연히 의심했지만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던 죽음에 얽힌 궁금증을 열어 본다. 죽음을 언제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면, 인간의 숙명이라면, 죽음을 버려두는 대신 삶만큼 소중히 대해 주고 싶다면 이 책이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인생이 1천 가지 모습이라면 죽음도 1천 가지 얼굴일 수 있다는 깨달음을 전하는 책이다.
◎ 이미지를 통해 들여다본 죽음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도, 또 설명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죽음을 증명하고 밝히려 애써 왔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지’를 빌려 전승되었는데, 이미지는 죽어 사라지는 것 혹은 죽어 없어져 보이지 않게 되는 존재를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오직 이미지 속에서 죽음은 물질적이고 구체적일 수 있다.
[죽음을 그리다]는 이미지를 중심으로 죽음에 다가선다. 임종을 맞은 이들, 숨이 끊어진 이들을 향한 애도, 그리고 마침내 죽음에서 돌아온 이를 묘사한 작품들을 차례로 살펴본다. 평온하게 숨을 거두는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만 인간사는 늘 복잡하고 숨겨진 사연으로 가득하다. 이밖에도 죽음의 안팎,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넘나드는 시선 속에 놓인 유령의 존재도 함께 다루었다. 작가의 말처럼 “거창하게는 인류의 숙명을 의식하며 소박하게는 죽음을 견디는 데 보탬”이 될 수 있다.
◎ 비로소 드러나는 죽음의 모순들
죽음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도드라지는 건 죽음의 모순이다. 우리는 칼로 잰 듯 빈틈없는 죽음의 절차, 아무도 증명할 수 없는 죽음의 진실 앞에서 너무 오래 침묵해 왔다. 죽음을 금기시하는 사이 진실은 저 멀리 달아나 버렸고, 겹겹이 죽음의 공포가 그 사이를 메웠다. 이제까지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는 대개 죽음을 두루뭉수리하게 다루려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에 이 책은 죽음의 과정을 가능한 한 여러 국면으로 나누어 따져 본다. 그 끝에는 죽음의 복잡함과 모순이 자리하고 있다. 쉬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이라도 정확히 바라보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다루는 죽음에 관련된 의혹들은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정확히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모두가 의심하고 생각해 왔던 것들이다. 죽음을 다룬 책이니 무겁거나 진지하기만 할 것 같다는 선입견은 몇 장만 넘겨도 금방 깨진다. 속 시원한 질문과 명쾌한 설명, 긴장을 풀어 주는 웃음 장치는 독자를 죽음으로의 사유로 자연스럽게 안내한다. 실은 이것이 죽음의 진짜 모습이다.
◎ 왜 죽음을 마주해야 하는가
죽음은 생명의 탄생과 동시에 그 곁에서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는 구멍과 같다. 평생 그 거대한 공백을 끼고 지내면서도 오늘 일을 생각하고 내일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자체가 삶의 놀라운 면이기도 하다. [죽음을 그리다]는 죽음에 관련된 여러 사유와 그것을 담은 다양한 예술 작품, 그리고 거기 얽힌 다채로운 이야기를 꺼내고 끄집어 와서 죽음의 향연을 올렸다. 결론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산 사람들은 죽음 뒤에 남겨진 것, 한때 살아 곁에 있던 존재의 흔적을 붙들 뿐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삶을 영혼이 잠시 머물러 가는 곳이라 여겼다. 중세인들은 삶과 죽음이 한 끗 차이라 생각했다. 현대인들은 어떨까? 웬만한 병은 고칠 수 있고, 죽음도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오늘날을 죽음이 사라진 시대라고 칭할 수 있을까? 역설적이게도 죽음이 흔해진 시대라 할 수 있다. 삶과 죽음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죽음을 마주하고 들여다보고 이해해야 한다. 생명이 귀한 만큼 죽음도 귀중하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을 그리다]는 모든 생명에게 바치는 헌사다.